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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오공 Apr 05. 2023

왜 내 튜터는 뚱뚱한 백인 남자야

열두 살에 마주한 미국

"Where are you from?" 나는 속으로 그 말을 반복했다. 교실에 아이들이 가득 차고 선생님이 들어오셔 아침 조례를 하는 동안 나는 어떤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치껏 모두가 일어날 때 따라 일어나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걸 하고 눈치껏 애들이 앉을 때 앉으면서, 나는 그날 아침 엄마가 알려준 'where are you from'만 잊지 않으려고 계속 되뇌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에 갔다. 아빠의 회사에서 1년간 아빠를 미국 대학원에 보내준 탓이다. 첫 학기가 시작하는 날, 엄마는 나를 차에서 내려주며 "Where are you from?"을 알려줬다. 동양인들에게 이렇게 물어보라고. 그러면 우리 반에 한 명 있다는 한국인 친구를 찾을 수 있을 거고 그 친구가 여기서 오래 살았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미국에서의 나는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반장과 회장을 번갈아 맡으며 선생님들의 사랑과 반 친구들의 선망을 받던 나는 사라졌다. 공부도 예체능도 주어진 일이 무엇이던 열정적으로 잘해내던 나는 과거에만 존재했다. 물론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 친구 덕분에 맘 착한 동양계 친구들이나 독일계 친구들과 어느 정도 어울릴 수는 있었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할 수도, 내가 가진 고민을 친구들과 나눌 수도 없었다. 내게 말을 거는 사람들은 모두 다정하고 느린 말투로 말을 걸어주었고, 나는 그 다정함이 무색하게도 그 말들을 이해하지 못해 "I'm sorry"나 "I don't understand"라고 답하기 일쑤였다. 그마저도 내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에 한한 것일 뿐, 그 교실에는 내게 말 한 번은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수많은 파란 눈들이 존재했다.

우리 반에는 Santos라는 멕시코계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둥그런 얼굴과 그보다 더 둥그런 배를 갖고 있었다. 그 애는 수업 시간 중에 교실 뒤쪽의 휴지를 가지러 가 아주 큰 소리로 코를 풀곤 했다. 가끔 그 소리가 너무 커 아이들의 웃음보가 터지면 그는 둥그런 배만큼 넉살 좋은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곤 했다. 그 상황에 영어로 된 대화는 필요 없었으므로 나 또한 그를 귀여워하는 마음으로 함께 웃었다.

나는 동물 같은 감각으로 나의 위치를 확인하곤 했다. 한국에서 나의 위치는 선생님 다음이었다. 내 아래로 모든 반 아이들이 위치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나의 위치는 Santos 보다도 아래였다. 내가 아무리 그를 귀여워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가장 밑바닥에 위치했다. 나는 그를 귀여워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의 영어 공부를 위해 튜터를 붙여주었다. 우리의 튜터는 20대 백인 남자였는데 매우 뚱뚱했다. 미국 패스트푸드 다큐멘터리에 나올 법한, 한국에서는 본 적 없는 뚱뚱함이었다. 게다가 그에게서는 항상 낯설고 불쾌한 백인 냄새가 났다. 나는 그를 매우 싫어했다.

수업 시간에 그는 내게 영어로 질문을 했다. 나는 가끔 그 말을 이해했고 가끔 이해하지 못했으나 거의 매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동생은 나를 따라 그 선생님을 싫어했다. 내가 신랄하게 그를 욕할 때면 함께 맞장구 쳐주었다. 그러나 막상 수업에 들어가면 동생은 꺄르르 웃으며 재밌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것조차 열이 받아 동생이 즐겁게 수업한 날이면 이후에 있는 내 수업에서 더욱더 굳건히 입을 다물었다.

하필이면 주변 한국 애들의 튜터는 한국인 언니였다. 나도 나와 같은 여자이고 나와 같은 한국인인 그 선생님과 수업을 하고 싶었다. 엄마에게 선생님을 바꿔달라고 몇 번이나 졸랐지만 엄마는 내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할리우드 영화라면 반항기 가득한 동양인 여자애를 결국 잘 구슬려서 웃으며 수업하는 데에 성공하는 백인의 이야기로 영화가 끝맺음되겠지만, 내 인생은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었다. 나는 끝까지 그 선생님을 싫어했고 그 수업으로 내 영어가 조금이라도 늘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기억 속에서 그 선생님을 지웠다.


그를 엄청나게 싫어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 건 작년 즈음, 나를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고서는 다른 어떤 이유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과외 학생을 만나면서였다. 나를 싫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과 일주일에 한 번씩 얼굴을 보고 수업을 이어 나간다는 것은 정말 큰 에너지를 필요로 했고 그보다 더 큰 상처를 받아오는 일이었다. 나는 8개월 만에 그를 포기했다.

나는 이제야 그 선생님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가늠해 본다. 그는 나를 미워했을까? 이해했을까? 나는 그가 ‘백인 냄새가 나’고, ‘뚱뚱’하고, ‘남자’여서 싫어했다. 물론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서는 여자애에게 낯선 존재는 불편한 대상일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렇게까지 그를 싫어했을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는 내가 무시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백인이었다. 나를 반기지 않는 백인 사회-로 대표되는 미국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혐오당하는 내가 유일하게 그 무시와 혐오를 되갚을 수 있는 백인이었다. 

어렴풋한 기억 속의 그는 나의 냉담한 태도에도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했다. 그는 내가 그를 무시해도 나를 무시하지 않았고 내가 그를 싫어해도 나를 혼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마음껏 무시하고 싫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덕분에 맨 밑바닥에 위치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열두 살의 나는 남들이 내게 건네는 멸시를 내면화하여 나조차 나를 존중하지 못했다. 그때껏 나라고 믿었던 모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초라한 나 또한 마주해야 했다. 머리 위까지 물이 찰랑거릴 때 그를 밟으면 나는 조금이라도 올라가 고개를 내밀고 숨을 쉴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내 숨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진심을 담아 사과와 감사를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내게 있어 영원히 뚱뚱한 백인 남자 튜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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