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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Jung Aug 17. 2024

야간열차

First memory


덜컹거리는 기차 안은 깜깜하고 조용했다. 내 옆에는 큰 고모부가 앉아 있었고, 나는 몇 번이나 터널을 지나며 우리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끔 삶은 계란을 건네주는 고모부 덕분에 그 긴 여행을 견딜 수 있었지만, 내 첫 기억은 차갑고 어두운 열차에 앉아 있는 어린 여자아이로 남아 있다. 그날, 큰 고모부는 나를 당시 기차로 7시간도 넘게 걸리는 전라남도 순천 부근의 작은 마을로 데리고 갔다.



다음 기억은 순천에서 더 들어가 바닷가 근처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댁이다. 두 분은 농사를 지으셨기에 새벽부터 일하시고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나도 자연스럽게 새벽에 일어나게 되었다. 옛날 집이라 바람이 불면 창호지 창 밖으로 귀신이 우는 것 같았고, 화장실은 집 밖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저녁에 그곳에 가는 일은 ‘전설의 고향’을 보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다행히 새벽에는 오강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저녁에는 불빛도 없어서 소리를 지르거나,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며 화장실에 가야 했다.



이장이었던 동네 아저씨 댁에만 있던 텔레비전과 전화기는 우리를 가끔 그곳으로 불러 모으곤 했다. 엄마에게 가끔 전화가 오면 한달음에 뛰어가 보고 싶다고, 언제 데리러 오냐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늘 “한 밤 자면 데리러 온다”라고 했지만, 그 ‘한 밤’은 한 주가 되고, 한 달이 되기도 했다. 어린 나에게 엄마는 온 우주였지만, 이유도 모른 채 시골 할머니 집에 보내진 나는 기약 없이 매일 부모님을 기다리며 지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에 “네”라고 대답하지만, 연락이 없으면 바로 이 사람은 믿을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할머니는 여장부셨지만 남아선호 사상이 강하셔서, 나에게 “고추를 달고 나오지 않아 쓸모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쓸모 있는 아이가 되고 싶어서 무서워도 닭장에 가서 달걀을 가져오고, 닭의 목을 비틀어 가마솥에 넣을 때 할머니를 돕곤 했다. 요리 실력이 형편없던 할머니의 음식도 투정 없이 먹었고, 마루도 닦고 마당도 쓸었다. 물론,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저리 가라”는 소리를 더 자주 들었지만. 엄마가 시어머니인 할머니에게 아들 못 낳았다고 (나중엔 하나 밖에 못 낳았다고) 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나는 착한 손녀가 되어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다.



어두운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를 따라 앞산,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던 기억도 있다. 나는 잔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았고, 할아버지는 대여섯 살 정도 된 나를 위해 작은 지게를 만들어 주셨다. 그것을 메고 나뭇가지를 주우며 할아버지와 함께 산을 오르내리던 시간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가끔 할아버지가 옆 마을에서 술을 받아 오라고 하셨을 때, 캄캄한 저녁에 몇 개 없는 불빛들을 세어가며 주전자를 들고 술을 받아오기도 했다. 오는 길이 너무 무서워 주전자에 있던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며 걸었던 그 기억조차 이제는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어릴 적 기억은 평생을 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이 어떠한가에 따라 자아상도 바뀐다고 한다. 나는 차갑고 어두운 기차 속 버림받은 아이로 남아 있다. 세 살 터울의 언니와 네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지만, 왜 나만 시골 할머니 댁에 보내졌는지 어린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도 내게 설명해주지 않았고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아빠는 첫 딸인 언니가 소중해서, 엄마는 그토록 기대하던 아들이기 때문에, 아무 쓸모없는 내가 보내졌다는 것이었다. 이 생각 때문에 나는 내 삶의 대부분을 무가치한, 사랑받지 못하는, 필요 없는 아이라는 생각 속에서 싸우며, 가치 있고 사랑받고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살았다.



성인이 된 어느 날, 엄마와 내 어린 시절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왜곡되었던 기억이 조금은 바로잡혔다. 예를 들면,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1년 넘게 살았다고 기억했지만, 엄마의 말에 따르면 약 반년을 살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어린 나에게 그 기간이 1년도 더 넘게 느껴졌던 것은 주관적인 사실이다. 부모님이 바쁘셨기에 한 명이라도 할머니 댁에 있으면 부모님이 덜 힘들었기에 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언니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남동생은 아직 젖먹이 아기여서 보낼 수 없었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그래도 아이들을 다 같이 키웠으면 어땠을까,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아냐”라고 묻자, 엄마는 미안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덧붙여 “이제는 성인이 되었으니, 옛날 상처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하셨다. 엄마는 극강의 T임이 분명하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이사야 49장 15-16절



아이를 키우며, 나는 가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갓 딸을 낳았을 때, 밤마다 깨서 딸이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아이가 너무 작아서 혹시 잘못될까 봐 걱정이 됐다. 지금 내 딸은 키도 체격도 나와 비슷해졌지만, 여전히 내겐 아이 같다. 혹시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되고 안쓰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가 일할 때는 딸을 잠시 잊고 일에 몰두할 때가 많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엄마도 바쁜 삶 속에서 나를 시댁에 맡기며 마음을 놓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는 지금도 가족이 헤어져 사는 것을 반대하지만, 이제는 엄마가 나를 잊은 것이 아니라 손바닥에 새긴 존재처럼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 믿는다.



사람은, 비록 내 부모일지라도 내 마음을 다 알지 못하고 내 생각도 모두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나를 손바닥에 새기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는 오늘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사랑과 용납을 보여주지 못한 부모님이지만 그분들 나름의 최선으로 사랑했다는 걸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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