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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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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크림 Jul 08. 2018

샤넬이 사랑한 모든 것

Qui Qu'a Vu Coco, 누가 코코를 보았나?

 


여름하면 뮈가 떠올까?바캉스, 태양, 바다
그리고 자외선 차단제. 여름에는 타기 쉽기 때문이다.

우린 왜 자외선차단제를 바를까?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자외선차단제가 가장 효과적으로 피부의 광노화를 예방해주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때 미의 기준에서 빠지지 않았던 게 있었다. 피부, 그것도 맑고 투명하게 하얀 피부.


하얀 피부에 대한 동경은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눈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공주를 만들어냈고, 중세 시대 유럽 여성들이 결핵 환자들 특유의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 창백한 피부를 위해 결핵균을 먹는 기행을 벌이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미인의 조건으로 구색을 꼽았는데, 그 중 첫째가 삼백, 하얀 피부, 하얀 치아, 하얀 손이였다. 일본에서는 하얀 피부는 일곱가지 결점을 가려준다하여 흰 피부를 숭상했었다. 중국의 미인의 조건인 세요설부 역시 가는 허리와 눈처럼 하얀 피부를 의미한다.


왜 인류는 하얀 피부를 칭송했을까?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현재 인류는 지금까지의 호모사피엔스의 역사 상 가장 편안한 시대에 살고 있다.

예전 인류는 정말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해가 떠있는 시간에 농사를 지어야 했고, 사냥에 나서야 했다.

자외선 차단제도 없었던 시기에, 그들이 하얀 피부를 갖는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동서양을 떠나 과거에 하얀 피부를 가졌다는 건, 먹고 사는 문제에서 해방된 존재로,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서구권에서 Red neck이라는 단어가 햇빛에 그을려 빨갛게된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비하하는 단어인 것 역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오히려 금빛, 구리빛 피부를 멋지다고 하는 인식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요새는 피부가 타지 않고 돌아오면, 아.. 여름 휴가도 못 갈 만큼 힘들게 사는 구나 라고 보는 인식이 있어, 일부러 태닝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유행은 지극히 문화적 산물이다. 유행이 있다면 분명 이 유행을 주도한 인물도 있다.

이 유행의 시작점에는 코코 샤넬이 있다. (핫한 운동 선수나 아티스트들 때문인 거 아닌가요?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작점을 따져보자면 코코샤넬이 좀 더 일찍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코코 샤넬이 잠시 잠적하다 파리 사교계에 돌아왔을 때 까맣게 그을린 피부로 돌아왔다. 파리 사교계의 패셔니스타 코코 샤넬, 그녀의 태닝된 피부는 단연 화제였다. 그 후 사람들은 일광욕을 하며 피부를 태닝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코코 샤넬이 얼마나 문화적 아이콘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랜 시간 인류에 각인되어온 미 기준을 바꿔버리다니. 그녀는 참 혁명적인 인물이다.


이 여름, 샤넬에서 새로운 향수가 나왔다.

레 조 드 샤넬..

레 조 드 샤넬은, 코코 샤넬이 사랑했던 세 도시 도빌, 비아리츠, 베니스에서 받은 영감을 표현한 향수다.

이 세 도시는 각각 샤넬과 인연이 있는 도시이다. 이런 도시를 향으로 표현한 향수가, 샤넬 사후에 나오다니...

코코 샤넬이 살아있을 때 이 향수가 나왔다면, 샤넬은 이 향을 어떻게 느낄까?

어쩐지 아련하고 먹먹한 느낌이 든다.




레 조 드 샤넬 도빌,

탑 노트에 바질, 시칠리아 오렌지 레몬, 베르가못, 라임, 페티그레인,

하트 노트에 자스민, 장미. 그린노트, hedion,

베이스 노트에는 깔끔하게 패츌리 하나가 들어가 있다.


레 조 드 샤넬 베니스,

탑 노트로 핑크페퍼, 오렌지, 베르가못, 레몬, 페티그레인

하트 노트에는 네롤리, 아이리스, 장미, 제라늄, 일랑일랑

베이스 노트로 바닐라, 통가빈, 화이트머스크.벤조인, 오리스, 바이올렛이 들어가 조금 복잡하다.


레 조 드 샤넬 비아리츠,

탑 노트로  탠저린, 자몽, 베르가못, 레몬, 오렌지

하트 노트에 은방울꽃, 네롤리, 그린노트

베이스 노트에는 화이트 머스크, 패츌리


레 조 드 샤넬 라인은 전체적으로 탑노트에서 시트러스 향을, 그리고 하트 노트에서 그린노트를 공통적으로 품고 있다. 그리고 이 세 향수가 서로 비슷한 면을 따로 또 같이 공유하고 있어 레 조 드 샤넬 라인의 통일성을 갖추었다. 도빌과 비아리츠는 베이스 노트에 둘 다 패츌리 향을 담았고, 베니스와 비아리츠는 하트 노트에서 네롤리와 베이스 노트의 화이트 머스크를 통해 톤을 맞추었다. 각각 시그니처를 느낄 수 있는 키포인트 원료인 자스민, 바닐라, 은방울꽃 향료들을 겹치지 않게 적재적소에 배치해 레 조 드 라인의 톤을 유지하면서도, 각기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도빌과 비아리츠는 첫 향에서 시트러스의 향이 물씬 느껴진다. 첫향은 거의 비슷하다 도빌이 좀 더 톡 쏘는 느낌이긴 하지만... 하지만 잠시 후부터 두 향은 각기 다른 향을 띄는데, 도빌은 자스민 특유의 파우더리한 느낌과 장미가 들어가면 느낄 수 있는 익숙한 자스민 특유의 부드러운 플로럴 향이 돋보인다면, 비아리츠는 은방울꽃 특유의 은은하고 신선한 향으로 도빌보다 가벼운 플로럴향이 느껴진다. 하지만 비아리츠에는 베이스로 화이트 머스크가 들어가면서 도빌보다 가볍게 느껴질 법한 향의 균형을 잡아준다.


특이한 건 베니스였는데, 나는 살짝 도빌과 비아리츠에 비해 머리 아픈 향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도빌보다 좀 더 진한 장미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개인적 취향으로, 나는 장미와 레몬 향이 각자 강하면 좀 부담감을 느낀다. 베니스는 다른 두 향수보다 탑노트부터 좀 더 강한 느낌이 든다, 핑크페퍼 때문이리라. 핑크 페퍼 특유의 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베니스에 더 끌릴 것이다. 베니스는 하트 노트에서 아이리스를 그리고 베이스 노트에서 오리스, 아이리스 꽃의 뿌리 추출물을 원료로 써서 아이리스 향을 온전히 담았다. 아이리스 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는 향이다. 게다가 베이스로 들어간 바닐라는 탑 노트에서부터 느껴질 만큼 진한 향을 드러낸다. 좀 더 깊은 달달함이 느껴지는 건 아마 이 바닐라 때문일듯...


도빌, 비아리츠, 베니스 모두 바닷가에 위치한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바닷가 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푸른 색인데, 이상하게 향수들은 시트러스 향을 활용한다. 시트러스 탑노트가 비슷한듯 하면서도, 각자 다른 매력을 뿜어내고 있듣 레 조 드 샤넬...


도빌, 비아리츠, 베니스 이 세 도시는 2014년 DDP에서 열린 샤넬 <장소의 정신> 전시에서도 언급된 적 있었던 도시였다. 그 이름을 딴 향수가 만들어진 것이다.



장소의 정신에서는 어린 시절 그녀가 자랐던 장소부터 시작한다. 오바진 고아원에 맡겨진 그녀는 그곳에서 수녀들의 절제된 패션과 촛대,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며 자랐고,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녀의 패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샤넬의 아버지는 그녀를 맡긴 후 단 한 번도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녀는 매주 일요일이면 혹시나 아버지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다림 속에서 자랐다.


그녀는 어른이 된 후, 마을 변두리 작은 술가게에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벌었다. 이 때 사람들은 그녀가 부르던 가사에 나오는 코코를 그녀의 이름 대신 불렀다. 그녀는 이 이름을 무척이나 싫어했는데, 죽을 때까지 그 이름으로 불린 걸 떠나, 지금까지도 코코 샤넬이란 이름이 불리고 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엔띠안느 발상을 만났다. 그녀는 그의 집에 얹혀지내며 다른 사람들의 의상과 모자를 만들어주며 돈을 벌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게를 열고자 했지만, 발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부- 물론 공식적인 정부는 아니었지만-가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 사교계에 알려지는 건 모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폴로와 승마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발상은 그의 집에 가끔 말을 잘 타는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했었다. 그때, 샤넬이 평생을 사랑했던 연인 아서 카펠 역시 초대되었다.



샤넬과 카펠은 에띠안느 발상의 별장에서 서로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 샤넬과 카펠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샤넬 역시 평생 자신의 출신에 대해 비밀로 하고 싶어했다. 고아원, 변두리 술집에서 코코라 불리며 노래하던 시절을 모두 감추고 싶어했다. 카펠 역시 출신이 불분명한 미스테리한 존재로 그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출생에 대해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마음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 카펠은 샤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가 자립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녀가 디자인한 모자를 판매할 수 있도록,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고, 그녀가 깜봉가에 가게를 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녀가 사교계에서 기죽지 않도록 그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주었다. 그 덕분에 그녀는 사교계에 필요한 교양, 화술 뿐 아니라 사업에 필요한 패션 지식과 인맥 그리고 자본까지...그가 줄 수 있는 건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주었다. 그는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건 그 무엇 하나 아끼지 않고 주었다. 꽤나 큰 자본이 들어갔음에도 그는 사업의 경영을 전적으로 샤넬에게 맡겼다. 그녀가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후원자이자 애인, 영감을 주는 뮤즈였다. 아서 카펠은 보이 카펠로도 불렸는데, 유명한 샤넬 보이백은 아서 카펠의 권총주머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져, 그의 이름에서 따와 보이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샤넬은 보이 카펠을 회상할 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 그를 만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어. 나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는 존재를 만났던 거야."



1910년, 샤넬은 아서 카펠의 도움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깜봉 21번가 한 건물의 2층에 모자 가게, 샤넬 모드를 오픈했다. 샤넬의 전설이 시작된 깜봉 21번지부터 30번지까지 이어지는 샤넬 매장. 깜봉 라인이 있을 만큼 샤넬하면 떠오르는 곳은 파리의 깜봉이다. 지금도 샤넬 본사는 파리 깜봉가에 있다. 그만큼 샤넬 하면 떠오르는 건 파리의 깜봉가이다. 허나, 실질적인 샤넬 부티크의 시작은 1913년 도빌에서 시작되었다.


도빌은 샤넬과 카펠이 밀월여행을 떠난 곳이자, 그녀가 처음으로 가 본 휴향지였다. 파리에서 차로 약 200 Km 떨어진 곳으로,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달리면 닿을 수 있는 해안 도시이다. 샤넬은 1913년 도빌에서 그녀의 첫번째 샤넬 부티크를 오픈하였다. 1860년 모르니 공작에 의해 조성된 도시인 도빌은, 바다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여름 휴양지이다. 샤넬과 카펠이 한참 사업을 이어가던 중 제1차 대전이 일어났고, 카펠은 영국으로 돌아가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중 카펠은 영국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며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한 와중에도 휴가를 받으면 샤넬과 함께 비아리츠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었고, 그녀에게 사업적 멘토로써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카펠과 함께 떠난 비아리츠에서 1915년에 2번째 샤넬 분점을 냈다. 비아리츠는 과거 작은 어촌 마을이었으나, 은빛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3세와 에스파냐 출신의 왕후가 그 곳을 다녀간 후, 유럽 왕족과 귀족들에게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휴양지로 프랑스에서 최초로 해수욕장이 만들어진 도시였다.



도빌과 비아리츠는 그 당시 힙한 해양 휴양지였다.한국의 양양처럼 힙스터들의 핫플레이스+ 귀족적인 분위기...

도빌은 항구가 발달했던 휴양지였고, 비아리츠 역시 바다가 아름다운 휴양지였다. 샤넬은 도빌에서 받은 영감으로 도빌룩을 완성했는데, 챙이 넓은 모자와 빨강, 흰색, 파랑색을 조합해서 리조트웨어를 만들어냈다. 비아리츠에서 얻은 작물로 만들어진 비아리츠룩 역시 해안가에서 잘 어울리는 마린룩이었다. 스트라이프 무늬의 마린룩, 남성들이 즐겨입던 저지로 만든 스웨터, 세일러 블라우스 역시 도빌에서 받은 영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샤넬이 여차하면 도빌에서 배를 타고 카펠과 함께 영국으로 도망가기 위해 그 지역에 머물렀다고도 하지만, 샤넬은 도빌과 비아리츠 특유의 상류층 문화를 사랑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 패션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녀는 사교계에 관심이 많았다. 아서 카펠과 처음 만났던 것 역시 한 사교계 모임에서 였다. 그녀는 자신의 직원들 역시 귀족이나 명문가 출신의 사람들을 채용하려고 했는데, 그들이 사교계에 나가 파리 사교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유행에 대해 캐치해오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고객 확보를 위해 상류층과 사교계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 누구보다 열렬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아서 카펠이었으나, 그의 성공에 대한 욕망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그는 정치로 나가고 싶어했다. 더 큰 성공을 위해선 그를 지지해줄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필요했다. 그런 그에게 샤넬은 아내로써, 충분하지 못했다. 그녀는 전쟁 기간 중 파리를 떠나며 사치품과 옷들을 챙기지 못하고 도빌로 온 귀족들 때문에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하고 돈을 벌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돈 그 이상이었다. 가문, 그는 배경을 원했다. 아서 카펠은 출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남작 가문 출신의 딸로 당시 미망인이었던 다이애나와 결혼하였다. 아서 카펠을 사랑했기에, 또 그를 너무나 잘 이해하기에 신분을 위해 결혼을 선택한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 결혼으로 자신이 버려질 걸 알면서도 막을 수 없었다. 허나, 그는 결혼 후에도 샤넬과 연인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아서 카펠은 어느 일요일, 프랑스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장례식은 영국에서 치뤄졌고, 그녀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마지막을 볼 권리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슬픔 속에서 공개된 그의 유언은 그의 재산 70만 파운드 중 62만 파운드는 다이애나와 자신의 두 딸에게, 나머지 8만 파운드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두 여인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이었다. 카펠에게 샤넬 말고도 또 다른 여인이 있었던 것이다. 샤넬은 카펠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할 만큼 큰 상실감을 느꼈다. 상실감을 잊기 위해 그녀는 베니스로 떠났다. 베니스는 샤넬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그녀는 베니스의 상징인 사자상을 좋아했는데, 마침 그녀의 별자리 역시 사자자리라 사자상을 모아 집안 곳곳에 두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녀는 사자자리가 지닌 왕, 귀족스러움을 좋아했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의 신분을 넘어서, 스스로 성공한 그녀지만, 사자자리 특유의 타고난 고귀한 신분을 동경했던 걸지도... 물론 근거 없는 내 생각일 뿐이다.



샤넬은 노동은 정신적 상실감을 잊게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하지 않는 날인 일요일을 극도로 싫어했다. 고아원에서 하루종일 아버지를 기다려야했던 일요일이 싫었고, 카펠을 데려간 일요일을 싫어했다. 그녀는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다른 날들처럼 일을 했다. 아서 카펠과 노동이 슬픈 감정을 감소시킨다는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일을 하면서 일요일이 주는 슬픔을 잊고자 했을 것이다.  어떤 의미론 나도 일요일을 싫어한다. 일요일이 지나면 월요일이 오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그 후 그녀는 그 어떤 남자도 만나지 않고 늘 아서 카펠을 그리워했다면, 그건 당연히 소설 속의 이야기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그녀는 사랑과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늘 아서 카펠을 그리워했지만, 그녀는 또 다른 남자들을 만났다. 카펠이 그녀의 시작을 도와주었다면, 러시아의 드미트리 대공은 그녀에게 향수 사업으로 안내했었고,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떠난 영국에서 받은 영감으로 트위드 소재의 잉글리쉬룩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아서 카펠, 드미트리 대공, 웨스트민스터 공작처럼 그녀를 후원해주던 부유한 사람들도 만났지만, 그녀가 후원해줄 수 있는 예술가들도 만났고, 심지어 세계 2차 대전 중에는 독일 장교와도 사랑에 빠진다. 평생 사랑에 쉬지 않았던 그녀지만, 늘 사랑의 끝에 아파했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았다. 밤이 되면 홀로 몽유병에 괴로워해야했고, 혼자 남겨진 채 외로움과 싸워야했다.


얼마나 격정적인 삶인가?


<장소의 정신> 전시를 다녀온 후, 오드리 토투 주연의 영화 코코 샤넬까지 한번에 몰아치듯 봤다.

그리고 그날 난 샤넬에게 적잖게 실망했다.

내가 아는, 아니 내가 상상한 그녀와 너무 다른 그녀가 영화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씌워놓은 프레임으로 대상을 본다. 그 프레임이 벗겨지거나, 그 프레임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상대에게 실망하고, 때로는 그 대상을 비난하며 원망하기도 한다.

나는 샤넬에게서 완벽하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만으로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 성공한 여성의 이미지를 기대했다. 언제 어디서나 늘 당당하고, 멋지고, 세련된 독립적인 이미지를 원했다.


"아무나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되려면 항상 달라야 한다."

"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

"우아함이란 거절이다."

"성공은 종종 실패가 불가피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달성된다."


얼마나 많은 명언을 샤넬이 남겼는가? 허나 영화 속 그녀는 매우 궁상 맞았고, 굴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했고, 자신의 출신과 과거에 대한 열등감을 지닌 여성이었다. 재능만 가지고 홀로 힘으로 성공하는 자아상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 낭만을 현실을 살아가야하는 사람에게 요구했다. 주판을 튕기고,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긴장감이 팽배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녀에게 낭만을 강요했다. 제멋대로 기대해놓고, 제풀에 지쳐 실망한 것이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 일일까?


우리는 샤넬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한다. 미디어에서, 패션에서 그녀의 이름은 너무 많이 회자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샤넬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를 제대로 보았을까?

어쩌면 우린 텍스트 뒤에 있는 그녀의 진짜 이야기는 1도 모르는 채 환상 속의 그녀를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래, 왼쪽) 샤넬은 책을 좋아했다. 책은 어린 시절 그녀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이었기에 책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고...

가브리엘 샤넬은 그녀를 후원했던 남자들, 심지어 그녀의 연인이었던 아서 카펠에게 빌린 돈에 이자까지 쳐서 갚았던 사람이었다. 공짜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을 싫어했던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사실은 모른다. 그녀의 화려한 남성 편력과 부유한 남자들의 후원같은 뒷 이야기만 알고자 한다. 그녀가 성공한 후, 장 콕도나 스트라빈스키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이야기는 잘 모른다. 심지어 스트라빈스키와 샤넬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도 말이다. 스트라빈스키는 그 유명한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의 스트라빈스키다. 물론, 스트라빈스키와 그녀의 불륜에 대해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건 확실히 두 사람의 잘못이다.


그녀에게는 수 많은 연인이 있었다. 그녀를 사교계로 이끌어주었던 에띠안느 발상, 평생 잊지못했던 연인 아서 카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드미트리 대공, 웨스트민스터, 독일군 장교... 그녀는 독일군 장교와 사랑에 빠졌고, 나치의 스파이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프랑스인이었던 그녀가 독일 장교와 사랑에 빠진데다, 나치에 협력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그녀는 스위스로 잠적하기도 한다. 그 사이 발렌시아가와 크리스챤 디올이 프랑스 패션계에서 새롭게 떠오르자, 자신이 잊혀지는 걸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1953년, 다시 패션계로 복귀했다. 처음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1954년 샤넬 2.55을 통해 화려하게 재기했다. 샤넬 2.55가 유명한 건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한 디자인 때문이 아니다. 샤넬 2.55백은 제일 처음으로 체인을 적용한 백이다. 그 이전에는 여성들의 가방은 손잡이가 달려있는 핸드백이었다. 샤넬은 가방 손잡이를 잡아야하는 불편함에서 여성들을 해방시켰다. 여성들의 손에 자유를 선사했다.


지금 시대의 옷이라고 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옷들을 입고 있는 샤넬,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만든 사람

이래서 패션계는 샤넬의 전후로 나뉜다는 것이다.

샤넬은 패션은 지나가지만 스타일은 남는다라는 말을 했다. 그녀의 스타일은 여성들을 불편하고 화려하기만 한 스타일에서 벗어나 우아하지만, 실용적인 스타일로 끌어들인 것이다. 전쟁으로 150만명 이상의 프랑스 남성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여자들이 직접 생활 전선에 뛰어들 수 밖에 없어진 시기에, 샤넬이 제시한 스타일은 여성들이 더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옷이었다. 코르셋, 움직이기 불편한 프릴,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던 벨 에포크 시대의 숨막히고 타이트한 드레스에서, 바지를 입어도 멋낼 수 있음을 보여주며, 여성들을 현실로 이끌고 나온 것이다. 그녀는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 현실적인 스타일을 세상에 내놓았다.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영원한 반항아, 가브리엘 샤넬

광고는 개똥망으로 찍었지만.....


그녀를 기리는 향수, 가브리엘 샤넬의 카피 문구는,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영원한 반항아,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과 운명을 선택한 가브리엘 샤넬" 이다.


탑 노트에 만다린 오렌지, 그레이프 후르츠, 블랙 커런트,

하트 노트엔 튜베로즈, 일랑일랑, 자스민, 오렌지 블러썸, 배, 핑크페퍼, 은방울꽃

베이스 노트로 샌달우드, 캐시미어, 머스크, 오리스로 구성된 가브리엘 샤넬은 정말 그녀를 닮았다.


상큼하고 신선한 시트러스 향 속과 관능적인 향을 만들어내는 튜베로즈, 일랑일랑, 자스민을 배합하면서도 배와 은방울, 오렌지 블러썸을 통해 여성스러운듯 하면서도, 천진한 아이같은 모습을, 핑크페퍼로 쉽지 않은 그녀만의 톡 쏘는 매력을 표현했다.


어떻게 향으로 사람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가끔은 이렇게 무릎이 탁쳐지기도 한다. 다양한 그녀의 모습들을 하나의 향수병 안에 담는다. 책 한 권, 영화 한 편 속에 다 담지 못한 그녀의 모습을 좀 더 감각적으로 전해주는 느낌이었다.


나를 향으로 나타낸다면, 나는 어떤 향일까?

나에겐 무엇이 들어갈까?

다른 건 모르겠지만, 내 향수를 만든다면, 그 안에 들어갈 원료는 내가 직접 고르고 싶다.

나 역시,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과 운명을 선택하고 싶고, 열정과 자유가 가득한 인생을 살고 싶다.


"신은 내가 사랑을 원했다는 것을 안다.

그 순간 난 내가 사랑했던 남자와 나의 꿈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난 일을 택했다. 일은 내게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존재다.

가끔씩 사랑이 없었다면 내가 무엇이 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만약 나에게도 신이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무엇을 택할까?

그 순간이 와봐야 알겠지만,

저렇게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그녀지만, 어쩌면 그녀 역시 자신이 진정 원하던 모든 것을 얻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녀가 가장 싫어했던 일요일에 세상을 떠나야 했고, 그녀가 가장 싫어했던 이름 코코로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다.


세상은 정말 알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을 얻은 듯 해보여도, 실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잃은 듯 해보여도, 실은 모든 것을 얻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생에서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삶의 끝에서 나는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밤이다.


다행인 건, 나는 그녀처럼 잠 못드는 밤도 없고, 외롭지도 않다.

밤이면 가족들과 모여, 속닥속닥 이야기하는 이 작고 사소한 행복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평생에 걸쳐 갈망했던 소망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주 사소한 행복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물론 전적으로 나의 신포도, 정신승리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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