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맺지 못한 글들이 폴더 안에 그득하다.
정리하지 못한 장면은 머릿속에 나뒹굴고 차마 전하지 못한 마음은 메모장에 남아있다.
좋게 말해 신중하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꽤 어지러운 속내를 가져 매사에 후회가 많은 나는 무엇이 되었든 끝을 내는 일에 많이 서툴렀다. 끝이라는 한 글자에서 밀려오는 어떤 허무감과 공허함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에 큰 구멍을 만들어 그곳을 메우는 데만 며칠씩이 걸린다. 끝이라는 단어로 정말 끝이 나버리는 경우는 결코 없을 거라고 굳게 믿은 탓이다.
어떤 이의 운명을 그저 운명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을 폭력적으로 읽지 않을 만큼 담담해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불행을 예측하지 못한 행운과 엇비슷한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안다. 생과 죽음의 사이에 읽기 쉽게 나열된 운명의 단어들이 잘게 쪼개진 구간들을 지날 때마다 버겁다.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고 경험하고 싶어도 경험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이 생의 장막을 둘러싼 채 이정표만을 제시하는 현재에서, 끝의 모습을 어렴풋하게만 상상해야 하는 것 자체가 내겐 길고 긴 터널 안의 매캐한 공기처럼 텁텁하게만 느껴진다.
이렇게 날이 점점 추워지는 시기에 하늘이 비를 한바탕 쏟아부을 때면 꼭 야릇한 기분에 휩싸이고는 한다.
이를 테면 비보다는 무겁고 눈보다는 얕은 잠을 청하는 구름의 모양 같은 기분이랄까.
들어선 자리만 보이고 빠져나올 길은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터덜터덜 걸어가는 상상 속에 갇히기 시작한 것은 장마가 하늘을 검게 물들이던, 그러니까 아마도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2주가 시작될 즈음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호스피스 병동이라는 공간 자체에 발을 들인 것 자체도 스물다섯 해 만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이러나저러나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곳은 정말이지 생사의 경계가 모호한 느낌이었다. 숨은 붙어 있지만 깨어있다기에는 영 부족한 느낌. 생사에 대한 상상 자체가 욕심이기 때문에 금물인 공간.
그곳에 내 짐을 풀고 의무감 섞인 방문을 시작하던 즈음, 나는 그곳에서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기보다는 살아있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미안함은 비단 그들이 지닌 시간보다 조금 더 먼 날들이 내게 부여되었음에도 고운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며 삶을 간절히 원하는 그들의 죽음을 나도 모르게 직감하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 쓸모없는 자만심 같은 것이었을까.
그 공간에서의 계절과 온도가 가늠될 무렵, 문득 기억 한 편에 자리한 마지막 모습들이 나의 시작을 일깨웠다.
호스피스 병동에 묵은 2주라는 시간 그 후, 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그 기억들을 언어로써 저장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겼다. 비어있던 그 공간을 오롯이 나의 언어로 메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것들을 하나 둘 엮어 고름 같던 마음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게워내 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2016년 초여름, 뉴스에서는 때 이른 장마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