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결정을 위한 빠른 포기
2017년 12월 따뜻한 겨울날에 결혼을 하고, 남편의 직장이 있는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런던은 가족여행으로 와봤던 곳이고, 외국 생활도 처음은 아니라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 그다지 감흥이 없었는데 이는 크나 큰 착각이었다. 하루하루 런던에 살면서 런던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고, 이 멋진 도시의 구성원이 되어 그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에게 인정 (recognition)은 꽤 중요한 삶의 요소중 하나인데, 여러 가지 '인정'의 종류 중 일터(work)에서의 인정이 지금까지 가장 보람차고 만족감이 컸다. 자발적으로 회사에 남아 잔업을 마무리하고 집에 가는 길의 그 상쾌한 밤공기가 즐거웠고, 아침 출근길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내 모습이 직장을 관두고 영국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예측 불가한 미래라 삶은 더 흥미진진한 걸까?
내 기대와는 정반대로 일 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난 구직생활만 했고, 잘 안됐다. 너무나 멋진 도시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는 현실이 쓰라렸다. 스스로 꽤 긍정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 반복되는 구직활동과 서류 통과조차 못하는 계속되는 실패들이 날 점차 옭아매는 기분이었다.
결국 런던에서의 생활은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무척이나 짧은 기간으로 잠정 마무리 지어졌다. 남편과 심도 있는 대화를 몇 번 나눈 뒤, 제법 빠르게 런던과의 훗날을 기약하며 우리는 싱가폴로 거처를 한번 더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런던이란 새로운 도시에서 인정을 받아 '커리어우먼'이 되고, 이 멋진 도시에서 발 바쁘게 뛰어다니며 직장동료들과 퇴근 후 펍에서 맥주 한잔씩을 하는, 템즈강을 반찬삼아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오늘 하루의 소감을 나누는 내 상상은 아쉽게도 상상으로만 그쳐졌다. 런던에서의 눈물겨운 취준 생활은 이렇게 짝사랑으로 막을 내렸다.
런던과 싱가폴 두 도시를 두고 몇 가지의 장단점을 비교하며 이사하기로 한 결정적인 요인은 남편과 나, 우리 둘의 '커리어'가 가장 컸다. "항공산업" & "방위산업", 산업군을 더 세분화하자면 Aviation/ Aerospace/ Defence으로 나뉜다. 아일랜드의 더블린과 싱가폴이 업계 시장 규모가 가장 크다. 아일랜드 더블린은 Aviation Finance, 조금 더 민수시장의 항공기 리스 산업에 더 집중되었고, 싱가폴은 지리적으로 Asia-Pacific 사업의 중추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여 보다 더 많은 분야를 아우르는 Aviation/ Aerospace/ Defence의 많은 해외 업체들이 자리 잡은 곳이다. 두 도시 모두 해외기업들 유치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로 바로 외국기업의 세율이 낮은 점을 꼽을 수 있다.
우리는 남편의 커리어와 나의 커리어 그리고 우리 둘의 가족들이 있는 한국과 더 가까운 싱가폴에 더 끌렸고, 런던과 비슷한 렌트비를 내야 한다면 기왕이면 야외 수영장도 있는, 같은 돈으로 더 많은 걸 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싱가폴의 삶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싱가폴에서의 개인 소득세가 더블린보다 더 낮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큰 이유였다.
싱가폴에 이사 온 지 이제 석 달.
확실히 항공산업 시장이 내가 살던 영국의 런던보다 큰 사실을 링크드인 (LinkedIn)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가 지원할만한 일자리 개수의 확연한 차이로 체감하고 있다. 물론 영국도 항공/방위산업 시장이 큰 나라에 속하지만 영국에 기반한 회사들의 위치가 런던에서 한참 먼 지역에 있어 현실적으로 내가 출퇴근하기 어려웠다. 싱가폴은 영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코딱지만 한 나라라, 그 어느 곳이라도 충분히 출퇴근할 만했고 이는 곧 내게 지원 가능한 일자리 숫자로 여겨진다.
그리고 싱가폴에서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히 크다는 점이 정말 맘에 든다. 내 주변 여자 지인들도 여자라면 한 번쯤은 고민할 출산과 육아로 인한 직장에서의 차별/ 손해(?) (단어 선택에 있어 꽤 조심스럽다)는 싱가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앞다퉈 내게 이야기해 주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본인의 커리어와 가정의 양립을 무리 없이 잘 지켜내고 있는 안정적인 사회임이 분명하고, 이 사회에서라면 나도 내 장기적 목표인 '워킹맘'의 꿈을 이제는 비단 꿈이 아닌 현실로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