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살! 밴쿠버 영화 학교 한 달 차, 분명 열심히 살았는데..
영상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던 지는 어언.. 20년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 우연히 선생님의 추천으로 들어간 방송부를 계기로 정말 쭉, 단 한 번도 꿈이 바뀌지 않고 '영상업'이 꿈이었다. 그 흔한 선생님 한번 장래희망으로 적어내지 않고, 꾸준히 장래희망 1순위는 PD였다. 언론고시의 실패로 영화 마케팅을 하다, 방송국에 들어와 영상 제작업에 종사한 지는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직업군에서 멀지 않게 주변을 항상 전전했다. 때로는 카메라를 잡고, 대부분은 영상을 기획하고 편집하며 오랜 시간 동안 그 근처에 머물렀다고 생각했다.
(밴쿠버엔 벚꽃이 잔뜩 폈다.. �)
그런데 밴쿠버에 온 지 한 달 차, 영화 학교에 와 나의 업능을 보니 나의 시간은 대부분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데에 치중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을 잘하는 사람과 전문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어떤 것을 진행시킨다.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꼼꼼하게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행정적인 업무,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해내야만 하는 때에 해낸다.
전문가는 어떤 수준의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대충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 없이 디테일들 역시 손안에 쥐고 조절한다. 자신만의 기준이 있어, 타임라인보다 자신의 기준을 달성하는지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초반의 몇 년 간의 성과에 대해서는 인정받기 쉬우나, '내 것'을 만들어야 하는 중간관리자 이상의 직책을 맡게 되면 한계에 부딪히는 것 같다. 내가 느낀 한계와 비슷했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진짜 마음에 들도록 결과물을 만들었는가?' 생각하면 많이 미진했던 것 같다. 전문가가 되어야지만, 명확히 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과 멈춰서 고민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
멈춰서 고민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영역에 대한 나만의 지식이 필요하다. 무에서 유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흘러가는 디테일들을 붙잡고 나의 기준에 충족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알아야 한다. PD 업무의 특성상, 정말 단 하나도 내 손으로 하는 것은 없다. 글은 작가님들이 써주시고, 촬영은 촬영 감독님들이 해주시고, 세트는 세트 감독님들이 멋들어지게 제작해 주신다. 그래서 나태해졌던 것 같다. 나보다 더 전문가인 사람들이 있는데, 굳이 내가 알아야 할까?라는 생각 속에서 뒤처지다 보니 수많은 디테일들을 골고루 보지 못하는 시점에 머무르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하지 않았어도 바빴다. 하지만, 더 바쁘고 치열하게 지냈어야 했음을 깨닫는다. 내가 원하는 한 컷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어야 함을 깨닫는다.
얼마 전 영화 학교 친구와 <Nocturnal Animals>라는 영화를 봤다. 마지막 결말부에 대한 해석이 모호했지만, 서사, 샷의 구성, 모든 점에서 배울 점이 있었다. 영화 안에서 디테일들을 찾는 법을 점차 배워가는 것 같다. 흥미로운 서사는 기본이다, 그리고 이 서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한 샷, 한 샷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심미적인 샷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 이야기의 재미를 배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 고민의 일부로 현실과 환상 사이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색감의 차이도 흥미로웠다. 이 정도로 고민해야, 이 정도로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밴쿠버 필름 스쿨의 커리큘럼은 아래와 같이 나뉜다.
Directing(A.D.) 연출
Production Design 미술
Producing 제작 + Script Development 스크립트 작성
Cinematography 촬영
Post Production 후반
수업 별로 부족함을 느끼는 순간을 글로 써보자면 아래와 같다.
후반 작업 수업 시간에 프리미어를 배운다. 프리미어를 가지고 수천 시간을 편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쉬운 단축키를 모를 때가 있다. 또 후반 작업의 순서를 수도 없이 반복해 왔지만 정작 그 간단한 conform(프록시를 원본과 연결하는 작업)의 용어를 헷갈릴 때가 있다. 아사모사하게 일을 진행시키는 데에 혈안 되어서 끝의 끝까지 일의 본질을 파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 수업에선 대부분 모르는 용어 천지다. 이제까지 나와 함께 일해주셨던 촬영 감독님들께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감당해 주셨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나에게 얼마나 많은 아량을 베풀어주셨는지도 말이다. 이 용어들과 메커니즘을 더 정확히 알았더라면 ‘어딘가 이상한데' 싶은 순간에도 명쾌한 소통이 가능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떻게 조명을 쳐야 하는지, 내가 원하는 분위기를 내기 위해선 몇 스탑(조명 밝기 단위)을 올리고, 몇 스탑을 내려야 하는지, 정확히 이야기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
미술 수업에선 나의 소통의 도구가 잘못됐었단 점을 깨달았다. 이미지로 떠올리고, 이미지로 전달했다면 더 나은 결과물이 나왔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도면을 직접 그리고, 세트 설계의 기본을 배우면서 30cm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여실히 느낀다. 적어도 세트를 만들 땐, 규격 문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대충 이 정도?'라고 손 대중으로 알려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여전히 내 스킬과 영역을 더 날카롭게 만들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치중되어 부지런히 나태했던 것 같다. 영화, 영상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 늙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꼭 넘지 않아도 되지만 넘는다면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언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정말 많이 보게 된다. 한 달 사이에 보고 싶었던 영화 리스트를 열심히도 지웠다. 세상엔 정말 명작이 많다. 이제까지 보고 싶다고만 생각해 왔던 작품들을 틈내서라도 보게 되는데, '흘러가는 1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틈새라도 영화를 본다.
<녹터널 애니멀스>
<프리다>
<텐져린>
<센티멘탈 벨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대부>
<마이 리틀 선샤인>
<시>
이 시간을 어떻게든 아등바등 잡고 싶어 노력하고 있다. 전에 비해 0.5cm라도 달라지고 싶다. 기가 막힌 차이를 만들어내진 못하겠지만, 매일매일 0.001cm씩 달라지면 어느 날엔 가 0.5cm가 되지 않을까?
벚꽃이 잔뜩 폈다. 그래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뉴칼라 도니아, 멕시코에서 온 친구들과 같이 벚꽃 축제에 가 한참을 앉아있었다. 한밤 중에 모여서 핫도그를 먹고 영화를 보기도 한다. 벌써 4월이라니, 가는 시간이 벌써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