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정해져 있을까?
얼마전 - 사내 이벤트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 클로이가 어김없이, 또 다시, 역시나, 늘, 당연히 라고 말하면 좀 과장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역시나 또 다시 사내 이벤트에 당첨되어, '지금 만나러 갑니다' 영화 티켓을 받았다. 덕분에 나 역시 은근슬쩍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이치카와 다쿠지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2005년 일본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크게 히트를 쳤다. 십년이 훌쩍 지나, 한국에서 다시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리메이크 되었다.
영화는 현재 절찬리에 상영 중이기에, 영화를 아직 안 봤거나, 앞으로 볼 계획이 있다면 이 글은 읽지 않는 게 좋다. 나는 스포를 정말 좋아하여, 일부러 스포일러란 스포일러는 다 찾아보고 영화를 보러간다. 나 같은 사람은 이 글을 계속 읽어도 괜찮지만.... 밑에서 부터는 이제 정말 감정적인 영향까지 미치는 미친 스포가 펼쳐진다. (분명 이야기 했기에, 그 다음 일은 책임지지 않겠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사실 이미 영화 포스터에서 가장 큰 스포가 나와있다. 제목 자체가 스포다. 그 외에도 자잘한 스포가 포스터 곳곳에 나와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스포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만...)
아내가 떠난 후 1년 장마가 시작되자, 죽은 아내가 다시 돌아왔다. 절대 호러나 좀비물은 아니다. 이것은 로맨스물이다. -여기서 부터 스포가 시작된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내가 돌아온 것은 아니다. 아내가 되기 전의, 결혼 전인 과거의 아내가 타임슬립하여, 미래로 넘어온 것이다. 25살의 수아(손예진)는 교통사고로 인해, 8년 후의 미래로 타임슬립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미래에서 미래의 아들과 남편을 만난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장을 보게 된다. 미래의 내가 어떤 선택을 했었는지, 그녀는 그녀의 미래 전부를 보게 된다.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서도 그녀는 일기장에 쓰여있던 것과 똑같은 미래를 다시 선택한다. 아들이 있고, 남편이 있고, 자신이 32살의 나이에 죽게되는 미래를 망설임없이 선택한다. 물론 완전히 망설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기장을 썼던 수아는 망설였다. 32살에 죽고 싶지는 않았기에,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고에서 살아난 건 그 자신의 아들과 남편을 위해서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미래를 선택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쿨한 클로이는 "될놈될"이라는 한 마디로 이 영화를 정리했다.
남녀 주인공이 이미 처음부터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결국 그 둘이 잘 되는 것에 포인트를 맞춰 될 놈들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차원을 넘어서 미래로 타임슬립까지 해서 그 둘이 잘 되는 이유를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 둘은 원 사이드 러브가 아니라 쌍방향, 인터랙티브 러브였던 셈이라고...서로 말하지 못하고 용기가 없어 몇 년이나 지나 이어지긴 하지만, 결국 서로 잘 될 운명이었다고.. 그리고 그녀는 영화를 보면서 1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고 고메 팝콘만 먹었다. 콜라도 마셨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보고 구운몽이 떠올랐다. 눈물을 흘리긴 하지만, 감수성이 있다고 현실감각이 없는 게 아니기에, 감수성과 현실감각이 모두 높은 나는 끝까지 영화의 엔딩에 불만을 품었다. 박서준에게 불만을 품은 게 아니다! 결말에 불만을... 영화를 보고 나오는 내내, 집에 가는 내내 왜 수아는 조상님이 신호를 보낼 때 이 신호를 잘못 해석한 걸까라는 안타까움이 컸다.
구운몽을 보면 스승님은 꿈을 통해 구운몽의 미래를 보여준다. 그리고 구운몽이 바라는 선택을 한 후에, 일어나는 현실을 보여주며, 그의 선택이 덧없음을 깨닫게 한다. 구운몽은 꿈에서 깨어난 후, 현실의 덧없음을 느끼고, 수행에 정진한다. 수아 역시 조상님이 이 사람을 선택해봤자 이런 결말이 난단다하고 꿈을 통해 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꿈에서 본 그 미래를 선택한다. 수아는 왜 교육과정에서 구운몽을 가르쳐주는지에 대해 1번 쯤은 생각해봤어야 한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배우고, 잘못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구운몽 역시 이를 알려주는 의미있는 소설인데, 수아는 구운몽을 읽지 않았단 말인가? 수업시간에 졸았단 말인가?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선택인가? 이미 꿈을 통해 어떤 미래가 올지 봤는데 이와 똑같은 미래를 선택하다니!! 사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타이밍 이즈 에브리띵이 생각나는 영화였다. 그와 수아가 좀 더 일찍 서로의 감정을 알았더라면, 서로 조금만 더 용기를 냈다면, 그들은 자꾸 엇갈렸다. 그들이 엇갈리지 않았다면, 타이밍이 어긋나지 않았다면 수아는 사실 교통사고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미래는 정해져있다는 세계관이기에, 사고는 반드시 일어날 일이긴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자신의 죽음이 정해진 미래를 선택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순간의 감정 때문에 자신의 죽음이 정해진 미래를 선택한단 말인가? 물론 순간의 감정이 아닐 수도 있고, 그 미래를 선택했다고 100% 죽는다는 걸 믿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나의 생각에 클로이는 7년이지만, 온전히 행복이 보장된 미래이지 않느냐며, 그럼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일 아니냐고 말했다. 그 대답에, 나는 과연 수아가 행복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아프고, 집에서 병원도 멀고...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더 파고들면, 수아가 미래에서 본 그녀가 없는 집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아들은 초등학생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남편은 혼자서는 옷도 제대로 입을 줄 모르고, 요리도 잘 못하고, 청소도 잘 못하고... 그럼 이 모든 걸 아픈 수아가 했었단 말이지 않은가? 행복하면 다 괜찮다는 정신 승리인 것인가? 솔직히, 심포리로 달려가지 않았다면,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일단 살고봐야할 거 아닌가? 이래서 건강이 최고라는 건가... 7년간 행복하면 뭐하는가 지금 그녀는 세상에 없는데...
이와 유사한 내용의 영화가 또 하나 있다.
영화 컨택트는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워프-사피어 가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 영화 역시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로, sf계에서 천재 작가로 명성이 자자한 테드 창의 원작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 story of your life>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sf영화다. (이제부터는 컨택트 스포가 있어요....)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컨택트 이 두 영화 속 여주인공들은 모두 미래를 보고, 그 미래에서 자신의 자식들을 본다. 자식을 남겨 두고 떠나거나, 자식이 먼저 떠나가거나 하는 점은 다르지만, 그들이 감당해야할 슬픔이 기다리고 있는 미래를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느냐는 점이 두 영화의 키포인트다.
언어학자인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는 펩타포드에게 언어를 가르쳐주고, 그들의 언어를 배운다.
여기서 궁금한 건 루이스는 펩타포드어를 열심히 배우려고 하며, 그들의 언어로 소통하려 하지만,
펩타포드는 계속 펩타포드어로 말하며, 지구어를 배울 생각을 1도 하지 않는다.
루이스가 열심히 펩타포드어를 조작하면, 한 마디 정도는 지구어를 따라써봐도 될텐데...
물론 펩타포드인들 중 언어학자가 없어서, 그들이 루이스만큼 언어를 빠르게 캐치하고 배우지 못해서 계속 펩타포드어만 쓴 걸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계속해서 루이스에게 무기를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무기=도구=언어=미래를 보는 힘이다. 이 무기라는 단어를 오해해 인류는 엄청난 위기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참 말은 왜곡되기 쉽고, 오해를 만들 수 있어 늘 문제를 일으킨다.
펩타포드는 3000년 후 지구인들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 지금 지구인을 돕기 위해서 왔다고 하는데, 지구인들에게 무엇을 도와주고 간 건지 모르겠다. 긴장된 세계 정세를 화합의 장으로 만들어 주고 간 것이 도와준 것일까. 애초에 안 왔으면, 그닥 세계 각국이 첨예하게 대립할 일이 없었을지도...뭐 그들이 안 왔다고 지구가 평화로운가?하면 그건 또 아니긴 하지만...
루이스는 이 언어를 배우면서 자꾸 이상한 환영을 본다. 한 아이가 자꾸 꿈에 나타나듯, 눈을 뜨고 있어도 그 아이를 보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안은 외국어 공부에 열심히 몰두하다보면, 생각하는 방식이 그 외국어를 따라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말을 한다. 이는 사용하는 언어가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사물을 보는 시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인데, 루이스는 펩타포트어를 배우면서 펩타포트인 처럼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게 된 것이다. 나중에 루이스가 펩타포드와 대화를 나누며, 그녀 자신이 보는 것이 꿈이 아니고 미래라는 걸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펩타포트어는 선형성을 지닌 언어로 시작과 끝이 이어져있다. 즉, 시작점과 끝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순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 역시 과거, 현재, 미래가 일직선 상에서 딱딱 순서대로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원형으로 이루어져 현재 이 순간에도 미래가 존재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자신이 보는 것이 환상이 아니라 미래라는 걸 알게 되면서 사건을 풀어나가는 힘(무기)을 가지게 된다. 펩타포트는 말했다. "weapon opens time."
사실 영화 초반에 나온 그녀의 대사는 스포를 엄청 꾹꾹 압축해서 알려준 것이다.
우리는 너무 시간에 얽매여 있어. 특히 그 순서에...
그녀는 그녀가 지금으로썬 알지 못하는 펩타포트어를 미래의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 해석해낸다.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위기의 순간에 그녀는 미래를 떠올려, 자신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장군을 떠올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알게 된다. 그리고 왜 자신의 남편이 자신을 떠났는지도 알게된다. 남편이 떠난 이유를 알게 되자, 그 다음의 미래에서는 남편이 떠나지 않고 그녀와 그녀의 딸 곁에 함께 있게 된다. 루이스의 의식이 미래와 현재를 오가며, 현재를 바로잡아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처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녀의 딸 한나이다. 그녀는 한나의 죽음까지 이미 다 보았던 것이다. 한나는 12살에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려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그녀가 막을 수 없는 미래였다. 그리고 그녀가 한나가 병에 걸리는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미래를 받아들인다.
"모든 여정을 알면서, 그 끝을 알면서, 난 모든 걸 받아들여.
그 모든 순간을 기쁘게 맞이하지.
이안, 당신의 전 생애를 다 볼 수 있다면, 삶을 바꾸겠어요?"
라고 그녀는 이안에게, 아니 우리에게 묻는다.
전 생애를 다 본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가리지 않고, 전부 수용할 수 있을까?
두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은 정말 다사다난하다.
나는 내 인생에서, 내 미래를 알게 된다면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까?
도망치지 않고 그 미래에 뛰어들 용기가 있을까?
없을 것 같다. 확실히.
내가 미래를 알게 될 확률도 매우 희박하지만,
나는 그렇게 용기있는 선택을 할 위인은 못 되는 것 같다.
나는 지금의 현실에서도, 내 선택에 따른 대가를 받아들일 때도 힘들어 종종 남탓을 하곤 한다.
제일 많이 하는 건 날씨 탓인데, 날이 좋아서, 날이 흐려서.. 도깨비 대사가 아니다.
날이 흐려서 피곤하네, 날이 좋아서 졸리네 이러면서 안 되면 날씨탓을 하기도 한다.
원래 주변탓, 환경탓 등 남탓을 하면 운을 깎아 먹는다길래 그럼 날씨탓을 하면 되겠지.. 하고 막연하게
만만한 날씨탓을 하고 있는데, 날씨를 주관하는 신이 있다면, 하다못해 대자연도 의식이 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난 늘 어떤 순간에서도 정말 별의별 핑계에 남탓을 대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살고 있다.
핑계대지 않고, 현실을 똑바로 보며, 내 잘못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 늘 어렵다.
우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미안해라는 말을 꺼내기 껄끄러워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걸 참 어려워한다.
그러다보니, 타인보다도 더 어색한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에게 이건 내 잘못이야라고 인정하는 건 쉬울까?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내가 무엇을 했는지, 내가 한 어떤 일이 결과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생각할 기회를 가진다. 내가 잘못한 점이 없을 거라고 우기려고, 혹은 상대방을 이해해보려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피기 위해 생각을 하다보면, 자신이 한 행동을 객관화해서 볼 기회를 얻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제 3자를 통해서라도 나의 행동을 분석한 브리핑을 구구절절하게 듣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의 나 자신과 현재의 나 자신 사이의 일, 그리고 미래의 나 자신 사이에서는 어떨까?
그러니까 내 인생에 대한 전적인 내 선택에 대해서 나는 몇 번이나 자신을 객관화해서 볼 기회를 가졌을까? 잘 없을 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의식적으로 내 선택이 어떠어떠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를 반추하는 걸 피해왔던 걸지도 모른다. 잘못한 부분을 보기 싫어서, 내가 그때 이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지 않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들면, 밑도 끝도 없이 후회할 거 같아서.
과거의 내 잘못도 수용하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내가,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불평불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난 분명 어떻게하면 이 미래를 회피해나갈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도망칠 궁리만 했을 것이다.
나에게 최대한 피해가 덜 오는 방면으로, 내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제일 안전한 쪽으로 미래를 끌고 갈 이기적인 생각만 했을 것이다. 내 미래에, 내 선택에 영향을 받는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은 할 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수아와 루이스는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건 자신이 겪어야 할 몫이고, 자신이 그것을 감당해내야 다른 존재 - 수아의 아들 지호, 루이스의 딸 한나-가 피해를 입지 않기 때문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마크툽"
"그게 무슨 뜻이죠?"
"굳이 번역하자면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지."
"우리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목숨이나 농사일처럼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것들을 잃는 일이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가 다같이 신의 커다란 손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단숨에 사라지는 거라오."
마크툽을 이야기하며, 그들은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된다 같은 맥락이다.
그럼,
미래가 전부 정해져있다면 우리에게 왜 자유의지가 있는 거죠?
미래가 이미 정해져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뭐죠? 라는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가 이미 정해져있는지, 정해져있지 않은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미래를 읽으려 책을 읽고, 과거를 살피고, 점을 보기도 하고, 미래를 위해 묵묵히 노력하기도 한다.
미래가 정해져있든, 정해져있지 않든, 확실한 건 어떤 미래가 오더라도 우리가 이를 부정하고 거부한다면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가 오기전에 노력해서 이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용한다는 게 무조건 정해진 미래를 받아들이자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이미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일어나기 전에는 얼마든지 노력해서 바꿀 수 있고, 잘못된 건 바꿔야만 한다. 하지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피하면 그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이를 받아들이고 그 다음을 생각해야한다.
수아는 자신의 7년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심포리로 달려간다. 그녀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거라면, 그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로 한 것이다. 루이스 역시, 한나가 12살 때까지만 함께 할 수 있지만, 그녀와의 하루 하루에 최선을 다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받아들여야하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인정하고 이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책임져야할 무언가를 회피한다. 내가 회피하면 그 댓가는 대체로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하지만 꽤 높은 확률로 남에게도 그 피해가 간다. 수아와 루이스가 그 미래를 거부했다면 지호와 한나는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들의 용감한 선택이, 그녀들을 삶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수동적으로 미래를 받아들인 게 아니다, 주체적으로 그 미래를 선택한 것이다. 선택의 대가가 어떠하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용기있게 선택하고, 삶의 주체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삶에 있어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과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주연이고 후자는 조연이다. 주연은 늘 자신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조연은 늘 타인의 선택에 좌우되는 인생을 산다. 인생에서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느냐 안 하느냐가 주인공과 조연을 가르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주인공의 삶을 살고 있을까? 조연의 삶을 살고 있을까?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라인홀트 니버가 쓴 기도문인데, 나는 종교는 없지만 종교를 떠나 이 문장은 읽을 때마다 늘 새롭게 와 닿는다.
제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제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이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주소서.
아주 좋은 문장이지 않은가?
나는 무언가 선택하기에 앞서 이 문장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면 우리도,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덤덤하게 수용할 줄 아는 수용성을 장착해야할 지도 모른다. 그래야 그 모든 불안감을 끌어안고서도 도망가지 않고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용기를 낼 수 있을테니까.
원래 용기는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 애초에 두렵지 않다면 용기가 왜 필요하겠는가?-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