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 포레스트를 곁들인 너저분한 일기
심란한 밤이면 H가 제주도에서 사다 준 인센스를 종종 태운다. 경우에 따라 피운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만 향 냄새가 내 방 너머 거실까지 흘러갈 때면 엄마는 향이 인체에 해롭다는 말에 종교적 이유까지 들어가며 분위기 좀 내려는 나를 방해했다. 요즘 들어 태우는 날이 간간이 늘어나니 마음이 불편하거나 생각이 많아질 때 꺼내는 걸 엄마도 아는지, 괜찮다는 말을 끝으로 내 방문을 닫고 들어오면 잔소리를 멈춘다.
흡연자가 아닌데도 더러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인센스는 그 역할을 얼추 비슷하게 해 준다. 이 역시 내 느낌일지 모르지만 아빠가 태우던 담배 냄새는 가까이 가기도 싫을 만큼 지독해 차가운 공기만이 머무는 겨울에만 좋았는데, 아무튼 나는 유독 비가 올 때 특유의 탄내를 찾곤 한다.
이름마저 레인 포레스트. 비와 숲을 좋아하는 내게 이만큼 낭만적인 향이 또 있을까 싶은 걸 보니, H는 역시 나를 잘 안다. 비에 적당히 젖은 풀이 앓는 듯 타는 냄새가 난다. 꺼져가는 불씨가 소멸만은 막아내기 위해 제 몸의 불을 끄려 눈물을 흘리는 느낌 엇비슷한 그 향이 젖힌 커튼과 반쯤 열어둔 창문 사이로 방 안을 가득 메우는 순간, 그녀의 질문이 떠올랐다. 너는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정말로 없어? 그러게. 나는 왜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을까. 글쎄. 죽음을 목전에 둘만큼 살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나. 아니면 내가 가까이서 지켜본 죽음을 보아하니, 죽음만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심오한 환상 같은 게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나. 아마 내가 죽을 고비까지 가볼 만큼 수많은 위기들을 꾸역꾸역 삼켜내는 동안에도 죽음이란 두 글자는 내가 살고 싶은 이유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금세 풀이 죽었던 것 같다.
당시 그 물음에는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신이 나를 낭떠러지 코앞까지 내던졌다가 떨어지지 않을 묘책을 하나씩 던져주는 그 기분 나쁜 느낌이 이상하게 오기를 불러일으켜 산다고 했다. 센 척이 좀 섞인 대답이었다. 실은 너무 힘들어도 살고 싶은 욕망이 언제나 나를 일으켰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하는 얼굴들이 여전히 너무 선명해서, 내 글을 제대로 쓰기 시작한 지 고작 몇 개월 째라, 아직 마셔보지 못한 커피와 술이 너무 많아서. 다른 데 안 쓰고 꼬박꼬박 사 모아둔 책들이 책장에 즐비해 있어서, 내내 기다렸으나 코로나 때문에 개봉이 밀린 영화들이 아른거려서. 그러다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만은 아니었구나를 깨닫고는 감정이 금방 시들해졌다. 살아서 굳이 죽음 뒤의 삶이 또 있을지 궁금해하고 싶지도 않다. 아직은 죽음으로 얻는 것들보다 살아있음으로 얻는 것들이 더 가치 있다고 느끼고 있다.
어쩌면 H가 건넨 인센스가 나를 붙잡아둘 작정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술이 좀 고팠고 나름대로 외로웠다. 매년 내 몫의 할당량처럼 타야만 하는 외로움은 봄이라는 계절 안에만 있었기에 그 외에는 외로움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는데, 으레 타 왔던 봄을 원인으로 두기에는 조금 복합적이다.
인센스를 절반으로 끊어 반만 태웠는데 모자란 느낌이다. 사적인 글을 쓸 때만큼은 '멜랑꼴리 한 클래식'이라는 플레이 리스트를 즐겨 듣는 편인데, 시간이 시간인 지라 스피커 볼륨을 낮추고 남겨둔 인센스 반을 마저 다 태우고 자야겠다. 요새는 내 강아지 라떼가 옆에서 자고 있지 않으면 조금 불안하다. 늘 그렇듯 깨어있어 긴 새벽에는 고픈 배가 자연스레 아침 메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보니 살고 있어서 살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