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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택 Spirit Care Aug 15. 2021

전단지 나눠주는 소년

[브런치X저작권위원회]/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명작 /성냥팔이 소녀

1.

퇴근길이었고 추운 날이었다. 밥도 안 먹고 야근을 밥 먹듯 하네... 내가 생각해도 꽤나 그럴싸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지하철 입구에 들어섰다. 하기야 요즘 같은 상황에 월급이 제때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지하철 퇴근길의 루틴을 거쳐 익숙한 듯 낯선 배고픔이 서서히 느껴질 무렵 나는 목적지에 도착한 열차에서 떠 밀리듯 배출되었다. 내려야 할 때와 장소를 알고는 있었지만 떠밀려서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요즘 회사에서 떠돌고 있는 희망퇴직에 대한 생각을 내리기 직전까지 하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희망퇴직이라니....., 퇴직을 희망하라는 건지, 희망을 퇴직하라는 건지...,


역사 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면서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나는 있는 힘껏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장갑이 가방 안에 있었지만 꺼내기조차 귀찮았다. 바깥으로 내쳐지기 싫은 건 나나 장갑이나 마찬가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하겠다 싶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에스컬레이터 난간을 잡은 채 막 바깥으로 나올 무렵이었다. 출구 앞에서 누군가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전단지를 받을까 말까? 이런 문제는 신속하게 판단해야 한다. 하루 종일 판단하고 결정하느라 지쳤는데 퇴근 후에도 이런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니...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은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작고 마른 체구에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 그 아이는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로 보였다. 내 앞의 두 세 사람은 연이어 전단지를 받지 않고 그 소년을 지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추운 날씨에 전단지 한 장 받자고 호주머니에서 굳이 손을 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 소년의 전단지 나눠주는 모습도 왠지 서툴러 보였다. 아마 전단지 알바를 처음 해 보나 싶었다. 소년에게서 전단지를 거의 뺏듯이 받아 들었다. 이 추운 날에 저거 해서 얼마나 받으려나. 부모가 뭐하길래 저 어린애가 저런 알바를 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 부모 몰래 게임머니 벌려고 그러나? 그때였다.  어떤 익숙하고도 생소한 감정이 훅~ 하고 올라왔다. 뭘까, 뭘까... 가만히 그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서글픔이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서글픔이었다. 아니 서러움이라고 해야겠다. 나는 나 자신이 서러워지는 걸 느꼈다. 나는 소년을 다시 뒤돌아 보았다. 


2.

산동네에 지은 아파트여서 지하철역에서 내가 살고 있는 단지까지는 꽤 가파른 길을 걸어야 했다. 읽어보지도 않은 전단지를 호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단지 안을 가로지르며 나는 오늘이 수요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각 동마다 사람들이 분리수거하느라 분주히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피곤이 확 몰려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문득 호주머니 안에서 잡히는 전단지를 꺼내 보았다. OO식당. 곱창전골.


저녁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분리수거의 시간이 돌아왔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분리수거를 하라고 종용했다. 

"오늘은 너희 둘이서 분리수거 좀 해라"

"아이, 추운데..."

"엄마도 밥하느라 피곤하고 집안 정리도 해야 하는데 가끔은 너희들이 좀 도와야지"

"옷 입기도 귀찮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우리 식구 모두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나는 심지어 민소매 러닝셔츠를 입고 있었다. 한겨울에 말이다. 결국은 아내와 내가 같이 분리수거를 했다. 살다 보면 분리수거해야 할 물건들이 끊임없이 나오듯 이 세상에서도 속해있던 조직에서 분리되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 때가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릴 적 집안이 한참 어려울 때 아버지는 동시에 세 가지 일을 하셨다. 그중에 하나는 리어카를 끄시는 일이었다. 짐을 가득 실은 그 리어카를 한여름이나 한겨울 할 것 없이 끄셨는데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한 번도 나에게 도와달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물론 나도 자발적으로 도와드린 기억이 없다. 엄마가 간혹 아빠를 도와드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힘들고 창피한 생각에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날 밤늦게 베란다에 혼자 섰다. 바깥 기온은 영하 10도를 넘어 온 세상은 꽁꽁 얼어 있었다. 나는 반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이었다. 베란다 창문 틈으로 칼바람이 스며들었다.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매서운 추위가 온몸을 할퀴는 듯했고 나도 모르게 턱이 덜덜 떨리며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은 따뜻하다 못해 더워서 반바지에 반팔 차림으로 지내는데 창문 하나 사이로 이런 추운 세상이 있다는 것이 지나친 비약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추위가 온 몸과 신경 구석구석까지 파고들던 순간 어떤 익숙하고도 낯선 감정이 훅~ 하고 올라왔다.  온몸으로 느껴진 추위가 머릿속 해마체 어느 곳까지 헤집고 들어가 잊혔던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했다. 추위에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어떤 조건 반사와도 같은 감정이었다. 아, 그건 서글픔이었다. 아주 강렬하고도 강력한 서글픔이었다.  어린 시절 추운 방에서 오들오들 떨며 느꼈던 그 감정은 지금 생각해보면 서러움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이렇게 문득문득 추위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었다. 거실로 다시 들어와 아까 받았던 전단지를 찾아봤다. 없었다. 분리수거하며 버렸던 게 기억났다. 추위 속에 전단지를 나눠주던 소년이 생각났다.


3.

다음 날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소년은 없었다. 그리곤 나는 소년을 잊고 지냈다. 추위는 여전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아내와 통화하면서 집 근처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집 앞 지하철 역에 도착해서 내가 장소를 알아보기로 했다.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어느 곱창전골집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OO식당. 그 소년이 전단지를 나눠줬던 바로 그 집이었다. 거기서 먹기로 결정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들도 같이 나왔다. 


내가 먼저 식당에 도착해 있었고 곧이어 아내와 아이들이 도착했다.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 장갑까지 꽁꽁 싸매고 나왔다. 두 아이 모두 곱창을 좋아했다. 

"곱창 좋아하지? 날도 추운데 따끈하게 곱창전골에 밥 먹자, 아빠는 술도 한잔하고~"

"네, 좋아요~~"

오랜만의 외식이었고 나도 술 한잔 하면서 가족들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카운터 옆에 소년이 나눠주던 전단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때 누군가 가게문을 열고 들어왔다. 작고 마른 체구에 얼굴을 보니 전단지 나눠주던 그 소년인 것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소년이 들어오면서 차가운 공기가 가게 안으로 훅 하고 함께 빨려 들어왔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맨손을 호호 불며 카운터 옆의 전단지를 한 뭉텅이 집어 들었다. 마침 가게 사장님이 계산을 위해 카운터로 다가왔다.

"이제 그만해도 돼, 날도 추운데... , 여기서 밥 먹고 얼른 집에 가서 공부해야지~"

"아냐, 아빠!, 조금만 더 돌리고 올게요, 그래도 지난주보다 손님이  많아진 것 같아요. 요 밑에 버스 정류장에서 이것만 나눠주고 올게요"

소년은 가게 사장이 말릴 틈도 없이 전단지를 집어 들고 식당 문을 밀어젖히고 나갔다.


"아드님이신가 봐요?" 내가 물었다.

"아, 네. 하지 말라고 해도 저렇게..."

"기특하네요. 날도 추운데.."

"그러게 말이에요"

"요즘 장사 어려우시죠?"

"네, 말도 마세요. 코로나 이후로 매출이 반으로 줄었어요... 그냥 가게문을 닫을 수 없어서 하긴 하는데, 월세도 안 나와서 보증금도 다 날릴 판이죠 뭐..."

"아. 네..."

"그럼, 손님 또 오세요" 

인사를 남기고 가게 주인은 홀에서 부르는 손님에게 달려갔다.


식당을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데 술기운이 조금씩 올라왔다. 아이들과 아내는 종종걸음으로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뭔가 얼굴에 와닿는 느낌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빠, 죄송해요", 나는 하늘에다 대고 말했다.

내 손에는 언제 들고 나왔는지 모를 OO식당 전단지가 들려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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