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여든 이후, 삶이 이야기가 되다

6. 정자씨 이야기(3)

by 유정인

이해와 수용, 평화의 자리


결혼생활은 내내 순탄치 않았다. 남편의 집착, 오랜 경제적 궁핍, 아이 없이 살아온 긴 세월. 정자씨에게 결혼은 때로는 인고의 시간이었고, 때로는 외로움의 그림자였다. 오래 한 지붕 아래 살아온 나날 속에서, 그녀의 마음에는 어느 순간부터 미묘한 변화가 피어났다. 남편의 말투와 눈빛,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 어딘가에서 낯선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분노나 원망이 아닌, 조용한 측은지심이었다.

‘그도 참 고단했겠구나…’

그 깨달음은 서서히 그녀의 마음을 풀어 주었다. 남편 역시, 자라오며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품에 안겨본 기억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쩌면, 아내에게 그 결핍을 기대하며 서툰 방식으로 표현하려 했는지도 몰랐다. 그 생각에 마음 한켠이 잔잔해졌다. 평화가 비로소 그녀 안으로 스며들었다.


마지막까지 누군가에게 쓰이기를


정자씨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 남동생은 평생을 함께한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부모를 일찍 잃은 후, 서로를 의지하며 외로움과 결핍을 견뎌온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는 동생마저 주 3회 신장 투석을 받으며 몸과 마음이 지쳐, 최근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가오는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남은 시간을 가능한 한 함께 나누려 애썼다. 정자씨는 자신에게 남은 삶이 점점 짧아지고 있음을, 그리고 죽음이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님을 실감하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내적 공간을 천천히 마련해 갔다. 놀랍게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삶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평생 받았던 도움과 배려가 떠올랐다. 말없이 건네진 따뜻한 밥 한 끼, 손을 잡아주던 짧은 순간들, 작은 웃음과 위로.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따스한 빛을 발하며 스며들었다.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돌려주고 싶다.'

그 마음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깊이 체득한 삶의 결론이었다. 정자씨는 자신이 작더라도 의미 있는 존재로 남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며, 삶을 이어가는 따뜻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녀가 걸어온 길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남은 여정 속에서도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빛으로 스며들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마음이야말로, 그녀가 남기고 싶은 가장 소중한 흔적이었다.


정자씨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겨울이 채 끝나지 않은 2022년 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바람이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공기 속에는 차가운 겨울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날은 그녀가 치료받는 날이었다. 병원 진료가 끝날 시간에 맞춰, 나는 암 병동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조용히 다가온 그녀는 늘 그렇듯 단정했다. 작은 체구에 연회색 코트를 입고, 화사한 핑크빛 머플러를 두른 모습은 차분하면서도 따스함을 풍겼다. 반백으로 곱게 정리된 머리, 연하게 화장한 얼굴은 환자라기보다, 오래된 삶의 계절, 겨울을 묵묵히 견뎌낸 사람의 평온함이 스며 있었다.

그녀가 내게 보호자 명찰을 건네고 나서 병동 로비로 들어가자, 나는 뒤따라 들어가서 체온을 측정하고 간단한 인적 사항을 적었다. 병원 로비에 앉아 그녀를 마주하자, 사람들로 북적이는 풍경과 달리 정자씨의 존재만이 고요하게 느껴졌다.그녀의 말보다, 말과 말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더욱 많은 것을 전했다. 그것은 소리 없이, 삶 전체를 휘감는 물결처럼 무겁고 깊었다. 겨울의 끝자락,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조용히 그녀의 마지막 계절을 함께 걸었다.

"새로운 임상실험으로 항암치료를 하자고 해서 동의는 했지만, 처음부터 실험으로 치료된다는 기대보다는

실험에 참여하여 후일 다른 환자 치료에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다른 사람이 잘 치료받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이 컸지요."

수년간, 그녀가 혼자 장시간의 정맥주사를 견뎌야 했던 항암치료 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힘겨웠을 것이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한 줄기 실처럼 가느다란 희망을 품었으리라. 남편 없이 홀로 보내는 시간 속에서 남편 걱정과 자신의 건강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남편의 마지막을 지켜주겠다는 소망이 그녀의 마음을 붙들었을 것이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이제 그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왔다. 나는 그녀 앞에 앉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 늘 남편을 돌보아온 정자씨는, 남편의 장례를 다 치른 뒤 자신이 따라가는 것이 도리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순서가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녀는 이미 마지막 준비해두었다. 현재 치료받는 병원에 자신의 뇌를 알츠하이머와 치매 연구용으로 기증하기로 한 상태였고, 사후 병원에 연락하면 장례 절차까지도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조치해두었다.


"나는 이제까지 사회의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아요. 그래서 나도 세상에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시신, 장기기증이었는데, 병이 있는 사람은 안된다 해서 실망했어요. 다행히 뇌기

증은 연구에 필요하다고 해서 기증했는데 치매 연구에 도움이 된다니까 작은 보답을 한 거라 보람을 느껴

요. 선생님이 하는 이 인터뷰에 동의한 것도 그런 마음이고요."

그녀의 말에는 담담함 속에 묵직한 결의와 온기가 배어 있었다. 스스로 내려놓는 동시에, 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작은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죽음 앞에서도 삶을 품고, 그 끝에 또 다른 의미를 세우려는 그녀의 태도는,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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