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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Jung Aug 17. 2024

나를 놀렸다!

내면의 상처와 치유 

어릴 적 내 사진을 보면, 대부분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다. 나는 그만큼 자신감과 자기 존중감이 부족한 아이였다.



아빠는 건축업을 하셨지만, 본인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었다. 건물 짓는 과정에서 주인들에게 신경을 쓰고, 인부들을 잘 다뤄야 했기에 항상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그 당시 건축업에 종사하는 분들은 일 끝나고 술을 자주 마셨고, 아빠도 그분들과 술을 많이 드셨다. 술에 취해 들어오시면 가족들을 깨우고, 눈물이 나도록 혼내셨다. 아빠는 자신의 힘든 일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어린 내게는 그저 술주정이었고 폭력이었다. 언니나 동생은 울기만 했지만, 나는 술에 취한 아빠에게 반항하며 대들었고, 아빠는 나에게 '쓸모없는 새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놈', '재수 없는 자식'이라는 잔혹한 말들을 쏟아내곤 했다. 이러한 폭언을 들으며 자라난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아빠를 미워하면서도 나 자신이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되었다.



엄마는 아빠와의 갈등 속에서도 이성적으로 대처하며 기도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애쓰셨다. 하지만 술에 취해 폭언을 일삼는 아빠를 견뎌야 했던 엄마의 삶도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나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여유는 없었다. 내 기억 속 엄마는 항상 기도하는 분이셨다. 어릴 때 나는 금요 철야 예배에 따라가곤 했는데, 엄마는 그 자리에서 늘 눈물로 기도하셨다. 나는 그런 엄마가 안타까워서 옆에서 함께 울다 잠들곤 했다. 엄마의 사랑이 그리웠지만, 엄마는 자신의 삶이 벅차 우리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없었다. 폭풍 같은 밤이 지나고 나면,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묵묵히 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 밤에 일어난 일은 절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우리 가족만의 비밀이었다. 나는 엄마가 차라리 이혼해서 우리 세 남매를 데리고 나가길 바랐지만, 엄마는 가정을 지키셨다. 나는 울기만 하는 언니와 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책임감에 아빠에게 반항하다가 오히려 더 많이 혼나곤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정서적 결핍이 심했던 아이였다. 그래서 늘 사람들의 관심이 고팠지만, 누군가 내게 잘해주고 상냥하게 대해주면 오히려 경계하고 의심했다.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이 나에게 뭔가를 요구할 것이라는 생각에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던 지훈 (가명)이란 남자아이가 어느 날 날 좋아한다고 말했다. 지훈이는 부모님끼리 친구여서 가끔 만나 놀기도 했는데 착하고 순한 아이였다. 지훈이가 날 좋아한다고 말한 날, 내 몸이 얼마나 굳고 화가 났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마치 모든 사람들 앞에서 뺨을 맞은 느낌이었다. 수치심과 분노로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지훈이가 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놀린다고 생각했다. 단 1%도 지훈이가 날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모든 사고는 그 자식이 나를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면 나한테 이따위 장난을 치나 싶어 그 이후로 지훈이를 무시하고 날카롭게 대했다. 훗날 지훈이가 이유도 모르고 내게 미안하다고 울면서 말했을 때, 나는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훈이는 나를 놀리려 했던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그걸 아주 늦게 깨달았다.



나는 내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관심이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나 자신조차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이사야 43장 4절 




대학생이 되어 교회 친구들과 모퉁이돌 선교회의 수련회를 갔다가 내적치유라는 세미나를 들었다. 그때 나는 내가 가장 무섭고, 두렵고, 아팠던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셨냐고 절규했다. 나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고 나만 가장 아픈 사람이었다. 그 절규의 끝에 나는 내 어린 시절, 방 안에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울던 나를 보았고, 나를 감싸 안고 나와 함께 울어주시는 예수님을 만났다. 



지금도 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면, 여전히 '내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야' 같은 자아비판이 먼저 나오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해' '정말 고생 많았어, 잘했어' '이게 끝은 아니야'라고 말해준다. 내가 무언가를 특별히 잘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 자체로, 내가 하나님 눈에 보배롭고 귀하기 때문에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믿는다. 나는 '쓸모없고 재수 없는' 사람으로 살 것인지, '귀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살 것인지를 죽을 때까지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나는 나 자신을 점점 더 비난하고 깎아내리며 살아갈 것이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는 게 어떨 때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말을 믿는 것보다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믿음을 붙들고 매일 살아가고 있다. 



감사하게도, 초등학교 교사인 나는 아이들로부터 "선생님 사랑해요", "선생님 최고예요", "정말 멋져요"라는 말을 매일 듣는다. 아이들의 눈에 가장 멋지고 닮고 싶은 사람이기에, 나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아이들에게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해", "최고야", "정말 멋져"라는 말을 아낌없이 해주고 있다. 이렇게 살다 보면 나도 사랑받기 충분한 존재라는 믿음이 생기고 이 마음이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에게도 흘러가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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