술과 파티의 시절 5
대학 신입생 환영회 이후로 나도 조금씩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 이런저런 모임별로 거의 매주 MT를 가게 되다보니, 집에 돌아가야 하는 부담이 없어서, 시험 삼아 슬슬 많은 양의 소주를 삼켜보게 된 것도 있다.
그치만 대학 입학초의 술자리 중 또렷이 기억에 남은 건 딱 한 경우다. 첫 수업을 듣고 단과대학 1층 로비로 나왔는데, 처음 보는 2학년 남자 선배 두어 명이 로비 벤치에 거들먹거리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 신입생들 가운데서도 여자애들 몇 명을 손짓을 하며 불렀다.
나를 비롯해 동기들은 입학 전부터 이런 저런 학생회 행사에 참가해왔기에 선배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 선배들은 처음 보는 남자애들이었다. 그들은 (운동권이 대부분인) 학생회 활동을 하지 않는 2학년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거기다 1학년 1학기 전공필수 수업을 후배들과 함께 듣는, 즉 F를 받고 재수강을 하는 2학년들이었다. 그런게 별로 흉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른바 ‘날나리 대학생’이었던 셈인 그 남자애들의 외모가 꽤 멋져 보였다. 후줄근한 학생회 선배들과는 딴판이었고 허세를 부리는 거만한 말투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나를 비롯한 여자애 3-4명이 그들을 따라가보았다. 그들은 우리를 데리고 학교 밖을 나가 술집으로 갔다.
그런데 날나리 남자 선배들이 우리 후배 여자애들을 데리고 간 곳은, 그동안 지겹게 다녔던, 주로 상가 건물 1층에 위치해 있던, 거리에서 잘 들여다보이고 형광등 불빛도 환한 갈빗집이 아니었다. 지하에 위치한 어두컴컴한 술집이었고 ‘소주방’이라 불리는 형태였다.
남자 선배들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우린 찌개, 소주, 이런 건 짜증나서 못 먹어. 요즘엔 레몬 소주지.” 당시에 막 유행을 시작한, 알코올계의 핫 아이템은 오이 소주, 레몬 소주 등 과일과 소주를 섞어 독한 맛을 중화시킨, 이른바 ‘칵테일 소주’였다. 소주방 주인의 아이디어에 따라서는 복숭아 소주라든지 멜론 소주 등 다양하게 제조가 가능했다.
하지만 당시 칵테일 소주의 주요 용도는 사실 남자가 여자에게 먹여서 만취를 시키는 거였다. 역한 맛이 안 나는 달달한 음료를 들이켜다 보면 맛이 가게 되는 거였다. 아마 갈빗집보다 비싼 칵테일 소주방으로 후배들을 데려간 그때 그 선배들의 의도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 진한 사투리를 쓰는, 제일 멋지게 생긴 선배가 우리 후배들 중에 한 여자애를 콕 찍어 좀 다른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같은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아주 어른 취급을 하며, ‘넌 이런 술자리 매너 다 알지? 니가 자리 세팅 좀 하고 얘들한테도 좀 알려줘 봐봐’ 하는 거였다.
아직 그래도 학기 초인 데다가 낯선 선배들이라 좀 얼어 있는 나머지 여자애들과 달리, 그녀는 정말 다 잘 안다는 듯이, “네!” 하면서 능숙하게 술잔과 수저들을 늘어놓고 자리 운영을 거들었다. 나는 그녀가 부럽고 우러러 보였다.
그 후로도 우리 대학생들은 가끔 삼삼오오 모였을 때 ‘레몬 소주 먹으러 가자’고 의기투합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인공적인 맛이 싫어졌다. 아무래도 진짜 레몬이 아니라 레몬 향과 설탕물을 조합한 거 같았고, 이름만 요란하지 비슷비슷한 맛의 다른 칵테일 소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소주는 처음부터 싫었고, 나는 점차 맥주만 마시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