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결혼식

18.09.01(토)

by 어깨아빠

승아자매가 놀러 와서 수다 떨었을 때 아내는 아쉬운 거 하나를 간접적으로 토로했다. 요즘은 아침에 늘 자기가 일어나서 애들이랑 씨름하는 거, 이게 불만까지는 아니지만 다소 섭섭한 점이라고. 나도 느끼는 바였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어젯밤에 약속했다.


"내일 아침에는 내가 일어날게"


철판 깔고 아이들의 사부작 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할까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무척 졸린 상태로 애들을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나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압력밥솥에 불 올리기.(아내가 어제 자기 전 쌀을 씻어서 넣어놓는 것까지는 했다.) 시윤이가 허기를 느끼는 순간 폭군으로 돌변하기 때문에 언제든 밥을 대령하기 위해서였다. 시윤이가 눈치 못 채게, 밥이라는 단어나 개념이 머릿속에 연상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렸다.


뭘 하고 놀았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좀 누워 있겠다는데 소윤이는 "아빠 눕지 마, 일어나" 라며 방해하고, 시윤이는 눕기만 하면 내 몸을 올라탔다. 놀았다기보다는 버텨내며 아이들과의 시간을 보냈다. 놀아주는 게 아니라 노는 거라는 마음을 먹고 아이들과 온 마음을 다해 놀아야 한다는데. 아, 병원 놀이하면 진짜 열과 성을 다해 임할 수 있을 텐데.


"소윤아, 아빠 4시간짜리 대수술 좀 해줄래?"


소윤이가 먼저 배고프댔나 아니면 시윤이가 찡찡거리기 시작했나. 아무튼 둘 중 누군가가 배고픔을 표시했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미리 해놓은 밥, 장모님이 해주신 반찬이 있어서 금방 준비를 마쳤다. 아내는 그쯤 일어났다.


"여보, 내가 애들 밥 먹일게"


그래, 그거야, 고마워. 아내가 애들 밥 먹이는 동안 소파에 앉아서 쉬었다.


지난주 토요일에 이어 오늘도 날씨가 좋았다. 오늘은 임진각에 가기로 했다. 일단 소윤이 시윤이는 점심 무렵쯤에 동시에 재웠다. 아내도 나도 굉장히 피로가 누적된 상태라 애들 재울 때 같이 잘까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잠들더라도 거실에 나와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다가, 아무것도 안 하고 축축 늘어져 있다 잠들고 싶었다. 애들 없는 여유 속에서 한량질이 하고 싶었다. 둘 다 1시간 30분쯤 자고 일어났는데 푹 잤는지 둘 다 기분이 좋았다. 점심 먹이고, 옷 입히고 우리도 준비하고 하니 3시를 훌쩍 넘겨서야 출발했다. 장모님 장인어른도 함께 가기로 했다. 먼저 도착하셔서 좋은 자리에 텐트를 다 펴놓으시고 각종 간식거리들도 풍성히 챙겨 오셨다. 임진각은 소윤이 데리고 몇 번 다녀왔을 때도 느꼈지만, 시윤이만 한 애들 데리고 가기에는 은근히 피곤한 곳이다. 한강공원처럼 넓고 큰 평지가 없고 다 언덕이라 걸음이 서툰 아이들은 계속 꽁무니를 쫓아다녀야 한다. 소윤이는 그럴 나이가 지났지만 소윤이 성향 자체가 막 걷거나 뛰어다니는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나마 오늘은 바닥분수가 나오고 있어서 소윤이는 거기서 좀 놀았다. 집에서 나올 때 여벌 옷을 챙겼기 때문에 젖어도 좋으니 마음껏 놀라고 했다. 세차게 나오는 분수 위로 자기 똥꾸멍을 들이밀고 좋아하는 수많은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소윤이는 도도하게 자기 리듬을 유지하며 놀았다. 먹는 것에만 깨작거리는 게 있는 게 아니다. 소윤이는 노는 것도 깨작깨작이다. 깨작거려도 나름 즐겁게 논다.


한참을 놀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갔다. 텐트 안에 있던 시윤이가 소윤이와 나를 보더니 자기도 내보내 달라며 몸부림쳤다. 그래, 이번엔 너. 소윤이는 텐트로 입성시키고 시윤이를 꺼냈다. 지 능력치는 알지도 못하면서 보이는 곳마다 가겠다고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역시 강시윤이 훨씬 힘들다, 육체적으로는. 말로는 통제가 안된다. 소윤이가 어딘가 위험하거나 가지 말아야 할 곳을 향해 움직이면


"소윤아 위험해, 그만"


이라고 얘기하면 딱 멈추는데 시윤이는 그럴 수가 없다. 무조건 몸이 움직여야 한다. 시윤이도 쉴 틈 없이 움직이니까 양육자도 쉴 틈 없이 쫓아다녀야 한다. 아내가 살 게 있어서 잠시 매점에 갈 때 나랑 시윤이도 함께 갔다. 시윤이를 한 팔로 안을 수 있는 한계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내려가겠다고 막 몸을 쓰기 시작하면 더더욱 급격히 줄어든다.


다시 베이스캠프 쪽으로 가니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자리를 정리하고 계셨다. 소윤이가 임진각 한편에 있는 자그마한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길래 다시 시윤이는 넘기고 소윤이를 데리고 가봤다. 만원을 들고 갔는데 대부분의 놀이기구가 어른은 4,500원 아이는 3,000원이었다. 중간에 무섭다고 울지도 몰라서 미리 충분히 얘기를 해줬다.


"소윤아, 여기 있는 놀이기구는 일단 타면 중간에 무섭다고 막 울어도 내려줄 수가 없어, 다 끝나서 멈출 때까지 타야 돼, 알았지?"


소윤이는 당연히 나랑 함께 타자고 했다. 소윤이가 고른 두 개의 놀이기구는 회전목마와 관람차보다는 조금 빠르지만 무서움을 느낄 정도는 아닌 속도로 느리게 원을 그리며 도는 버스 모양 기구였다.


"소윤아, 그런데 두 개를 다 타고 싶으면 소윤이 혼자 타야 되는데, 괜찮겠어?"

"싫어, 아빠랑"

"아빠가 같이 타면 돈이 만원밖에 없어서 하나밖에 못 타"

"그럼 하나는 혼자 타고 하나는 같이 타자여"

"그것도 안돼, 둘 다 혼자 타거나 아니면 하나만 아빠랑 같이 타거나 그래야 되는데"

"왜여?"

"돈이 만 원밖에 없으니까"


소윤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소윤이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한 남자분이 웅얼거리며 방송을 했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느낌적인 느낌, 경험적인 경험, 센스적인 센스로 무슨 내용인지 짐작했다.


"헐, 소윤아, 여기 끝나나 봐, 얼른 이거(버스놀이기구)라도 타자"


와다다다


"이거 끝났나요?"

"네, 끝났어요"


"소윤아, 회전목마라도 타자"


와다다다다다다다다


"이것도 끝났나요?"

"네, 이게 마지막이에요"


이럴 수가.


"소윤아, 어떻게 해, 여기 이제 다 끝났대"

"다른 놀이기구도?"

"응, 이제 여기 문 닫는대, 어떻게 하지"


들뜬 마음에 커다란 실망이 찾아와 크게 울거나 떼쓸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아빠, 얼른 나가자, 얼른 나가자"


아마 문 닫는다는 나의 말을 문이 닫히면 여기에 갇혀서 못 나갈 수도 있다는 말로 해석했나 보다. 덕분에 놀이기구를 타지 못한 슬픔은 잊혔다.


"소윤아, 놀이기구 못 타서 좀 섭섭하지?"

"응"

"대신 아빠가 아이스크림 하나 사줄까?"

"아빠, 아이스크림은 아까 공원 오면 원래 사주기로 한 건데?"


자식이 말이야, 빈틈이 없어 빈틈이.


빠삐코 하나를 사주고 장인어른 장모님이 가보셨다는 근처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아까 시윤이랑 매점에 갔을 때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여보, 오늘 우리 애들 맡기고 영화 보러 갔다 올까?"

"오늘? 자고 가게?"

"아니, 보고 와서 데리고 집에 가면 되지"


식당에 가서 아내가 장모님과 장인어른에게 얘기했다.


"엄마 아빠, 우리 오늘 애들 맡기고 영화 좀 보고 와도 되죠?"


참으로 폐쇄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멈칫하셨다. 아내 말에 의하면 표정에도 피곤함이 뚝뚝 묻어나고 계셨다. 예전에 소윤이 혼자일 때, 아니면 시윤이가 어렸을 때 정도만 해도


"그럼, 얼른 갔다 와"


바로바로 대답을 하셨는데 이제 두 녀석과 함께하는 시간이 결코 녹록지 않은 거다. 멈칫하셨지만 거부하신 적은 거의 없다. 오늘도 마찬가지. 소윤이 시윤이는 군것질을 하도 많이 해서 밥 먹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식당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다행히 다른 손님들이 없었고 주인아주머니 아저씨가 애들을 예뻐하셔서 어느 정도 방목하며 먹을 수 있었다. 다 먹고 나서 애들을 장모님 장인어른께 맡기고 영화관으로 출발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세 개였다.


신과 함께 2

공작

너의 결혼식


감사하게도 시간이 맞는 영화가 너의 결혼식 뿐이었다.


"박보영 보니까 좋아?"

"내가 이가영이랑 사는데 박보영이 눈에 차겠어?"


넘치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마음에 담아뒀다)


영화는 10점 만점에 10점, 별 다섯 개 중에 별 다섯 개, 양손 양발 엄지 척.


줄거리는 약간 식상했지만 박보영이 있었고, 억지스러운 장치가 많았지만 박보영이 있었고, 꽁냥 거리는 게 부족했지만 박보영이 있었고, 감동이나 메시지가 없었지만 박보영이 있어서 아주 좋은 걸작이었다. 극장에서 나오며 휴대폰을 봤더니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을 하고 있었다. 한일전 축구 대신 아내랑 영화를 보다니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는데. 아저씨가 다 된 건가, 아닌가 아저씨가 되면 오히려 반대인가.


소윤이는 잘 놀고 있을 것 같았고 시윤이는 잠들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둘 다 깨 있었다. 10시 30분이 넘었는데 둘 다 아주 쌩쌩했다. 무서운 녀석들. 소윤이는 집에 가자고 하니 파주 할머니네서 자고 싶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여기서 자도 어차피 지금 바로 자야되고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 해서 별로 의미가 없으니 집에 가자]고 설득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짓이었다. 말이 안 통했다. 시간을 좀 두고 약간의 무시와 틈새 설득으로 겨우겨우 차에 태웠다. 둘 다 가는 길에 잠들었다. 고맙다 얘들아, 잠들어줘서.


날씨가 좋으니 놀러 가기 좋기는 한데 주말마다 노동강도가 장난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