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지하철도 못 타고 이대로 집에 갇혀 살 순 없잖아
공황장애 극복을 위해 병원을 다니며 약을 처방받고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는 것만으로도 이전보다 증상은 훨씬 좋아졌다. 그러나 언제까지 약에 의존하며 평생 상담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
퇴사 후 백수시절, 주로 평일 오전 중에는 병원 진료와 운동 말곤 딱히 별 스케줄이 없었다. 뭘 할지 고민하다가 직장 출퇴근 시절 맞닥뜨렸던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들을 실천해보고 싶었다. 내가 주기적으로 겪는 고통은 무엇인지 대체 어떤 극한 상황을 내가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고 싶었다.
제일 첫 번째로는 가장 거대한 적인 지하철이다. 지하철 입구에만 서면 일단 난 쪼그라든다. 마치 지하철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떤 기운이 날 막 밀어내는 듯했다. 그래도 일단 지하철로 어기적 어기적 걸어 들어갔고 지하철 플랫폼에 섰다. 시간도 일부러 출근 시간인 8시로 선택했고 종점에서 몇 정거장 떨어지지 않은 집 근처 역인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여유 공간이 없었다. 목표 역은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인 광화문역이었고, 나도 모르게 지하철을 타자마자 여유없이 총 몇 정거장이고 지하철에서 몇 분을 버텨내야 하는지 스르륵 계산부터 해버렸다.
남들에겐 별로 티 내고 싶진 않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특히 지하철을 탈 때 항상 준비물이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물‘, 그리고 물수건, 비닐봉지와 휴지, 열량이 높은 작은 간식이다. 물은 이상하게 지하철을 타면 답답해지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시원한 기분을 낼 수 있는 물 한 모금이 정말 소중하다. 그러나 이 물도 실컷 마시면 큰일이다. 지하철에서는 언제 공황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 상태라 화장실이 금방 가고 싶고 목적지가 아닌 역에서 내려버리면 화장실을 찾느라 공황증상 상태인 몸이 더 고단하다. 심각하게 계획적인 나로서은 물 몇 모금도 계산해서 먹어야 심리적으로 불안하지 않았다.
물수건은 지하철을 타면 숨쉬기가 힘들기 때문에 코와 입 쪽을 시원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조금이라도 불안감이 올라오면 숨쉬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물수건에라도 기대야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다.
비닐봉지는 가끔 속이 불편해서 구토를 할 뻔한 적이 있어서 준비해서 다닌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하철 안에서 구토를 한 적은 없다. 공황장애도 삶의 질을 떨어트리는 가장 큰 이유가 막상 일어나지도 않는 공황증상을 미리 걱정하는 심리이다. 마찬가지로 구토를 하진 않지만 진짜 막 할 것 같은 그 더러운 느낌 때문에 항상 불안감을 안고 다닌다.
마지막 준비물은 열량 높은 작은 간식. 수면을 충분히 하지 않았거나 피로한 상태로 지하철을 타게 되면 몸에 힘이 훅하고 빠진 느낌이 들기 때문에 혹시나 지하철에서 쓰러져 버리면 어쩌지 하는 정도가 되어버린다. 이것도 사실 효과가 있어서 가지고 다닌다기보다는 심리적인 불안감을 어딘가에 기대고 싶고 단 음식을 먹으면 순간 에너지가 올라오는 기분에 항상 챙겨서 다니고 있다. 덕분에 공황장애 증상이 찾아온 뒤로 7kg이 증가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퇴사 후에 지하철을 탈 때에는 공황증상이 그다지 심하게 올라오지 않았다. 아예 막 편한 상태까진 아니지만 심각한 불안증도 찾아오지 않았다. 일부러 역과 역 사이가 굉장히 긴 공항철도에 올라타서 김포공항까지 간 적도 있었다. 예전에 제주도에 갈 때에 첫 공황증상을 마주한 게 이 공항철도 안에서였지만 이상하게 몸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정상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공황장애의 근본적인 문제는 지하철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고 회사가 진짜 문제였던가? 아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뾰족한 정답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아직 닥치지도 않은 상황에 대한 지나친 걱정과 끝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섣불리 부정적 결론 내리기. 마지막으로 비현실적인 욕심에서 오는 현타이다.
지하철에 이어 또 다른 교통수단 중에 비행기 역시 나의 적이었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때면 연차를 쓰고 도망가듯 몸을 실었던 제주도행 비행기였는데 언제부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에서도 공황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지하철 타기 연습에 이어 부르주아는 아니지만 비행기 공포증을 이겨내기 위해 충동적으로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단순 지하철 타기 연습에서 몇 단계 더 어려운 비행기 타기 연습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냥 지하철을 타고 공항철도로 환승, 마지막으로 비행기에 올라타는 것이다. 나 홀로.
과거 남자친구, 현 남편은 뭐 그렇게 까지 하냐며 웃어넘겼지만 나에게는 꽤나 비싼 수업료만큼 꼭 잘 해내고 싶은 것이었다. 여기서도 웃음이 나왔던 게 공황장애를 꼭 이겨내고 말 것이라고…이 순간에도 그냥 내려놓지 못하는, 뭔가 애써서 바꿔보려는 애씀이 웃겨 보였다.
생각보다 괜찮은 컨디션으로 비행기 탑승 직전 단계까지 왔다. 탑승 수속이 시작되면서 살짝 긴장감과 함께 심장에서 반응이 왔다. 탑승 후 이륙 할 때 긴장의 최고조에 다달았지만 몇 분이 흐른 뒤 곧 안정을 되찾았다. 이상하게 평온하기까지 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눈앞의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이 들어오는 데에도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뭘까? 대체 내 공황장애의 원인은? 이 생각만 머릿속에 계속 맴돌기만 했다. 제주도 여행을 어영부영 마치고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 하며 통찰을 하게 된 순간이 있었다.
공황장애를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도 난 애를 쓰고 있었다. 사람이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적인데 감정의 에너지가 제한적인데도 매 순간 중요하지 않는 것까지 애쓰며 ‘잘‘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이다. 남에게 민폐 끼치지 않는 선에서는 좀 늘어져도 괜찮고 대충 넘겨도 될 것이다. 반드시 모든 것에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꼭 해결책을 따박따박 찾아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몸의 긴장을 풀고 때론 감정을 주말 소파에 몸을 늘어트리듯이 푹 늘어트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공황장애 치료를 하면서 좋아지게 된 말이 있는데 ‘애쓰지 말고 편안하게‘이다. 내 성격엔 편안하게 하는 것도 왠지 노력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까지 지하철 탈 때나 비행기 탈 때 긴장하며 저 많은 준비물들을 끌어안고 다닐 것인가? 한 때는 이런 내 모습을 스스로 바라보면 부끄러웠다. 내 치부를 드러내는 느낌이랄까? 불안에 벌벌 떨며 물을 시원하게 마시지도 못하고 몇 모금 벌컥 삼키며 지하철역 한 정거장 한 정거장을 세어보면서 내 키보다 훨씬 높은 허들을 힘겹게 하나씩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구석도 내 모습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 순간 편안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위를 둘러봤을 때 의외로 완벽주의자나 일잘러들도 공황장애나 우울증을 심하게 겪고 있는 지인들도 있었다. 남의 불행을 위안 삼는 다기 보다 사람 사는 데 다 비슷하구나 특별한 거 없구나 싶으면 마음에서 뭔가 꽁꽁 싸매고 있던 게 확 나아져 버렸다.
공황장애를 치료하면서 부족한 걸 억지로 메꾸려 하지 말고 아픈데 애쓰지 말고 조금은 부족한 게 당연하다 인정하면서 억지스럽게 잘하려고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대로 좀 흘려보낼 줄도 알고 그런가 보다 하는 마인드로 대충 살아가는 날도 있어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놈의 인생살이가 좀 편안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