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s? 이렇게까지 배운다고?

30살, 영화 학교 개강 둘째 주에 느낀 점

by 숭구리당당

"이렇게까지 배운다고?" : 낯선 스케줄과의 조우


개강 첫 주가 지났다.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렇게까지 배운다고?”

일단 수업 시간이 압도적이다. 매일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늦게까지, 때로는 주말까지 수업이 이어진다. 2주 연속 해가 뜰 때 등교해 해가 질 때 하교하는 삶. 방학도 없다. VFS의 1년은 6학기로 이뤄져있는데, 그 말인 즉슨 2달씩, 총 6번 방학 없이 이어진다는 듯이다.


어린 시절 카메라를 장난감 삼던 때부터, 초·중·고·대를 거쳐 방송국 PD로 일하는 동안에도 영상을 만드는 법에 대해 이렇게 하루 종일, 온몸으로 부딪히며 배운 적은 없었다.


배우는 것들: Producing, Script Development, Directing, Production Design, Cinematography, AD, Post Production, Cine Theory... (그리고 'Team Building'까지.. 맞다 제작은 거대 팀플이다..)


기초 용어부터 교수님들의 실전 노하우까지 수업이 휘몰아친다. 특히 교수님들이 모두 현업에 계신 분들이라 그분들의 '썰'을 듣다 보면 한 시간이 콸콸 흐른다. 하지만 그 폭풍 같은 시간 속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을 명확히 마주하게 되었다.


본질의 발견 : "Story is an Epiphany"


북미 현장의 디테일한 기술들도 날카로운 무기가 되겠지만, 개론 수업들이 주는 진짜 선물은 '본질'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이미 현업에서 (강제로) 체득했던 지식들이 'Script Development' 수업을 통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Story is something that happened which led to epiphany,

and epiphany is a recognition of better truth.


스토리의 정의를 듣는 순간, 내가 나아가야 할 바가 보였다. 그동안 매 회의마다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고 마음이 마뜩잖았던 이유는 본질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의미 있는’ 이야기를 쓰고 영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정말 한끗 차이더라도 '어제보단 오늘이 좀 더 의미 있어지는 한 줄'을 전달하면 되는 일이었다.

'의미'라는 건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결국 인간은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 영상을 만드는 과정 또한 나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임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어떤 기준을 맞추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의미를 다시 세우는 재미. 이 재미를 원점에서 다시 고민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시간이(학비가..?) 내게 준 가장 큰 축복인 것 같다.


'Greens' 담당자가 따로 있는 곳, 북미 현장의 디테일


한편으론 이곳의 배움이 한국 현장에서 어떻게 쓰일지에 대한 고민은 있다. 한국에서는 조연출 한 명이 도맡아 할 일을 이곳은 극도로 세분화한다. 미술팀에 식물만 담당하는 ‘Plants’라는 직책이 따로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마어마한 자본을 기반으로 수많은 디테일로 완성한 퀄리티. 그렇게 콘텐츠 제작을 전문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 부러웠지만, 내 현실은 이곳이 아니니 적용을 고민한다. 이 시스템 안에서 어떤 것을 가져와야 한국에서의 제작 작업이 수월해질까?

(하지만 또 사람 일은 모르는 법. 언제까지 한국에서만 일하라는 법이 있을까? "꿈은 크게 가지라"는 말을 새긴다)

또 한편으로는 콘텐츠 시장에 국적이 점차 사라지고 있으니, (적은 제작비 속에서도) '전 세계'라는 무대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한국인 엄마 아빠'와의 공통점보다 이 친구들과 더 접점을 만들기 쉬운 경우가 많다. 유튜브가 연결 지어준 MZ, 우리들의 세상 안에서는 전주만 나와도 저스틴 비버의 'baby'를 떼창 할 수 있고, 같은 밈을 보며 웃고 떠들 수 있다. 이 공감대 속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AI의 등장으로 콘텐츠가 점차 대량 생산된다면, 콘텐츠 소비 타깃은 점차 세분화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 하지만 그 세분화는 국적에 있지 않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뷰 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전 세계를 타겟팅하는 전략이 필수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이 역시도 아직 시간이 남으니까 천천히 고민해 보자..^^)


나를 찾아가는 시간 : 취향과 글쓰기


이곳은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여실히 느끼게 해 준다. 쏟아지는 업무 속에서는 찾지 못했던 순수한 재미들—고요 속에서 이야기를 공상하고, 타인의 인생 영화를 컷 바이 컷으로 분석하고, 열정 가득한 동료들과 토론하는 것—이 나를 깨운다. 자기소개만 해도 재밌는데, 어쩌겠는가?


흥미로운 자기소개: "남들은 다 좋아하는데 나는 싫어하는 영화(You don't give a shit)는?"

(소신 발언: 사실 난 아바타에 아무 관심이 없다...)


특히 이번 주는 글쓰기의 즐거움을 재발견한 시간이었다. 한국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생각이 안 나서'라며 외면했던 일들이 사실은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학기 별 최소한의 제약(Term 2는 3분 내외, 출연진 2명) 외에는 내 상상력이 곧 실현되는 이 환경이 즐겁다.


단조로운 일상 속의 특별한 특권

밴쿠버의 삶 자체는 꽤 단조롭다. 지옥철을 타고 등교하고, 집에 오면 도시락을 싸고 운동 후 쓰러져 잠든다. 하지만 이 단조로움 속에 매일 흥미로운 문장이 등장한다.

토론토, 콜롬비아에서 온 친구와 '비포 시리즈'에 열광하고, 고된 한 주 끝에 펍에서 수다를 떨고, 모리셔스 친구에게 식사 초대를 받는 순간들. 이 모든 순간을 언젠가 쓸 '스페어(Spare)'로 저장한다. 다시 한번, 이곳은 내 현실이 아니니까. 이곳을 정말 잘 누려야 한다.


학교로 향하는 길, “나는 어떤 것을 만들고 싶은 사람인가?”를 순수하게 고민할 수 있다는 것. 서른의 나이에 나는 지금 굉장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

(추신: 캐나다 공기 덕분에 비염이 완치되고 피부가 좋아진 건 덤이다. 공기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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