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납의 잘못 — 충분조건의 환상
우리는 종종 많은 사례를 보면 이해했다고 느낀다. 여러 번 반복되는 장면을 보고 나면 그 안에 어떤 법칙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험을 모으고, 수치를 나열하고, 성공한 이야기들을 정리한다. 그 과정은 꽤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귀납은 이해를 주기보다는 안심을 준다. “대체로 그렇다”는 말은 설명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질문을 멈추게 만드는 문장에 가깝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는 묻지 않은 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사고를 끝내버리기 때문이다.
귀납은 과정을 생략한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어떤 선택들이 있었는지, 어떤 조건이 빠졌다면 그 결과가 성립하지 않았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실패한 경우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성공한 장면만 남는다. 그렇게 남은 결과는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된다.
이때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에서 공통점을 찾는다. 비슷한 환경, 비슷한 태도, 비슷한 선택들. 그리고 그 공통점은 곧 조건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문제는 이 조건이 결과와 함께 있었던 조건일 뿐이라는 점이다. 결과를 만들어낸 필수 조건인지, 단지 우연히 겹쳐 있었던 조건인지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조건은 마치 결과를 보장하는 충분조건처럼 작동한다.
충분조건은 매력적이다. 따라 할 수 있고, 희망을 주며, 설명이 간단하다. 그래서 사회는 충분조건을 좋아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루틴, 공통된 습관, 반복 가능한 방식들이 끊임없이 이야기된다. 그것들은 이해하기 쉬운 대신 구조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충분조건이 성공하면 결과는 실제로 발생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강하게 믿는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드러나지 않은 필요조건들이 존재한다. 시기, 환경, 선택의 방향, 무엇을 했는가보다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 가장 중요하게는 개인의 고유한 특성 같은 요소들이다. 이 조건들이 보이지 않으면 결과는 다시 만들어질 수 없다.
그래서 같은 행동을 반복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이때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운이었나 보다.” 하지만 그것은 운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부재에 가깝다. 필요조건을 알지 못한 채 충분조건만 붙잡았기 때문이다.
귀납이 잘못된 사고인 것은 아니다. 귀납은 원래 구조를 만드는 도구라기보다 구조를 시험하는 도구에 가깝다. 어떤 조건이 실제로 작동하는지, 예외는 어디에서 발생하는지를 확인하는 데에는 귀납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순서가 뒤바뀌었을 때다.
귀납으로부터 곧바로 삶의 방식을 끌어내는 순간, 사고는 구조를 잃는다. 결과는 남지만 이유는 남지 않는다. 그때 성공은 설명되지만 재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과를 원한다. 그러나 살아야 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구조다.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선택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연에 자신을 맡기는 일에 가깝다. 충분조건의 환상은 바로 그 지점에서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