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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n 21. 2020

그 떡국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할머니의 떡국에는 닭다리 하나가 통째로, 탐스럽게 올라가 있었다.

어릴 적, 설날 연휴는 긴긴 지루함의 기억으로 시작되었다. 경기도에서 할머니의 집이 있는 전라남도 시골 마을까지는 자가용으로 기본 네 시간이 걸렸다. 명절 대 이동 프리미엄이 얹어지면 여덟 시간도 가뿐했다. 도로 위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들. 차멀미가 심했던 나는 차 뒷좌석에 잘못 반죽된 밀가루처럼 힘없이 달라붙어 있었다. 귀성길은 내겐 고난으로만 가득 찬 모험 길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명절날, 할머니의 집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쓴 적은 없었다. 그 모험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멋진 보상을 알고 있었으니깐.

  나는 할머니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른다. 할머니는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일 년에 두어 번 만날 뿐인 손주들에게 왔냐, 하는 한마디 인사로만 자신의 반가움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 손주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자신의 젊은 적 이야기를 해 준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나도 말수 많은 아이가 아니었기에, 나와 할머니가 단 둘이 있기라도 하면 그 공간에는 정적이 흘렀다. 내가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것은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 무뚝뚝한 만큼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무척 음식 솜씨가 좋다는 것 정도였다.

  할머니의 음식은 품위가 있었다. 맛있게만 만드는 게 아니라, 접시에 올려놓는 품새 하나하나가 정갈했다. 할머니는 음식을 색깔별로 나누어, 딱 한 사람씩 먹을 만큼만 접시에 담는 사람이었다. 김치를 손으로 쭉 찢어 돌돌 말아 준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내 앞에 놓인 김치는 언제나 어린아이가 먹기 좋을 정도로 잘라져 있었다. 찌개도 일인분씩 그릇에 나누어 담아 앞에 놓아주었고 생선도 한 토막씩 따로 잘라 놓았다. 할머니의 밥상에서 나는 온전한 일 인분을 누릴 수 있었고, 그건 어린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존중이었다.









  나는 둘째 딸이자 막내였다. 집에서 짜장면이라도 시켜 먹을 때면, 나와 언니 둘의 몫으로 한 그릇이 주어졌고 쭈쭈바는 삼분의 일만 내 몫이었다. 어린애들이 성인 기준으로 나온 일 인분 음식을 다 먹지 못할게 빤하다는 게 이유였다. 집에서는 생선 한 마리를 구워 접시 하나에 놓고 온 가족이 나누어 먹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내가 어려서 생선가시를 잘 발라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직접 손대지 못하게 했다. 그 모든 행동들은 부모님이 생각하기엔 더없이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어린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온전히 일 인분을 차지해서는 안 되는구나, 하고. 일 인분을 다 먹지 못하더라도 애당초 그것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느냐 가지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부모님은 내게 물어봤어야 했다.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먹을래, 나누어 먹을래.”라고. 만약 내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어린아이도 ‘한 사람’ 임을 잊어버린다. 그때마다, 어린아이는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표현이 서툴러 그 마음을 전하지 못할 뿐이다.

  설날 전날, 멀미에 시달리며 할머니의 집에 도착하면 이미 밤이었다. 까무러치듯 잠들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깨어났다. 설날 아침 할머니의 밥상에는 다른 때에는 없는 특별한 음식이 놓여 있었다. 떡국이었다. 할머니는 닭으로 육수를 내어 떡국을 끓였다. 잘게 찢은 닭고기가 국물 안에서 자근자근 씹히는 것이 별미였다. 할머니는 떡국을 뜨기 전에 묻곤 했다.

  “닭다리 먹을 사람?”

  사실 나는 닭다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 집 식구들의 선호 부위는 날개와 가슴살이었던지라, 치킨을 시켜 먹을 때에도 닭다리는 찬밥 신세였다. 그렇지만 그때만은, 손을 들고 외쳤다.

  “저요!”

  떡국 위에 통째로 올라갔던 닭다리. 지금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닭다리가, 그때만은 이상하게도 맛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내가 어른이 되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맛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감칠맛이 감도는 국물은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해서, 한 숟가락 떠 마시면 그 뒤부턴 끊을 수 없이 훌훌 계속 떠 마시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말캉한 떡을 앞니로 질겅 끊어내면 농축되어 있던 달큰한 맛이 이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할머니는 내가 스무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 닭다리 올라간 떡국은 먹지 못했다. 멸치 육수에 소고기가 들어간, 달걀지단 올라간 어머니의 떡국은 할머니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이 일반적인 떡국이고, 할머니가 끓였던 닭장 떡국은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 먹는 것임을 그때야 알았다. 그것을 ‘닭장 떡국’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떡국’은 지역별로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 재료에 지역별 특징이 드러난다. 바다와 인접한 경상도는 해산물을 육수로 쓰고, 개성은 특산물인 조롱이떡을 넣는다. 벼농사가 힘들었던 강원도와 북쪽 지방에서는 떡 대신 만두를 넣기도 하며 경남 통영에서는 굴을 넣고 끓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같은 지역 출신이라도 떡국의 기억이 완전히 같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안에서 가정마다 또다시 변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떡국 하나에도 지역과, 가족의 특성이 배어난다.

  할머니는 누구에게서 그 떡국을 배웠을까.

  할머니와 좀 더 이야기를 할 걸 그랬다는 후회를, 그제야 했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듯이 어른은 어른이기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 수 있음을 어릴 적에는 몰랐다. 어른은 당연히 모든 것을 나보다 잘할 것이라 믿었으니깐. 어른이 되어 보니 알겠다. 어른이라도 어린아이에게 말을 거는 것이 쑥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호의를 가지고 한 일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일일이 생각하지 못하곤 한다. 내 딴에는 상대를 존중한다고 한 일이, 오히려 상대의 자존감을 깎아내릴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의 떡국을 떠올린다. 특별했던 떡국. 모두의 떡국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 모든 떡국은 특별하고, 모든 사람은 특별하며, 나 역시 특별하다. 그렇기에 모두는 특별하면서도 서로 이어져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실수하더라도 다시 한번 대화를 해 보자, 용기를 내게 된다.

  한식은 ‘공간 전개형 상차림’이다.(1) 준비된 음식을 한 상에 모두 차려놓는 형식이다. 커다란 그릇에 담긴 구이나 조림도, 작은 종지에 담긴 장도 모두 한 곳에 놓인다. 공간 전개형 상차림이란, 다른 말로 하자면 어울림의 밥상인 셈이다. 밥을 먹다 보면 알게 된다. 커다란 접시에 놓인 반찬도, 작은 그릇에 담긴 반찬도 모두 자신의 몫을 한다는 것을. 어린아이도 어른도 마찬가지다. 서투른 숟가락질이라도 한 공기의 밥을 먹는 모두는 존중받아야 할 한 사람이다. 쓰고 짜고 달콤한 맛이 버물려 어우러지듯,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동안 지역이나 나이, 연령도 오고 가는 대화 속에 어우러질 것이다.

  나는 이젠 할머니에게 물어볼 수 없다. 그러나 일 년이 가고 새해가 오면, 떡국을 끓일 것이다. 몽글몽글,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한 그릇의 존중을 담아. 어디선가 누군가, 아이에게 닭다리를 나누어 주고 있을 터이다.

기억도 그리움도 존중도, 음식과 함께 이어져 간다. 우리의 밥상 위에서. (*)





(1) 한국, 맛을 찾아 떠나는 여행. 정희선 외. 농림축산 식품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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