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은 분리독립운동가입니다.
남편은 비아프라 사람이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분명 내게 나이지리아에서 왔다고 했다. 그를 만나고 인터넷으로 나이지리아를 검색해 보았다. 나이지리아는 크게 3개의 민족, 아우사, 요루바, 이보가 있고 250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 민족의 언어와 문화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그중 기독교가 우세한 이보족이다. 이보족은 나이지리아 인구의 약 17퍼센트만 차지한 민족이다. 인터넷과 남편을 통해 나이지리아를 알게 되었을 땐 '비아프라'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한국에서 만나 함께 나이지리아에 가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우리는 결혼을 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이지리아에서 한 달간 지내면서도 비아프라의 존재를 몰랐다.
그 존재를 알게 된 건,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난 후부터다. 언젠가부터 그는 어떤 라디오 방송 같은 것을 수시로 듣기 시작했다. 그 무렵 그는 '비아프라'라는 단어를 입에 자주 올렸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무슨 말인지 잘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남편의 설명은 내가 이해하기에 버거웠다. 그러니까 나이지리아가 있기 전에 이미 비아프라가 있었지만 외세에 의해, 다른 부족들과 함께 나이지리아가 되었다. 지금은 이보족 모두가 비아프라 분리를 원하는 건 아니라 한다. 이미 나이지리아로 살았으니, '그냥 이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사람도 있고, '힘들다, 분리하자'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수시로 방송을 듣다가 잠들곤 했다. 방송을 켜놓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잠든 남편의 모습을 발견한 적도 여러 번 있다. 침대에 누워서도 소리를 켜두어서 여러 번 그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방송을 듣다가도 지인들에게 전화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그는 친구들과는 이보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 크기와 악센트에서 분노가 느껴졌고 그가 '비아프라'라는 말을 여러 차례 언급하는 것을 들으면서 무슨 일이 생겼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평소에도 고혈압이 있는 남편은 비아프라 뉴스로 인해 혈압이 더 올라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남편과 함께 뜻을 가진 이들은 좁은 한국 내에서도 지역별로 '비아프라' 지부를 만들었고, 남편은 그중 한 지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단체 설립에도 참여했다. 단체 설립을 해야 할 때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도 수시로 물었다. 어디에서 단체 설립 허가를 받아야 하는지 등을 물어왔다. 공공기관에 가 있으면 전화를 받아 통역을 하려 애쓰기도 했다. 남편은 거의 매주 일요일 아침부터 회의를 한다며 핸드폰으로 이야기를 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첫 번째 일요일은 회의 참석하느라 그 주 육아는 오로지 내 담당이 되어버렸다. 어딘가에 가족끼리 함께 가고 싶어도 그날은 갈 수가 없다.
'비아프라'라는 단어를 알고 나자, 책을 보면서 가끔씩 등장하는 '비아프라' 단어에 눈길이 갔고, 조금씩 더 찾아보게 되었다. 1967년 5월 30일 나이지리아에서는 비아프라 내전이 일어났다. 동부 지역의 군사 수장이 분리 독립을 선포하고 국가 이름을 비아프라라 했다. 일방적인 독립 선포라 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문제는 더 거슬러 영국 식민지 시대로 올라간다. 영국이 비아프라 분쟁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그 내전은 세게 내전 중 가장 끔찍한 내전으로 기록될 정도이며 그로 인해 죽은 사람은 백만 명에서 삼백만 명에 가깝다고 한다. 한 도시 인구가 통으로 사라진 것이다. 비아프라는 내전에서 실패했고 결국 나이지리아로 남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삶은 위협받고 있다. 폴라니 목동, 보코하람 같은 테러리스트에 의해서 그들의 삶은 점점 망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후손들은 비아프라 분리독립운동을 전 세계에서 진행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 남편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독립운동가인 셈이다. 그것도 자기 나라가 아닌, 같은 대륙도 아닌, 머나먼 아시아, 한국에서 비아프라 분리(독립) 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삶은 비아프라를 받아들여(?) 점점 안정이 되고 있다. 매달 첫 번째 일요일은 남편이 없으니, 나 혼자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이젠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집에 태극기도 없는데 비아프라 깃발이 있는 것도 어색했지만 이젠 안 보이면 허전하다. (아, 나도 태극기 사야겠다.) 나는 내조의 여왕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나는 분리독립운동가 아내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제 강점기에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한 세기가 지난 후, 한국 땅에서 살고 있는 나는 그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하게 된다. 그들과는 큰 상관도 없고, 먹고살 걱정을 하기에도 빠듯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이라니, 그 당시에는 사치라 느꼈을지도 모른다. 당장 언제 독립이 이루어질지 짐작도 할 수 없고 한국에서 하는 활동이 아니라 이역만리타국에서 하는 활동이 한국의 독립에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도 안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마음이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차곡차곡 어딘가에 붙들려 있다가 바람결에 한국에 사는 내게 들려오는 것 같다.
적극적으로 남편의 분리독립운동을 도와주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방해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신조를 갖게 되었다. 언젠가 정말 비아프라 인들이 원하는 대로 분리독립에 성공한다면, 그때 한국에서 운동을 한 남편의 공이 0.1% 정도 인정받게 된다면, 나는 남편 공의 최소한 40%는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남편의 이름이 그들의 역사에 이름 남길 때, 나의 방해가 없었다는 것, 때로는 내가 도움이 되었다는 게 어딘가에 남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이역만리는 떨어진 한국에서 비아프라 분리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