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마지막 장을 연출하다

5. 세상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려는 조용한 발자취

by 유정인

5. 세상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려는 조용한 발자취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 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노래 `나 가거든’ 가사 일부-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

94세까지 진료하며 생의 현장에서 떠나간 내과 의사 한원주가 남긴 마지막 인사입니다. 그녀의 뒷모습은, 가진 것을 모두 나누고 가을 길로 떠나갔던, 한 생의 실루엣으로 남았습니다. 40년간 의료봉사와 무료 진료로 이어진 여정은, 세상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채워진 길이었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흔적은 가을 하늘처럼 오랜 여운으로 남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약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던 김수환 추기경은, 섬김을 위해 선택한 성직 속에서도 자신이 과도하게 섬김받은 걸 속죄하기 위해, 노후의 불면과 질병조차 기꺼이 품으며 인자한 미소와 깊은 사랑을 남겼습니다. 그는 임종 전 2년간 입·퇴원을 반복하며, 생명 연장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도록 당부하여 존엄한 죽음을 마쳤습니다. 장기기증 서약에 따라 선종 직후 안구 적출 수술은 존엄사와 생명 나눔의 사회적 담론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자유와 사랑, 겸손과 봉사의 실천, 선행과 화해였습니다.


청자씨의 마지막 소망은, 자신의 이름을 그림 속에,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붓을 들 힘조차 없어졌지만, 그녀는 자신의 꿈을 타인에게 이어주려 했습니다. 화가의 길을 걸으며 자신을 마주한 그녀는, 생의 마지막에 정신적 유산을 남기기 위해 사단법인 설립을 추진하며, ‘사랑’을 남기려 합니다.

학산씨는 가족의 역사와 전통을 자서전에 담았습니다. 손자의 격려와 응원 속에서 그는 조상들의 무늬를 기록으로 이어갔습니다. 30여 권의 노트는 이제 책 두 권에 담아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후손에게 조상의 얼을 남기며, 저세상에서 조상과 마주할 준비를 합니다.


철수씨에게 삶의 흔적은 해마다 받은 봉사 상장과 상패입니다. 죽는 날까지 선행을 이어가는 소망을 이루고 그는 소천하였습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여정에, ‘봉사의 실천’으로 남은 상장은 삶의 흔적이자 존재의 증거가 됩니다.

정자씨는 삶의 빈자리를 경건하게 채우며 떠났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며 완성된 그녀의 생은, ‘보답하는 삶’으로, 마지막 감사의 마음을 뇌 기증으로 흔적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합니다. 그것은 삶의 종착역에서 의미를 되묻고, 흔적을 통해 존재의 깊이를 확인하려는 열망입니다. 누군가는 자손으로, 또 다른 이는 글과 그림, 혹은 봉사와 같은 행위로 자취를 남깁니다. 여든 이후에는 생존 그 자체가 존재의 깊이를 품습니다.

학산씨의 기록 노트, 영미씨의 조용한 기도, 철수씨의 봉사 상패, 정자씨의 남겨진 프로필 사진-이 모든 것은 ‘내가 여기 있었노라’라는 존재의 선언입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따뜻하고 단단합니다.

‘내가 다녀간 이후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렇게 흔적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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