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나이 듦의 언어를 찾다

by 유정인

노화는 쇠퇴라기보다 오히려 사회적 지평을 확장하고,

인내심을 강화하며,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를 성숙시키는 과정이다.

-조지 베일런트 (G. Vaillent)-


2011년 늦가을, 석사졸업을 앞두고 나는 노인자살예방 상담사 지원을 위해 B 노인종합복지관으로 향했습니다. 언덕길을 오르고 나서 숨을 고르며 뒤돌아보니, 길 위에는 노란 은행잎이 깔리고 단풍잎이 드문드문 빨간 점처럼 보였습니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보니, 얼마 남지 않은 노란 잎 사이로 파란 가을 하늘이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완연한 가을이구나.’

나이가 들수록 단풍은 점점 더 아름다워 보였고, 때로는 꽃보다 깊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복지관 주차장, 버스에서 내린 노인들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느린 걸음, 굽은 등, 말없이 묵묵히 걷는 모습. 성지순례 행렬이 떠올랐고, 내 안에 감동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날의 감동은 내가 노인 상담과 연구를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나의 할머니는 1884년 조선시대에 출생하였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고종황제가 승하하여 할머니도 머리를 풀고 곡하였다고 종종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중심은 늘 집안의 최고 연장자인 할머니였습니다. 성품이 엄하여 동네에서도 ‘호랑이 할머니’라 불렸습니다. 어른 공경이 철저했던 시절, 중요한 결정권도 모두 할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장수하는 노인의 존재 자체가 존경의 상징이었기에 명절마다 우리 집은 문안 오는 친척들로 가득 찼습니다. 며칠씩 이어지는 방문객을 맞아 음식 대접으로 분주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할머니는 이른 새벽이면 몸단장을 마치고, 늘 화투로 그날의 운세를 쳤습니다. 그리고는 할머니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습니다.

“막내야~ 이리 와라.”

글을 모르던 할머니에게 화투는 유일한 취미이자 낙이었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며 가보면, 낡은 국방색 담요 위로 알록달록한 화투짝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취학 전 어린 나는 당시 70세가 넘은 할머니의 유일한 화투 상대였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수학적 감각은 어린 시절 화투를 통해 길러진 듯합니다. 부모와 형제들이 일터와 학교로 향하면, 나는 종일 할머니 곁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할머니는 아흔여섯 해를 살다 가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드물게 장수한 어른이었지요. 그러나 그 긴 세월은 무료함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동년배 친구나 친척은 없었고, 자녀 셋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경노(敬老)라는 이름으로 집안일에서도 배제된 채,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화투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외출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부엌일이나 가사에 참여했던 기억도 없습니다. 나 역시 학교에 입학하자, 할머니 혼자 화투를 치곤 했습니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점차 사그라드는 권위를 애써 붙들고 계셨던 모습은 어린 제 눈에도 몹시 무료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은 제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습니다.

‘인생의 끝자락을 무엇으로 사는가.’

결국 저는 그 답을 찾아 나서는 길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노인의 4가지 고통¹¹ 가운데 무위고(無爲苦)가 있습니다. 무위고는 하는 일이 없어 느끼는 고통으로 하루 이틀 아닌 긴 시간을 할 일 없이 지내며 느끼는 ‘무료함’이란 감정입니다. 할머니의 노년을 곁에서 지켜보며 나는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노년을 괴롭게 하는 가장 첫 시작은 ‘할 일 없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릴없는 긴 생이 고통이라는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나이 듦의 언어’를 찾도록 이끕니다.

노인은 많은 나이만큼 세월을 통해 쌓아온 기억과 경험, 그리고 아직 다하지 않은, 가능성을 품은 존재입니다. 그것은 견딤의 언어, 기다림의 언어,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기답게 살아가려는 언어입니다. 화투짝을 맞추던 할머니의 손길처럼, 때로는 하릴없이 느껴지는 작은 행위도 한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의미가 됩니다. 미완 속에서 자기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이 듦의 진정한 완성이 아닐까요?

그날, 복지관으로 향하는 노인들의 행렬이 제게 준 감동은, 바로 그들이 자기 언어로 삶을 다시 쓰려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살아있음을 너머 자기만의 창조 행위였습니다. 삶의 무게와 시간의 흔적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관계를 다듬고, 의미를 찾아 나섭니다.

우리는 자주 ‘백세 시대’를 말하지만, 정작 여든 이후의 삶이 어떤 결을 띠고 있는지, 무엇을 잃어가며 무엇을 붙들고 살아내는지에 대한 길잡이는 부족합니다. 통계는 말합니다. 2022년 80세 이상 인구는 전체의 3.9%였고, 2040년에는 10%에 이를 것이라고. 여든 이후의 존재는 통계표 위에 머물러 있을 뿐, 그들의 목소리와 체온은 지워져 버립니다. 숫자는 단지 비율과 곡선을 그려낼 뿐, 하루를 살아가는 노인의 숨결과 고독, 사소한 기쁨과 느린 절망을 전해주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초고령 노인은 스스로 타임라인을 새로 써 내려가야 합니다.


전 생애 발달론은 인간이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한다는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성인기의 발달은 특정 시기나 단순한 일회성이 아니라, 생 전체를 아우르는 흐름입니다. 삶의 마지막 장, 여든 이후에도 이 흐름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겉으로는 우연처럼 보이는 활동조차 시간을 거쳐 필연으로 이어진 이야기가 됩니다. 여섯 명의 삶 밑바닥에는 종종 절망과 좌절의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은 단지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에릭슨이 말한 것처럼, 정체성을 온전히 확립하기 위해서는 위기의 극복이 필수적입니다. 위기는 그들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게 한 동력이었습니다. 그들은 고통을 말하면서 동시에 고통을 재구성했습니다.


그들의 말에서 ‘아픔’은 더 이상 파괴의 기호가 아니라, 삶을 다시 쓰는 문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심연을 지나, 통합의 빛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스스로 초월하며 내면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고통을 직면하는 용기 그리고 그 속에서 의미를 포착하고 다시 일어서는 힘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 안에서 길을 찾고, 의미를 새기며,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를 채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4장 마지막 장을 연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