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고 있다는 증거들

20.05.29(금)

by 어깨아빠

[아우 정말 피곤하다. 6시 반부터 푹 자지를 못했네. 어떻게 해야 소윤이가 날 좀 자게 둘까]


소윤이는 내가 출근준비 할 때부터 깨어 있었다. 거실에 나와 나에게 인사도 하고 들어갔다. 조금 더 누워 있으라며 들여보내긴 했지만 눈이 아주 초롱초롱했다. 안 그래도 서윤이 때문에 깊이 자지 못하는 아내에게 소윤이와 시윤이까지 가세하면 그 날은 너무 힘든 출발이 되는 거다.


[피곤한 여보. 월급이 들어왔네요. 힘내세요]

[그렇군요. 여보도 한달 동안 수고 많았어요]


월급은 가계의 숨통을 트여주는 역할도 있지만 시간의 흐름을 일깨우는 효과도 있다. 월급이 들어온 걸 인지하는 순간


'와. 또 한 달 잘 살았네'


이런 생각이 든다. 힘들고 벅차도 지나가는 걸 확인하면 뭔가 위안이 된다. 미생에 나오는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취한다', 요즘 어린 친구들이 쓰는 '존버'도 다 같은 줄기다. 이런 거(20년차 부장님이 신입한테 해 줄 듯한 말들) 되게 싫어하는 편인데 애가 셋이 되고 원하지 않는 실직도 경험해 보고 하니 좀 바뀐 거 같다.


오늘은 장모님이 오셨다. 아내가 사진을 보냈다. 장모님이 애들이랑 거실에 종이를 잔뜩 펴 놓고 물감으로 뭔가를 하고 계셨다. 아내 혼자였으면 엄두도 못 내고 시도도 못 했을 시간이다. 물감이라는 말만 들어도 본능적으로


"어후. 물감?"


이라는 반응이 나오기 마련이다. 할머니가 오시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유일한 부작용이 하나 있었다.


"아빠. 아까 할머니랑 물감으로 뭐 했거든여. 그게 뭐냐면 종이를 일단 반으로 접어여. 그런 다음에 한쪽에만 물감을 이렇게 떨어뜨리는 거에여. 그리고 그걸 반으로 접어서 꾹꾹 누르면 양쪽에 똑같은 모양이 되는 거다여. 재밌겠져? 아빠도 우리랑 꼭 같이 하자여. 알았져?"


그리하여 주말 필수 활동 내역에 데칼코마니가 추가됐다.


장인어른도 퇴근하고 집으로 오신다고 했다. 함께 저녁을 먹는다고 했는데 난 교회에 가야 해서 같이 먹을 시간은 없었다. 아내는 교회 가는 길에 햄버거를 사 먹으라고 했다.


"강서방은?"

"아, 교회 가는 길에 햄버거 사 먹는대요"

"아유.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먹을 게 없어서 억지로 때우는 느낌으로 이해하셨나 보다. 햄버거는 나에게 서양쪽 소울 푸드인데.


교회 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이번에는 형님(아내 오빠)네 부부가 와 있었다. 짧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내랑 내가 다툰지 꽤 오래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작년 11월에 양양 여행에서의 '컵라면 대전(상세 내용이 궁금하면 '컵라면 대전' 검색)' 이후로 제대로 싸운 적이 없었다. 아내와 나의 분석은 비슷했다.


"서로 너무 힘들고 지친다는 걸 아니 조심하는 거"


였다. 이것도 시윤이 때는 조금 반대였던 거 같다. 시윤이가 지금 서윤이 정도였을 때 결혼 생활을 통틀어 가장 많이 다퉜으니까. 경험이자면 경험이고 연륜이라면 연륜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내와 나는 서로 아주 조심하고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오만가지가 마음에 다 안 드는데 꾹꾹 눌러 참고 있다는 건 아니다. 말 조심, 행동 조심, 표현 조심, 감정 조심 등등. 이게 참 쉬운 거 같은데 쉽지 않다. 새삼 아내가, 스스로가 기특했다. 그 어려운 걸 아내도 나도 여태껏 잘 해 오고 있었구나.


서윤이는 오늘도 이른 취침이었다. 그것도 어제랑 똑같이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눕혔는데 쭉. 서윤아, 아빠 말 들었지.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취한단다. 아기 침대에서 혼자 어둠을 삼키며 자는 게 좀 힘들어도 거기에 지치지 않아야 얻는 거야. 뭘 얻냐고?


조금 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어미, 아비의 눈빛과 음성.


엄청나지?


잘 자렴. 오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