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은 사람, 쓰는 사람 그리고 쓸 사람
쓰고 싶은 욕구라는 게 있다. 지금도 그 욕구에 사로잡혀 글을 쓰고 있으니까. 이 무더운 방에 홀로 앉아 글을 쓰는데 그 주제가 글을 쓰는 이유라니. 꼭 거울 속에 또 다른 거울을 응시하는 사람처럼 무한히 펼쳐진 활자 속에 놓인 내 모습을 상상한다.
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무슨 이유 때문에 나를 이렇게 쓰는 사람으로 데려다 놓는 것일까. 한참을 생각하고 고민했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존재하는 것일지. 유전자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 걸까? 혹시 몰라 아빠, 아빠에 아빠까지 모두 찾았지만 글과 관련된 일을 하신 분은 없었다. 그 무엇이 되었든 이유를 빨리 알았으면 좋겠다. 쓰는 게 좋은 것은 알겠는데 어디에 어떻게 왜 좋은 것인지 알고 나면 더 꾸준히 쓸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에이브러햄 매슬로우가 피마리드 형태의 욕구 단계 이론을 제시한 바 있다. 피라미드 가장 아래 위치한 1층에는 생리적 욕구, 2층에는 안전 욕구, 3층에는 사회욕구, 4층에는 존중 욕구 그리고 가장 높은 곳 5층에는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 매슬로우는 하위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 위에 욕구가 충족된다고 한다. 그럼 나에게 글쓰기 욕구란 어디에 편입시켜야 할지 생각해 봤다. 쓰지 않으면 수면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점심시간에 밥대신 글을 택한 경우도 많았다. 1층에서 보내는 생리적 신호보다 글에 대한 갈증이 더 컸던 것 같다. 혼란스러웠다. 나에게 있어 글에 대한 욕구는 1단계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글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던 때를 기억한다. 당시 나는 세상이 나를 저버린 듯한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다. 하는 일마다 다 실패라는 단어가 따라다녔고, 동료들의 조롱과 냉소가 머릿속 어디에서도 들리는 듯했다. 지금도 미스터리다. 그때는 아무도 나를 그렇게 생각한 사람도 없었고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럼 왜 스스로를 그런 상황으로 몰아가고 가정하고 또 자책한 것일까. 다시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때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마치 과거에 피우다 끊었던 담배처럼, 아련하게 내뿜는 연기가 긁고 가는 느낌정도만 짐작할 뿐이다. 그러다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다 말고 뜬금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시 살만하다는 기운이 완연했다. 왜 그렇게 살만했는지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단지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처럼 더 높은 곳을 탐닉할 뿐이었다.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는 근본 없는 패기가 나를 가득 매웠다. 언덕 같기만 하던 창작의 고통이 산더미보다 높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계속 그랬던 것 같다.
참으로 신기했다. 글은 나에게 연속된 좌절을 보여주었지만 써야 한다는 의무감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나중에는 쓰고 싶다는 욕망이 의무가 되었고 나아가 인류애와 같은 비장함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쓰면 쓸수록 오기라는 게 생겼다. 글이라는 것은 아무리 써도 당장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은 투입과 산출이 전혀 맞지 않았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삭제하고 마는 글이 있는가 하면, 대충 느낀 대로 휘갈겼음에도 마음에 쏙 드는 글이 있었다. 요인을 알고 변수를 조정해 원하는 결과를 얻고자 하는 공대생으로써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어떻게든 그 인자를 찾고 싶었다. 글을 쓰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쇠가 어딘가 활자의 조합 속에 있을 것이라 굳건히 믿었던 것 같다.
가끔 로또를 산다. 1부터 45까지 숫자 중 6자리만 맞추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45명 중에 6등만 하면 되잖아 하다가도 실상은 전혀 달랐다. 확률로 계산하고 나면 복권이 복권인 이유를 알게 된다(실제 당첨 확률은 0.0000123%). 그 조합을 맞춘 사람에게 물어보면 근거가 있어서 선택한 숫자라기보다는, 미신이나 꿈에 끌려 산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그 숫자가 엄청난 확률을 뚫고 당첨이 된 것이고.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마음은 편하다. 지금껏 샀던 로또는 단지 확률이 비껴간 것뿐이라고. 아직 800만 번만 더 시도하면 결국에는 당첨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어찌 됐건 그들도 꿈이든, 계산이든 복권을 샀기 때문에 당첨된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글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로또처럼 대박을 노리며 쓰는 것은 아니지만. 글 잘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의지만큼은 당첨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다. 노력에 시도를 더하고, 매주 쓰고 다시 쓰는 끈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로또와 같다. 로또를 사지 않는 사람에게 당첨이란 있을 수 없듯, 쓰지 않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니까. 언젠가는 마음을 흔드는 글을 쓰겠다는 목표는 지금도 나를 책상 앞으로 이끄는 힘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어떤 단어의 조합을 발견(발명일 수도 있다)해서 누군가에게 로또 같은 깨달음을 선사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고 평온을 얻는다. 인간사에 치여 아등바등 살다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보고 또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위안을 삼는다. 그 이유는 무한정 깊고 넓어 보이는 그 무엇에게서 깨닫음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그 자체가 말하는 진실, 진리라는 것에 비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스스로의 미미함을 조금이라도 알아차린다면 그렇게 인위적으로 살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성공이 무엇이라고 그렇게 속고 속이며 살아온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우리 모두는 유한한 삶을 산다. 완성된 퍼즐의 형상을 모른 채, 하나씩 맞춰가는 인생에서 무한에 가까운 확률로 탄생하는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