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장 이기적인 시간

일기 중독자의 고백

by 해이나

나는 일기 중독자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자기 전 한 번, 작년부터는 5년일기장을 구입해서 열심히 쓰는 중이고, 때때로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미래 일기를 쓰기도 한다. 다 합치면 하루에 1시간은 일기를 쓰는데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언제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것일까.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 즈음, 그림과 함께 ‘참 재미있었다’ 로 끝나는 숙제를 하면서부터였지 싶다. 선생님이 멋진 글씨로 일기 맨 끝에 달아주시던 댓글에 울고 웃으며, 알록달록한 색연필로 써내려가던 일기. 생각해보니 당시의 그림일기는 꽤나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활동이었다. 하루의 순간 중 가장 인상적인 한 장을 포착해 그에 대한 감상을 적는 활동이라니. 인생 8년차 쯤 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예술적인 활동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인생 40년차 즈음에 생각해보아도 쉽지 않은 일이다.


숙제처럼 시작했던 일기지만, 그 이후로도 나는 일기를 꾸준히 써왔다. 물론 수십년동안을 매일같이 쓰지는 못했지만, 종이에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과 생각의 편린들을 마구 쏟아내는 일을 안식으로 삼았다. 고민이 있는 날이면, 지침없이 몇 장을 내리 써내려가던 10대의 기록들. 늦은 새벽,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신해철 님의 목소리를 벗삼아 써내려가던 생각들. 그 이후로도 삶의 큰 변곡점 앞에서 나는 일기장을 폈다. 고등학교를 자퇴할 때에도,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도, 그 꿈이 좌절되었을 때에도 나는 일기를 폈다. 그 수많은 페이지들은 주로 저녁, 혹은 늦은 밤, 때때로 새벽녘 채워졌다. 아무래도 늦은 밤의 고요함이 주는 센치함이 더해진 글들이었다. 그 이후로 일기를 꾸준히 써온 듯 하다. 물론 매일 매일 쓰지는 못했지만, 종이에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과 생각의 편린들을 마구 쏟아내는 일은 안식과도 같았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아침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어나자마자 일기장을 꺼내어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정착한 일기장은 호보니치테쵸. 손바닥만한 작은 일기장이다. 여행을 가서도 아침 일기만은 빼놓지 않고 쓰려고 노력한다. 아침에 무슨 일기를 쓰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지만, 생각해보면 기록할 것들이 참 많다. 오늘 아침의 컨디션, 간 밤에 꾸었던 꿈의 인상적인 장면, 오늘 하루의 계획과 각오, 다짐들. 뭐 그런 것들을 적다보면 손바닥만한 종이가 부족할 때도 많다. 사실 아침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삶을 붙잡아 두고 싶은 아쉬움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두고 싶었다.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미련들.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 먹어가면서 그 욕구는 더욱 더 강렬해졌다. 지나온 시간들이 아련하게 흐릿해지는 만큼, 현재 내 눈 앞에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욕심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놓치고 싶지 않아. 붙잡고 싶어. 전부 다 내 것으로 잡아두고 싶어. 뭐 그런 마음이었다.


그렇게 일기를 써내려간지 몇 년. 나는 조금 바뀌기 시작했다. 삶을 붙잡아두고 싶은 아쉬움, 흐르는 시간에 대한 미련에서 시작된 글들은 결국 흘러가는 삶에 대한 받아들임이 되었고,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가 되었다.


나는 하루 두 번 일기를 쓴다. 매일 잠에서 깨어나서, 그리고 잠들기 직전.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펼치고 글을 쓴다. 종이의 질감과 펜촉의 닿음이 나를 안정시킨다. 글을 쓰는 사각거림과 그 고요한 부스럭 거림이 나에게 위안과 안정을 준다. 하루 24시간 중 오롯이 나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나에 대한 것들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시간이다. 내가 느끼는 것들, 내가 꿈꾸는 것들,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나의 욕망, 나의 꿈, 나의 치부, 나의 후회, 나의 사람들, 나의 사랑. 나의, 나의, 나의 것들.


어찌보면 일기를 쓰는 시간은 나의 하루 중 가장 이기적인 시간이다. 하루에 두 번 나는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마흔 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