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길로

쌀집막내

by ullia

버스를 탔다.

볕이 좋은 날, 졸음조차 달다.

줄곧 꾸벅거리다 버스가 급정거를 하고

머리를 박기직전... 버티어냈다.

그 순간 손님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공교롭다.

산다는 것 또한 그럴 때가 많지 않은가!


형제뿐만 아니라 남매도 많이 싸운다고 한다.

둘째 오빠와 언니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위에서 싸우니 나는 조용히 있어다.

오빠들은 아버지한테 맞아가며 컸지만 언니와 내가 매를 맞는 일은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언니는 연애를 했다.

고3 야간자습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센치한 도덕선생님은 Perhaps Love를 내보냈다.

답답한 밤공기가 상냥한 레임으로 바뀌다.

언덕길을 내려오다 보면 언니는 남자친구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모로 나는 형제들의 안전창구다.

저희들 필요에 따라서!

언니의 연애상대가 탐탁지 않은 아버지는 어느 날 벼르던 화를 터트렸다.

니는 어디를 맞았는지 코피로 옷을 적셨고,

나는 언니가 불쌍해 무작정 대들었다.

아버지가 그랬다.

옳은 말이 말대답이라고.


산 넘고 물 건너 내가 대학 1학년 종강 직전 언니는 시집을 갔다.

월급 이외의 돈이라고는 없는 형부가 중위

계급으로 바뀌는 순간 아버지는 서울 이태원동 그

어디 쪽 20평쯤 되었을까 아파트, 그 집의 방 하나를 오백만원에 얻어 주었다.

아주머니와 딸만 사는 집라고 했다.

언니는 화장실이 하나라 그게 좀 불편하지만 괜찮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한두 달에 한 번쯤 반찬을 날랐다. 그러면 형부가 밥을 사줬다.

맛있었다.

원래 가난한 집 밥이 더 맛있는 거라고 언니가 말하며 웃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다.


내가 대학 2학년때는 첫째 오빠가 장가를 갔다.

서울아가씨이며 친정이 부자이고, 피아노 선생님이라 했다.


내가 대학 3학년때는 둘째 오빠가 장가를 갔다.

조합장까지 지낸 고향 친구의 딸이며 중학교 서무실에 근무한 아가씨며, 뼈대 있는 집이라 보고, 배운 게 많을 거라 했다.


바라던 대로 짝을 지워줬으니 아버지와 엄마 바람대로 되는 걸까?!

내 기억으로는 엄마입에서 산너머 산이라는 소리를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때이기도 하다.


첫째 오빠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녔으니 어차피 손님이었고 둘째 오빠네는 큰아이를 낳고 분가했다.

어려서부터 징그럽게 싸웠어도 우리는 형제다.

원수 같아도, 엄청 서운해도, 뒤돌아서면 잊는다.

오히려 미안하며, 불쌍해진다.


그렇게도 끈적끈적했던 우리는 아주 넓은 의미의 우리 되는 길로 스스로 걸어갔다.

거기에 새언니는 정체불명의 강력한 인물이 당하게 서 있었다.


큰언니는 손님 같아서, 맏이라서, 어려워하는 엄마의 처사가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렸고,

둘째 언니는 돈이 생기면 남편옷이 아닌 본인의 옷을 사니 얄미웠다.

이 마음은 둘째 오빠를 향한 내 짠한 감정 때문이기도 했다.

엄마는 듣는척하다가 못을 박는다.

그래서, 오빠네가 헤어지라?!

서운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일 년이 12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제사가 명절 포함 6번과 김장하는 날!

서울은 장거리 운전하며 다닐 필요 없다며 명절에나 다녀가라 했고, 김장 또한 나름의 혜택을 주었다.

옆동네 사는 둘째 며느리는 점점 엄마가 불공평하다며 입이 나오기 시작하고 슬쩍 덮어놓았을 뿐 불화가 솔솔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가끔 그랬다.

아무래도 가까이 사니 가져가는 것은 많은데 한 번도 빈통을 안 보내, 작은애는.

둘째 편에 뭘 보내도 잘 받았다는 말도 없고, 참.


곰이 낫냐

여우가 낫냐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일 것도 없다.

가족이니 한번 싸우고 나면 제풀에 스르르 녹는다.

술자리 한번 만들면 이○끼, 저○끼 하며 서로 제가족 편드는 똑같은 것들끼리 웃다가 마는 것이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우리는 끝나는데, 새언니들의 불만은 정작 자신의 울타리로 옮겨가서 정한 화를 퍼내는 것을 후에 알았으며, 내 울타리에서도 똑같았다.

왜 그랬을까.

아이들 울음 끝도 짧아야 좋다면서, 정작 본인의 불만은 질질 끌고 가는 어리석음을 수도 없이 저질렀다.


한 번은 제수씨가 엄마한테 따지더라.

형님네는 새 통에 담아주면서 왜 우리는 헌 통에 담아주느냐고!


엄마가 그랬다.

40대가 된 새언니들 보고 중늙은이라고.

엄마가 슬쩍 말했다.

저것들이 나이가 들었다고 나한테 대들더라.


말은 그래도 새언니들이 그런 사람들은 아니다.

엄마의 웃자는 얘기의 뒤끝은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서운함이 맺혀 있을 뿐이다.


91년생 큰아이를 둔 내가 92년생 둘째를 낳자 엄마가 한 달에 한번 이것저것 온갖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그리고 1박 2일 동안 엄마의 딸을 배부르게 먹이고 갔다, 왔다, 1년을 반복했다.


너 생각하면 시간이 얼른 가야 는데

아빠생각하면 아니고...

녹천역!이었다.

두 돌도 안된 큰아이를 걸리고 돌도 안된 아이는 업고 녹천역에 서서 엄마를 맞이하고, 배웅했다.

녹천역은 옛날 그대로려나...


단지 오가는 말 한마디가,

별것도 아닌 그 한마디가

가정의 평화 거나, 불화 거나!

참, 별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세상에 꿈도 꿔본 적 없는 인물들이 시집을 가니 있기는 했다.

나도 그 인물 중 하나였을까?


늙어서 이제는 화가 녹아버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큰 새언니는 이제 세상에 나온 첫 손주의 어디가 막내아가씨를 닮았다고 했다. 이쁘단다.

큰언니가 날 좋아하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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