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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Mar 05. 2022

영국 사립학교에서는 드라마를 배운다

인생에서 맡은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연기 수업

처음 영국에서 입학 등록을 할 때 작성해야 하는 서류가 참 많았다.

아이의 건강상태에 대한 정보와 알러지 정보 작성 및 메디컬 케어 동의서, 비상 연락망, 야외활동 동의서, 수업 및 활동 사진 활용에 관한 동의서, 그리고 After school clubs 리스트 및 신청서 등등.


방과 후 클럽은 정규 수업시간이 끝나는 3시 45분부터 한 시간씩 운영되며, 요일별로 2~3가지씩의 과목이 있어 원하는 대로 신청하고 들으면 된다. 방과 후 클럽은 전문적인 외부 교사가 진행하며, 과목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1~2학년이 같이 클럽활동을 한다. 1학년이 들을 수 있는 클럽 활동에는 Italian club(요리), Smart Raspberry(코딩), Fencing(펜싱), Ballet(발레), Programmable robotics(코딩?), Mother nature science(과학), Lego club(레고), 그리고 LAMDA(람다)가 있었다.


응? LAMDA? 이게 뭐지?

간단한 설명을 보니 ‘Speech, Drama and Speaking in Public Group lessons’라고 적혀 있었다.

찾아보니 ‘LAMDA’라는 단어는 The London Academy of Dramatic Art’의 약자로서, 원래는 런던에 위치한 현재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총장을 역임하고 있는 유서 깊은 연극학교인데 통상적으로는 여기서 개발된 프레임워크와 커리큘럼을 따르는 일련의 연극 수업 방식을 의미했다.

그리고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서 수업시간 정규 교과목 중에도 ‘Drama’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연인지 의도한 것인지, Drama 수업과 LAMDA 클럽은 같은 요일에 진행이 된다.


학교에서 Drama 수업을 한다는 것이 신기하고 흥미로워서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영국 학교에서 다루는 Drama의 영역은 예술로서의 연기(때로는 노래, 무용도 포함) 그 자체도 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넓어서 대중 앞에서의 말하기(연설), 사람들 앞에서 표정과 몸짓 등 자신감을 표현하는 방법, 표준적인 단어와 억양, 상황에 따른 감정이나 기분,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방법 등의 영역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또한 ‘연극을 통해’ 다른 일반 과목을 공부하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역사 같은 과목을 공부할 때는 물론 심지어 과학 과목에도 역할극을 적용시켜 공부에 활용한다고 한다.)



아이는 Drama 수업과 LAMDA를 아주 즐거워했다. 첫 Drama 수업을 듣고 온 날, 아이는 흥분해서 재잘거렸다. “엄마, Drama가 뭔지 알아요? 그 사람이 어떤 기분일지를 생각해 보고, 한 번 따라 해 보는 거예요. 학교에서 하는 수업들 중 Drama가 제일 좋아요!”

Year1의 Drama 수업 방식은 이러하다고 한다. 먼저 선생님이 짧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 중간중간 잠시 멈추어 아이들과 함께 그 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기분이 어떨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얘기해 본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아이들이 이야기에 나온 주인공이 되어 대사를 주고받으며 연기를 해 본다. 첫날 진행된 이야기는 Peter Rabbit 이야기였다고 한다. 때로는 특정 상황에서 감정을 상상해 보고 표현하는 그림도 그려 본다고 한다.




영국인들은 왜 학교에서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영미권의 토론 중심 문화, 그리고 사회적 역할 수행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들의 가치관, 그리고 자신만큼 타인의 입장도 존중하는 개인주의 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첫째로, 여기는 Speech 중심의 문화이다.


영미 문화권에서는 토론 실력과 대중 앞에서의 연설 능력이 정말 중요하다.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광장에서의 연설과 토론의 문화가 아직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오는 탓일 것이다. 주요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서방세계 각국의 리더는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한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처칠과 조지 6세의 연설, 오바마의 연설,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 축사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유명한 Speech들이 있다. 또한 영국 뉴스나 영화,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의회에서의 피 터지는 토론, 5년마다 한 번씩 볼 수 있는 미국 대선 후보들의 토론 등 곳곳에서 그들의 연설과 토론 중심 문화를 알 수 있다.

반면 한, 중, 일 동양문화에서는 대체로 말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문장력을 높이 치는 것 같다. 우리 문화에서는 광장에서 소리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상류층의 이미지는 쉽게 상상이 안 된다. 전통적으로 글공부가 더 중요했지 말하기를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 리더가 연설로서 대중을 설득하거나 감명을 주는 일이 잘 없고, 대선 토론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조차 듣는 사람들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수준 낮은 토론이 중계되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물론, 최근에는 Western Culture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한국에서도 토론 수업도 많이 이루어지고 Speech 학원도 많아졌지만 이 수업을 받은 아이들이 크려면 아직 한 세대 정도는 지나야 할 것 같다.



둘째로, 영국 사람들은 내면의 충동에 따르기보다 사회적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누구나 살다 보면 하고 싶은 대로 막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기대되는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할 때가 있다. 불편하지만 견뎌야 하는 의식과 절차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기회는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인 영향력이 높아질수록 더 많아진다.

자신의 감정을 정돈하고 적절히 필요한 때 내게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연기력’ 일 것이다. 어떤 때는 자신감을 연기해야 하고, 어떤 때는 겸손함을 연기해야 한다.

물론 내면이 단단하게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꼭두각시처럼 외부에서 요구되는 역할만을 수행한다면 이것 또한 문제가 될 것이다. 때로는 어느 무엇도 아닌 진실된 ‘나 자신’이 될 필요가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난 내 감정과 욕망을 정확히 파악하는 자기 인식 능력이다.

그런데 오히려 '사회적 가면'을 인식하는 경우 역설적으로 진실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다. '페르소나'라는 것을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도 있을 테니.



마지막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기본적으로 연기라는 것은 감정에 대한 공부라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 수업은 공감을 연습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상황에 따른 감정과 반응, 이때의 억양과 말투를 연구하고 공부하면서 일상생활에서 남들과 감정과 입장도 미루어 헤아릴 줄 알고 배려하게 된다.

이러한 공감과 배려는 개개인의 인성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나만큼 남들도 중요하다.'라는 진정한 개인주의 문화가 유지되는 데 필수적이다.


영국에서의 Drama 수업은 이런 필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영국인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영국의 Drama 수업에 관해 조사하다 보니 영국의 계급 문화와 관련된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들 아는 것처럼 영국은 아직 Upper / Middle / Working class로 사회계층의 구분이 남아 있다.)


영국에서 Drama 수업은 일반 State School에서도 정규 교육과목으로 운영되지만 대체로 사립학교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일차적인 이유는 사립학교는 연극 공연을 할 수 있는 강당 등 인프라가 좋고 전문 교사를 고용할 여력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Drama 수업이 역사적으로 Upper Class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교과목이라는 배경도 있다. (드라마 수업에서 다루는 주요 영역 중 하나가 ‘대중 앞에서의 자신 있는 표현과 태도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이다.)

그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사립학교에 다닐 수 있는 Upper Class에서 Drama 수업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된다.


가령, 그들은 대체로 RP 억양을 많이 사용한다. RP란 Received Pronunciation, 즉 ‘후천적으로 획득된’ 발음이라는 뜻이며 수많은 방언이 존재하는 영국에서 가장 표준적이고 품위 있는 발음으로 여겨진다. 때로 상류층이 쓰는 ‘Posh English’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이 아이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연기의 재능을 발굴할 기회가 일찍 생기게 되며, 결과적으로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배출된다. 전체 인구 중 사립학교 출신 비율은 7%에 불과하지만 영국인이 받은 오스카 상의 67%,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자의 42%가 사립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배우 뿐 아니라 문화콘텐츠 산업의 의사결정권자도 대부분 Upper Class가 많다.

이런 상황이 누적되다 보니 이곳에서는 Working Class 출신의 배우들이 공공연히 차별을 받는 일도 있고 그것이 사회적인 이슈가 될 정도이다. 리 올드만은 Working Class 출신으로 영국에서의 차별을 참다못해 헐리우드로 주 활동무대를 옮긴 배우이다. 그가 첫 오스카를 품을 수 있게 된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그는 윈스턴 처칠을 연기했는데, 외국인들은 아무도 몰랐지만 영국에서는 그가 Upper Class 연기를 한다는 것이 화젯거리였다. 또한 킹스맨에서 귀족스러운 젠틀맨 역할이 너무나 잘 어울렸던 콜린 퍼스도 실은 Middle Class여서 그가 ‘킹스 스피치’에서 왕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잠시 영국 영화계 이야기로 샜지만, 다시 Drama 교육 얘기로 돌아와 보자.


Drama 교육이 추구하는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경우, 한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내면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외부에서 기대하는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고 다양한 위치에서 필요한 사회적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방식까지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의 입장에서, 비록 짧은 1년의 기간일 뿐이지만 아이가 여기서 받는 Drama 수업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의 일부분이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좌절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던 엄마와는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것은 엄마의 욕심일 뿐 사실 8살짜리 아이에게 1년의 경험으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아이에게는 선생님과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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