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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n 28. 2016

사탕 사과, 웨이웨이

2016.04.09-12 웨이하이 한중 사진교류전 이야기. 다섯.




사진은 주관적
이며 객관적이다.
슬쩍 들여다 본 정리 안 된 창고.
낡은 냄비와 조리도구.


중국 웨이하이의 해안 마을들은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다. 
해초방이다. 말린 해초로 지붕을 덮는다. 건해초로 지붕을 올리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내구성이 좋다고 한다. 이 해초방을 얹은 집들은 벽도 토흙으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초가와 모양새가 비슷하다. 농촌에서 구하기 쉬운 볏짚으로 지붕을 얹었듯, 해안에서도 그러한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전통있는 양식이니만큼 나라에서는 이 해초방 지붕을 보존하려 하는 듯 하다. 다른 지붕으로 바꾸려면 상당히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해초방 지붕을 인 집들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슬레이트 지붕이다. 건해초가 편리하고 오래간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예전의 지혜다. 아무래도 견고하고 깨끗한 슬레이트 지붕의 편리함은 따라가기 힘들었을 터다.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슬레이트 지붕을 선택한다면 아쉽데도 어쩔 수 없다. 
그 사람들에게 집은 문화재가 아닌, 실제 생활의 공간이니깐. 



해초방 지붕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들 중 가장 알려진 곳은 쉬커우다. 
시골 마을들 중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이른바 읍내 같은 마을이다. 마을 안에 관공서와 경찰서가 있고, 학교도 있다. 슈퍼와 찻집도 제법 보인다. 해안가와 마주하고 있어 종종 관광객들도 들린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도 찾을 수 있다. 마을 뒤편에서는 고층 건물을 올리는 공사가 쉴새없이 이루어지고도 있다. 
 나는 쉬커우를 빠져나올 때까지 가라앉아 있었다. 오전에 전시회 오프닝을 마치고 바로 쉬커우로 온 터였다.
 타협의 결과물을 보는 것은 늘 힘들다. 언제나, 나는 내 생각만큼은 뻔뻔하지 못하다.
 쉬커우를 떠나는 버스 안에서 눈을 감았다.
 조금의 뻔뻔함.
 그 순간 그것이 절실했다.



차는 이십여분을 달려 웨이웨이에 멈췄다.
웨이웨이는 쉬커우보다 더 외곽으로 빠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해안을 직접 마주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옥수수와 사과나무가 많이 눈에 띈다. 마을 입구에서 이어지는 긴 밭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집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구멍가게다. 슈퍼라고 하기에는 옹색한 차림새다. 
 구멍가게를 약간 지나면 마을 회관이 있다. 회관 앞에 놓인 의자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몇 분이 나란히 앉아 계신다. 느닷없이 카메라를 멘 사람들이 들이닥쳤는데 불쾌한 기색도 없이 손을 흔든다. 카메라를 들어 보이면 격하게 손을 저으시며 안돼, 하신다. 그 분명한 거부가 무척이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웨이웨이의 풍경은, 내 유년의 기억 속 새겨진 풍경과 매우 닮아 있었다.



골목을 접어들어 한 집앞에 도착했다. 집 앞 작은 텃밭에 펌프가 있었다. 
내 할머니의 시골 집 마당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나는 할머니 집 펌프에서 물을 끌어올리는데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매달려 온 몸으로 손잡이를 눌러도 물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나와는 달리 서너번만에 물을 끌어냈다. 어린 내 눈에, 그건 어떤 마법보다도 멋져 보였다. 
슬쩍 펌프의 손잡이를 눌러 보았다. 물은 나오지 않았다. 
역시 안 되는구나. 걸음을 돌리려는데 닫혀있던 대문이 열렸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집 밖으로 나오셨다. 나는 흠칫 굳었다. 혼이 나려나. 어색하게 웃었다. 할머니는 내 쪽으로 지팡이를 집으며 타박타박 걸어오셨다.
마법이 일어났다.
펌프에서 울컥 솟아오른 물이 텃밭의 흙을 적셨다. 내 입에서 저절로 우와, 소리가 튀어나갔다. 할머니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번 더 펌프질을 하셨다. 나는 펌프 끝에서 떨어지는 물에 손을 대 보았다. 
시원하고 맑은 물이 손과, 등을 뻣뻣하게 만들고 있던 긴장을 적셔 나갔다. 내가 집 골목을 다 벗어날 때까지 할머니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할머니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귀퉁이를 사진으로 담았다.



좀 더 마을 위쪽으로 올라갔다. 
위로 향할수록 대문을 각목으로 막아놓은 집들이 많아졌다. 주인이 집을 떠난 상태라는 뜻이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치워버릴 수 있는 막대기로 받쳐 놓은 건 일종의 표식이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 집 사람들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알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예의를 지킬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잠시동안 굳게 닫힌 문을 보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위쪽 언덕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내려오셨다. 손에 바구니를 들고 계셨다. 할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짓을 했다. 혹시 바구니를 들어 달라는 건가 싶어 얼른 다가갔다. 하지만 내가 바구니를 들려 하자 다시 손을 내저으셨다. 그리고는 총총걸음으로 언덕에서 왼쪽으로 이어진 골목길로 들어가셨다. 집들이 붙어 선 골목길이다. 할머니는 그 중 대문이 활짝 열린 집 안으로 들어가셨다.
잠시 망설이다 할머니의 뒤를 따라갔다. 망설임 속에는 낯선 사람을 쉽게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상식이 있었다. 
그래도 할머니의 집 대문 문턱을 넘었던 건, 그때까지도 물방울이 손톱 아래 맺혀 마음도 간질이고 있어서였다.
할머니는 마당 한쪽에 놓인 커다란 포대기를 풀었다. 그러더니 비닐봉지 안에 척척, 포대 안에 든 것을 옮겨 담았다.
사과였다.



할머니는 비닐봉지를 내 품에 쑥 안겼다. 함박 웃음을 띤 얼굴로 사과 베어먹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나는 엉겁결에 사과를 품에 안은 채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무리봐도 선물이었다. 잠깐 지갑에 얼마가 있더라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선물임은 명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머니에게 사과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게 없었다. 사진이라도 찍어 드릴까 해서 카메라를 내보이자, 할머니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셰셰. 어설프게 인사를 하며 할머니를 안았다. 할머니는 활짝 웃으며 나를 마주 안았다. 할머니의 손이 내 등을 쓰다듬었다. 처음 만난 할머니인데도, 그 손길이 낯설지가 않았다. 
사과를 끌어안고 할머니의 집을 나왔다. 사과 봉지를 들고 마을을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십분만에 체력이 바닥날 터였다.일단 버스에 놓고 오자 싶어, 마을 입구로 몸을 틀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 퍼뜩 알았다.
 이 마을에는 어린애가 없다.

마을을 돌아다니는 동안 한 명의 어린아이도 만나지 못했다. 할머니 등에 업힌 아기도 없었다. 어린아이는커녕, 중장년층에 속할 듯 보이는 사람들도 거의 마주치지 못했다. 길에서 본 사람들은 전부 적어도 일흔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버스에 사과를 놓고 내려오다 흩어져 사진을 찍던 일행들 몇몇과 만났다.
“젊은 애들은 다 돈벌러 중심가로 갔겠지. 게다가 이 집. 해초방이 겉에서 보는 거랑 다르게 안이 엄청 좁아. 젊은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깐 더욱 더 마을 떠나서, 다른 곳에 가고 싶어하는 거지.”
“이거 집 안이 좁아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안 들어가봤어? 들어가 볼래?”
운좋게도 마주친 일행 중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길에 서 계시던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셨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구경 해도 된다는데.”
호쾌한 초대였다.
들어가 본 집 안은,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정말로 좁았다. 밖에서 보기에는 교실 크기의 방이 세 개는 있을 듯 보였는데, 들어가보니 교실 반칸만한 방이 둘, 그 방의 삼분지 이 정도 되는 크기의 부엌이 붙어 있을 뿐이다. 살펴보니 집에 서까래가 거의 없다. 그래서인가 싶었다.
벽과 천장을 기웃기웃 살피다 몇몇과 함께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 안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다. 일행을 집으로 초대한 할아버지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일행 중 한 명이 부엌 할아버지에게 양갱을 건넸다. 할아버지는 양갱을 받아들고는 포장지를 이리저리 갉작였다. 눈이 어두워서 포장지 벗기는 곳이 안 보이시는 건가 싶었다. 양갱을 다시 받아들고 포장을 벗겨 드렸다. 그래도 이리저리 살피기만 하실 뿐이다. 반을 잘라 내 입에 넣고, 반을 드렸더니 그제야 드신다.
 나와 할아버지는 마주 서서 함께 양갱을 우물거렸다.



할아버지가 매만지시던 냄비. 주걱. 장이 든 항아리. 그것들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와 일행들과 헤어져 또다른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반쯤 열린 대문 틈으로 나를 본 할머니 두 분이 반갑게 손짓을 했다. 빼꼼히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내 손에 땅콩과 사과를 쥐어 주셨다. 마을 입구에서는 한 할머니가 내 손을 잡아 쥐셨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며 뭐라 하신다. 내가 입은 옷을 툭툭 건드리시며, 손을 꼭 쥐신다. 
말이 안 통해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 손이 차니, 옷을 따뜻하게 입으라는 거였을 터다. 목소리 톤과 손짓까지 우리 할머니가 그렇게 말할 때와 똑같아서 알 수 있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일행분이 오셔서 몇몇 말을 통역해 주셨다. 내가 할머니의 손녀딸과 참 많이 닮았다는 것. 이젠 할머니 나이가 여든이 넘었으니 언제 또 만날까. 그렇게 말하며 내게 작별 인사를 하셨다는 거였다. 



버스에 올라타 마을을 떠날 때에 문득 알았다. 
할머니들이 안겨주었던 사과는 사탕이었다. 우리네 할머니들은 처음 본 아이 손에 사탕을 쥐어주며 반갑고 예쁜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변변한 슈퍼가 없는 웨이웨이에서, 그 사탕을 사과가 대신했던 거다.
 사탕 사과이었다.



슬쩍 들여다 본 정리 안 된 창고.
낡은 냄비와 조리도구.

이 사진들은 나와 기억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혹은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덧입혀지기도 할 거다. 굳이 사진만이 아니다. 그림도, 글도 그렇다. 보여주는 사람의 의도가, 보는 사람에게 완전하게 전해지는 경우는 대체 얼마나 있을까.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보고 나누는 이야기조차 왜곡된다. 하물며 렌즈를, 펜을 한 단계 더 거친 의도는 당연히 일그러진다. 보는 쪽을 탓할 노릇이 아니다.
그 일그러짐을 적게 만들게 노력할 것인지.
아니면 그 일그러짐이야말로 본질이라 볼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일그러짐조차 아름다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출 것인지.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다. 입안을 채워주는 달콤함.
 그대로 내 뻔뻔함이 되었다. (*)







유진 [타랑]

Blog : http://blog.naver.com/hik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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