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술 읽어 주는 여자
스페인 여행 중 문어 요리가 유명하다는 한 식당에 갔다. 이것저것 시켜 푸짐하게 식사를 하고 계산서를 요청하고 기다리고 있다. 몇 분 후 계산서가 테이블 한편에 놓이고 주문하지 않은 샷이 함께 놓인다. 의문의 병 3개도 함께 왔다. 투명한색, 노란색, 캐러멜색. 뭔지 모르겠지만 하나 고르라고 하니 만만해 보이는 캐러멜색을 하나 고른다. 달달하니 알코올이 살짝 더 느껴지는 베일리스, 깔루아 밀크 같은 맛이 난다. 이것이 나의 첫 오루호와의 만남이었다.
오루호??
알고 마시면 그 나라가 보인다. 술 문화 즐기기. 오늘은 두 번째 주제로 오루호(Orujo)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베르무트가 식욕을 돋우어 주는 식전 주였다면 이번에 이야기할 오루호는 식후에 마시는 술이다. 입안에 남은 음식 맛을 싹 씻어주고 소화에도 도움을 주는 강렬한 술이다.
가장 유명한 오루호 3가지를 소개해보면,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오루호 블랑코(orujo blanco), 허브를 첨가한 오루호 데 옐바(orujo de hierbas) 그리고 에스프레소와 연유를 첨가한 오루호 데 끄레마(orujo de crema)가 있다.
어느 지역 술이야?
스페인 여행을 해 보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거라 생각하는 이 술. 왜냐하면 보통 갈리시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을 경우 마지막에 서비스로 많이 준다.(단골이 많은 로컬 갈리시안 식당에 가면 간혹 병째로 주기도 한다.) 그래서 갈리시안 지방 술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처음 오루호를 만들어 먹기 시작한 곳은 14세기 경 칸타브리아주이다. 현재 스페인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주종이다. 특히 북쪽 스페인(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칸타브리아) 지역에서 많이 즐기며 안달루시아 지역에서도 좋은 오루호가 만들어지고 있다.
오루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술 인가?
쌀을 증류해 만든 소주를 즐겨 마시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오루호는 은근 친근한 느낌의 술이다. 바로 포도를 증류해 만든 증류주(guardiente)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세계에서 3번째로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다. 와인을 양조하는 과정에서 발효가 된 포도를 착즙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때 와인으로 사용할 착즙 과정을 끝낸 껍질과 찌꺼기들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들을 따로 모아서 증류한 술이 바로 오루호이다.
옆 나라 와인 산지인 프랑스와 이태리에서도 비슷한 주종이 있는데 프랑스에서는 마르(marc), 이태리에서는 그라파(grappa)라고 부른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기구가 바로 오루호를 증류하는 기기인 알암비께(alambique)이다.
<*잠시 tmi> 8세기부터 약 800년 동안이나 아랍의 지배를 받은 스페인은 지금까지도 그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다. 그중 하나가 바로 "AL"로 시작하는 단어들인데 알코올, 알함브라, 알암비께, 알무하다 등 꽤 많은 스페인어 단어들이 아랍어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알코올을 증류하는 기술 그리고 그 기구인 알암비께 역시 아랍인들에 의해 전수되었다.
위 사진은 아마존에서 판매되고 있는 알암비께이다.(상품화되어서 판매되는 오루호도 많이 있지만 와인 산지 시골에 마을에 가면 집에서 담은 오루호를 이름 없는 공병에 담아 판매하기도 한다.)
쿠퍼 팟(copper pot)라 불리는 둥근 통에 발효되어 착즙이 끝난 포도 껍질을 넣고 물을 넣는다. 어니언 헤드(onion head)라 불리는 온도계가 달린 뚜껑을 덮고 끓인다. 물보다 입자가 가벼운 알코올은 수증기가 되어 위쪽에 연결된 파이프로 이동한다. 콘덴서(condenser)라고 하는 오른쪽 냉각기에는 차가운 물을 넣어 파이프의 수증기가 식으면서 오루호가 되어 나오도록 해주는 원리이다.(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마셔?
한국에는 소주와 음식을 함께 먹는 문화라 소주와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 다양하다. 샷과 음식을 함께 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스페인에는 샷으로 마시는 술 종류는 음식과 함께 하지 않는 편이다. 보통 맥주나 와인을 음식과 함께 곁들여 마시고 샷으로 마시는 증류주류 술은 식후주로 한잔 정도 마신다. 달달한 주종의 샷은(오루호 데 끄레마, 셰리 와인) 디저트와 함께 페어링 하기도 한다.
오루호 역시 주삐또(chupito)라고 부르는 작은 샷 잔에 한잔 정도 마시는 것이 전통이다. 취향에 따라 얼음을 넣어 온더록스로도 마시기도 하지만 8~10도 정도의 온도로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것을 추천한다. 도수가 높은 편이라(30~40도) 입안에 남은 음식 맛을 씻어주고 소화제 역할도 한다고 한다. 좋은 오루호는 높은 알코올 도수가 느껴지지 않고 목 넘김이 부드러우면서 뜨겁게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