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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12. 2020

스트레스에 방해 받지 않는 선에서

그림 그리는 일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인 브로콜리 너마저의 ‘이웃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 노래는 시끄럽다고 친구에게 쫓겨난 화자가 헤드폰 속의 노래에 심취해 나만의 춤을 춘다는 내용이다.

나에게 이 노래는 작은 탈출구 같은 노래였다. 멜로디가 극으로 치닫지도, 화려한 보컬력을 뽐내는 노래가 아님에도 삽시간에 음악에 빠져들어 귓속에 울리는 멜로디에 춤을 추는 화자가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나에게 그림은 그런 존재였다. 오늘 있었던 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나와 단절된 세상을 그리는 곳. 언제나 평화롭고, 꽃들과 푸른 하늘, 선선한 바람이 흐르는 곳이었다. 기분이 안좋은 날에는 수채화 물감에 묵은 감정을 풀어버리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않은 날에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으로 오늘 무언가 해낸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새 그림은 일상의 규칙이 되고, 매일 해야하는 숙제가 되어 있었다. 환상은 금세 바닥나 버렸고, 매일 소재 고민에 시달렸다. 누가 나에게 시킨 게 아닌데도 이틀 정도 그림 그리는 일이 밀리면 조급하고 속상해졌다. 쌓여가는 좋아요, 팔로우에 흐뭇했지만 그냥 펑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면 나의 그림이 더욱 못마땅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잠시 멈췄다.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괜찮은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고작 10일이 흐르고, 나는 그림을 그렸다.

우연인지 그 날 다정한 메세지가 한 통 도착했다.

그림을 좋아하던 학생이 보낸 것인데, 그림에 흥미를 잃고 전부 삭제하다 내가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것에 힘을 얻어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는. 여전히 따스하고 기분좋은 그림을 그려줘서 고맙다는 이야기였다.

나 역시 그림을 멈추려 했었다는 말을 하진 못했지만, 그 친구의 메세지는 비 오는 날에 뜬 무지개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만 그리려고 하면 계속 그려야 할 일이 생긴다.

이제 나는 스트레스에 방해 받지 않는 선에서 수채화 그림을 그린다. 어쩌면 완벽한 취미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직업적으로 끌고 가고 싶었지만 실패해버렸는지도.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두 달에 한 번이든, 세 달에 한 번이든, 아니면 바로 다음날이든 정해진 시간은 없다. 수채화를 꺼내들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그 때에, 연필을 들고 붓을 쥔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그림을 그린다. 자주 그리지 않아서 놀랄만큼 그림 실력이 사라져 있을지도, 그리고 싶어도 소재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나에게 준 부담감을 완전히 덜어내려 한다.


이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 선에서, 나의 작은 탈출구가 되는 그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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