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내 편인 나 만나기
애인과 4주년이 되던 날이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은 후 그는 내게 작은 박스를 건넸다. 예쁜 꽃이 붙어있는 박스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두툼한 편지봉투가 들어있었다. 언젠가는 원고지 50매에 편지를 써온 적도 있는 그이기에 나는 ‘이제 편지를 이렇게 예쁘게 포장해 왔군’ 싶어 웃음 지으며 종이뭉치를 꺼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000 고객님 개인 사치비 카드 이용 약관”.
네 장짜리의 약관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치비 카드’란 나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 사용되는 카드이며 현금화할 수 없다. 매달 1일 일정 금액이 입금되며 마지막 날 남은 금액은 회수된다. 별첨에 추가된 ‘사리사욕’에 대한 추가 설명에 따르면, 카드의 사용은 타인(특히 애인)을 위한 것이나 생활비의 목적이 아니어야 한다. 그 대신 돈이 아까워서 고민이 되는 상황, 예컨대 간식이 먹고 싶은데 돈이 아까워 고민이 들 때, 여러 번 쓰지 않을 물건을 사고 싶을 때, 친구 집에 가려는데 뭔가를 사 들고 가고 싶을 때 등의 상황에 사용 가능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경제관념이 있었다. 용돈기입장 쓰기를 좋아했고 군것질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은 돈을 어디에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름 의미 있게 사용했을 거라 추측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자잘한 데에 돈을 쓰지 않고 모으곤 했고 그렇게 모은 돈은 가끔씩 필요한 친구들에게 통 큰 선물로 흘러갔다. 현재 애인을 만난 후로는 주로 그를 위한 소비를 했다. 그에게는 무엇도 아깝지 않았고 몇 년의 패턴에도 그는 여전히 나의 마음을 당연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정작 나는 나에게 돈을 쓰는 데엔 인색했다. 나는 가장 싸게 끼니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서 매일 같은 메뉴를 먹고 공부를 할 때도 카페보단 도서관을 갔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당근마켓을 제일 먼저 들어가 보고 며칠 동안 검색만 하다가 마음을 접기 일쑤였다. 나의 가계부에는 생활비와 생필품, 그리고 애인을 위한 소비뿐이었다.
사치비 카드를 사용한 지 1년 반이 넘었다. 그동안 가장 많이 사용된 소비처는 햄버거 가게일 테다. 나는 햄버거를 무척 좋아하지만 한 끼에 천 원을 넘지 않게 계산된 나의 끼니에 최소 오천 원의 햄버거는 너무 큰 사치였다. 그런데 사치비 카드 덕분에 가끔씩 햄버거를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주 사용 방법은 계획되지 않은 소비이다. 나는 애인과 데이트를 하다가 그에게 계획에 없던 선물을 자주 사주곤 하는데, 정작 내게는 그러질 못했다. 너무 마음에 드는 옷이나 액세서리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나에게 선물하는 것은 그 옷이나 액세서리의 가치 정도가 아니라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을 상기시킨다.
가장 최근의 소비는 영어 공부 앱 1년권이다. 영어를 좋아하고 가르치기까지 하는 내게 이 앱은 쓸모 있을 뿐 아니라 무척 재미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이 시기에 생필품이 아닌 것을 사는 모든 행위는 무척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하물며 나의 재미나 발전을 위한 것이라니. 가장 최소한의 소비를 하며 나의 삶을 겨우 연명할 땐 내 존재가 최소한이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말을 할 수도, 누군가 내 소리를 들을 수도, 나의 존재를 알아챌 수도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사치비 카드는 빛난다. 아무도 나를 알아채지 못한대도 내가 나의 욕구를 들어주고 채워준다. 나는 사치비 카드를 통해 ‘영원히 내 편인 나’를 만나는 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