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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n 13. 2016

고독과 소녀와 바위

2016.04.09-12 웨이하이 한중 사진교류전 이야기. 넷.





앞으로도 영영,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이야기






언제인지 시작을 알 수 없는 오래 전.
바다 위를 떠돌던 거대한 고독이 있었어.
고독은 하늘 위에서 모두를 내려다 보았지..
바다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수면에 살랑이는 해초의 춤.
해변가 절벽에서 솟아오른 기세 좋은 나무들
봄이면 초록 싹을 피우다 갈색으로 변해가는 꽃과 풀들
지저귀는 새뛰어다니는 곤충들.
그들 중 누구도 고독의 존재를 몰랐어.
고독은 너무나도 높은 곳에 있었으니깐.

그래도 고독은 신경쓰지 않았지.
고독이었으니깐.





시간은 흘렀어
그래도 여전히언제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날이었지.
고독은 한 아이를 봤어.
아이는 물 속에 서 있었지무릎까지를 물 속에 담그고매일 같은 곳에 서 있었어
아이는 고독이 봤던 무엇과도 달랐지.
물고기처럼 헤엄을 칠 수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해초처럼 유연해 보이지도 않았어
나무처럼 강인하지도 않았고 꽃처럼 아름답지도 않았지
가끔 고독이 내는 기침 소리에 흠칫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동물들처럼 섬세하지도 않은 듯 했어
새처럼 날개가 있지도 않았지.
고독은 매일같은 곳에 서 있는 아이를 보았어.
아이가 소녀가 되고무릎에 찰랑이던 물이 발목 언저리를 적시게 될 때까지.




언제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되었던 날.
소녀는 빠르게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왔어.
발목이무릎이가슴이 바다에 잠겨 들어갔어.
소녀의 등 뒤로 요란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어.
십여명의 남자들이 소녀를 바라보며 해변가에 섰지
소녀는 뒤돌아보지 않았어.
소녀의 목까지도물속에 잠겼어.
소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 위를 바라보았어.
매일 바라보던 곳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지
소녀의 뒤통수가 수면에 닿아 진동을 일으켰어
소녀는 입을 달싹이고는 -
그대로 물 속 으로 가라앉았어.
남자들은 며칠간 계속 해변가에 나타났어
고독은 있는대로 큰 소리를 내 남자들을 쫒으려 했지하지만 소용없었어


고독은 고독이니깐


고독의 힘은 온전히 고독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고
고독의 목소리는 남에게 외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깐
남자들은 점점 오지 않게 되었어.
소녀도 떠오르지 않았지.
고독은 자신만을 위한 힘이 원망스러워졌어.



그래도 시간은 흘렀어아주 조금.
고독은 더 이상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일이 당연하게 생각되지가 않았어.
바다 위로 작고 하얀 신발이 떠오르던 날.
고독은 울었어.
처음으로 울었어소리없는 울음은 고독의 온 몸을 무너뜨렸어
바다 위로 우스스 쏟아져 내린 고독의 몸은 커다란 바위가 되었어
쌓이고 쌓여 작은 섬처럼 보였지.
고독은 그렇게무너진 채 잠들었어.
꿈 속에서 고독은 자신의 몸에서 뻗어나간 초록색의 길고 예쁜 길을 보았어.
길은 해변가까지 쭉 이어졌어
소녀는 그 길을 걸어바다 한가운데에 섰어소녀는 안전했어바다에 선 채 위를 봤지
긴 시간 내내그랬듯이.



빠르지도유연하지도아름답지도 않았던 소녀.
위험을 알아차릴 섬세함도불합리한 폭력에서 달아날 날개도 갖지 못했던 소녀.
그러나 소녀는 단 하나를 가지고 있었어.
고독을 바라볼 수 있는 까맣고 촉촉한상냥한 눈.

잠이 든 고독은 몰랐어
바위가 된 자신의 몸 여기저기에 물이끼가 끼기 시작한 것을
물고기들이 바위에 알을 낳고새들이 물어온 씨앗이 싹을 틔운 것을
고독이 내려다보던 수많은 것들이고독의 몸 안에 섞여들고 있었어.

언제부터인가 알 수 있도록 람들이 기록을 시작한 어느날.

누군가 적었어.
「 해안의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자연석이 있다
바위가 기이한 문양을 만들고 있다이것을 석경구라 부른다.

그 기록에는 적히지 않았어.
바위의 한가운데고독의 심장이 생겨나 있는 것은.
바위의 뒤쪽고독의 염원이 흘러 만들어낸 초록색 이끼 길이 
해안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뻗어가고 있다는 것도.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미 고독이 아니었던 고독이바위가 되어 잠들어 있다는 것도.
앞으로도 영영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이야기였지.



사진기를 든 채 한참동안 바위 앞에 서 있었다.
웨이하이 석도의 해변가에는 화반 채석이 있다중국 해안에서 유일한 해식돌이라고 한다돌연 바다 위에 떠오른 오색 무늬의 바위는 돌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다고 했다그래서인지 바위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도록 다리도 놓아져 있었다.
나는 돌을 잘 모른다하지만 그런 내가 봐도 화반 채석은 매력적인 바위였다바위 표면에 불규칙한 무늬들이 서로 엃히고 설켜다양한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그 형상들을 쫓다 보니 어른어른이야기가 피어올랐다.
자연을 찍는 건 어렵다.



처음 산에 가 사진을 찍었던 날의 당혹스러움은 지금도 생생하다붉은 단풍으로 물든 가을 산이었다산 전체가 커다랗고 화려한 꽃다발처럼 보였다찍고 또 찍었다이렇게 예쁜 풍경이면 어떻게 찍어도 예쁘겠거니 했다.
천만의 말씀이었다.
확인한 사진은 모두 엉망이었다사진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내가 봐도 그랬으니진짜 엉망이었다는 거다눈으로 봤을 때에는 감탄이 나왔던 계곡의 빛은사진 안에서는 그저 산만하기만 했다다채로움을 더해주던 나뭇가지와 넝쿨들은 사진 속에서 지저분하게 변해 버렸다빛과 소리와 촉감이 사라진 자연은 아름답지 않았다나는 그때 알았다꽃 한 송이를 적당히 배경 날려 예쁘게 찍는 편이,산을 산 그대로 찍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자연을 원래보다 더 아름답게 찍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글쎄다나는 아무래도 그 사람을 신뢰할 수가 없다
자연을 찍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즐겁다결과물은 처참해도 과정은 행복하다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것도 자유롭게.



사람이나사람의 흔적이 남은 물건은 상상하는 것에 제한이 있다마음속에서 브레이크가 걸린다렌즈 너머 사람을 보고저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을까 유추해 볼 수는 있다하지만 거기까지다내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멋대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 사람을 모델로 한 이야기와그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바위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바위 한 가운데 푹 파인 곳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다른 사람들이 모두 바위 앞을 떠나고도계속 바위의 자국을 바라보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쉬고 바위 앞을 떠났다다리를 내려와해변을 따라 걸었다이끼 낀 돌만 가득한 해변이었다그래서인지 해변에도 사람이 없었다하긴찍어서 그럴싸한 장면이 나올 풍경은 아니었다그래도 계속 걸었다바위의 반대편을 보고 싶었다
바위의 반대편은 다리가 닿은 쪽보다도 고즈넉했다바다에 닿은 바위의 아래쪽에서 피어난 이끼가 둥글게 뻗어나와 있었다듬성듬성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돌들이 징검다리처럼 보였다



이어지고 싶었던 걸까.
쪼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버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그곳에 버스가 머문 시간은 한 시간 정도였다그 내내 나는 채 열 장의 사진도 찍지 못했다.다른 사람에게 괜찮지요내보일 만한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자연을 그만큼 아름답게 찍을 자신은 없다평생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니 적어도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에 어울리는 사진을 찍고 싶다. 
딱 그 정도가 좋다. (*)










유진 [타랑]

Blog : http://blog.naver.com/hik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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