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아빠가 처음이었다
한국에 가끔 가면, 부모님은 이제 많이 나이 들어 예전과 같지 않지만, 여전히 아빠는 가끔 버럭하고 듣기 불편한 이야기도 하신다. 이제는 무섭기보다는 그런 모습이 아빠의 스타일이구나, 아빠는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행동하는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아빠는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는 사교성이 좋았지만 생활력이 부족하셨고, 할머니는 그 대신 밭일을 하며 자녀들을 키우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공부를 잘했던 아빠를 뒷바라지하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일하라고 하시며 아빠의 책을 여러 번 불태우셨다고 들었다. 아빠는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고등학생 시절부터 과외를 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고, 원하는 대학에 낙방하면서 서울의 다른 대학에 후기로 입학하셨다. 이후 공무원이 되었지만 누구 밑에서 일하는 것을 어려워하시고, 결국 당시 붐이던 건설업에 뛰어들어 평생을 '노가다'판에서 사셨다. 건축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으셔서 실수도 많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어깨가 무거웠을 것이다.
할머니는 아빠를 신처럼 떠받들며 동생들까지 모두 먹여 살리리라 기대하셨고, 자녀들을 차례로 아빠가 있는 서울로 보내셨다. 가난한 부모를 둔 아빠는 당시로는 늦은, 서른에 일곱 살 어린 엄마와 결혼하셨다. 당시 엄마가 결혼하자마자 집에 고모들과 삼촌까지 함께 살면서 빨래와 식사를 모두 도맡아야 했다고 하니,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빠는 감수성이 풍부했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삶의 여유가 없었고, 늘 마음의 상처를 누르며 지내셨다. 그 상처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다 보니 술로 달래는 법밖에 배우지 못하셨던 것 같다. 동생들과 부모에게는 바보같이 다 퍼주던 아빠였기에 우리에게도 아낌없이 주고 싶어 하셨지만, 술에 취하면 억눌렸던 감정들이 터져 나와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어릴 때 나는 고분고분한 아이는 아니었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 소위 '깽판'을 부리면, 나는 왜 그러냐고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지르곤 했다. 아빠는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하셨던 것 같다. 언니나 동생처럼 가만히 울기만 했더라면 상황이 조용히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빠의 말과 행동이 부당하다고 느꼈고, 이에 맞서기 시작했다.
언니에게는 새 물건을 자주 사주셨지만, 나는 왜 언니만 좋은 걸 받아야 하나 해서 자주 언니의 물건을 뺏기도 했다. 아빠는 그런 행동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셨다. 아빠는 내 버릇을 고치겠다며 가끔 나를 혼내셨고, 심지어 옷을 벗기고 집 밖으로 쫓아내기도 하셨다. 70, 80년대에는 이런 처벌이 흔했지만, 밤에 혼자 집 밖에 있으면서 느꼈던 공포와 수치심은 내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엄마는 아빠가 잠든 후 나를 조용히 집 안으로 불러들이곤 하셨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아프게 남아있다.
오늘날, 아동보호 개념이 확실해서 이런 처벌은 아동 학대에 해당되지만, 당시에는 그런 행동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체벌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그로 인해 나는 자아 존중감이 바닥을 쳤고, 타인과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를 맺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는 아빠에게 부당함에 맞설 용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렸지만, 내 안에 자리한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은 나를 지켜줬고, 그것이 지금까지 나 자신을 보호하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본인의 공부를 막았던 경험이 있어서 자식들이 공부를 원할 때는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다. 아빠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녀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에, 언니가 대학 입시에 실패했을 때는 나에게 '공부하지 말라'고 하셨다. 언니가 대학에 가지 못했는데 내가 더 좋은 대학에 가면 안 된다고 하셨다. 아마도 아빠는 언니의 실패로 속이 상해 나에게 그 감정을 털어놓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빠가 그런 얘기를 언니가 아닌 내게 털어놓는다는 것이 억울했고, 내가 아빠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아 상처받았다. 그 후 나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기에 내가 부모님께 양가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빠는 우리 가족을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성실하게 일하셨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참아가며 가정을 지켜내셨다. 그 헌신적인 모습은 자랑스럽다. 힘들었을 텐데도 가족 부양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지금도 자식들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줘야 한다고 믿으며 사신다.
하지만 아빠의 그런 헌신과 희생은 때로 나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아빠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몰랐고, 가족들에게 버럭 화를 내거나 때로는 폭언으로 상처를 주었다. 다행히 지금은 술을 끊으셔서 그런 일은 사라졌지만, 그로 인해 우리 세 남매는 낮은 자존감과 불안, 무기력함, 그리고 내재된 분노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아빠는 화를 내고 나면 사과를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거나 선물로 미안함을 대신 표현하시곤 했다. 이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사랑과 상처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이 생겨났다. 아빠는 분명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지만,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평생을 그 상처 속에서 살아오셨다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아빠도 아빠 역할이 처음이었을 텐데, 나는 아빠가 TV에 나오는 양복을 입고 있는 멋진 아빠들과 다르다고 무시하며 상처를 주기도 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 103편 13~14절
난 아빠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십 대와 이십 대를 힘들게 지냈는데, 어느 날, 나 같은 사람도 사랑한다고 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 나는 그동안 용서할 수 없었던 아빠를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며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어떤 노력을 했던 게 아니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죽으면 사라지는, 존재했는지조차 모를 풀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 아빠를 향한 안타까움과 사랑이 생겼다. 지금도 아빠가 버럭 하면 마음이 불편하지만 이제 나도 나이가 드니 아빠와 대화도 하게 되고 서로의 마음을 더 이해하게 된다.
아빠를 단순히 비난하고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의 과거와 상처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빠가 내게 남긴 상처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아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시각의 변화는 내 생각을 넓히고 관계를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나 자신이 성장하고 치유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울컥울컥 올라오는 아픔과 서글픔을 다루는 법을 몰라 힘들기도 했고, 그래서 제대로 살아 보고 싶은 마음은 후에 내가 상담을 공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전히 나는 내 상처를 제대로 인식하고 품어주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는 과거에 마음이 힘들 때나 상처를 받았을 때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습을 하지 않으면, 나도 아빠처럼 갑자기 화를 내거나 남편과 딸, 주변 사람들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매일 감정을 더 건강하게 다루고 표현하는 법을 연습하려고 하고 있다.
아빠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가족을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아빠를 미워하며 힘들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경험을 통해 나를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며, 위로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아빠의 아픔과 상처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빠, 정말 고생 많았어. 고마워.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