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집막내
그때는 국민학교였다.
4학년 때 번화한 시내로 이사를 왔다.
지금은 빵집 대명사가 된 성심당 도보 10분 거리!
전학 간 학교에서 혼자 뚤래뚤래거리며 새집을 찾아왔다.
지금 우리 집 손자 아이는 걸어가면 이십 분 정도 거리를 가급적 차로 데려다주는 걸 보면 우리 클 때가 훨씬 자립적이었나, 아니 시계가 좀 여유 있게 째깍거렸다.
역시 전면은 가게가 있고
옆 철대문이 있지만, 가게로 쑥 들어가면 쌀집이 우리 집이다.
그때는 쌀을 됫박으로 한되, 두되, 아니면 반말, 한말, 반가마니, 한가마니 그런 단위로 팔았다.
이쪽저쪽 얼쩡거리다 엄마옆에 쪼그리고 앉아 됫박으로 쌀을 담다, 쏟다, 지루해지면 '뉘'라고 정미가 잘 안 된 것들을 골라내기도 했다.
참을성 있게 잘한다고 칭찬도 많이 받았다.
칭찬받기 위해 저리는 다리를 참아냈을 나를 떠올리니 좀 귀엽다.
가게 안에 정면으로 난 방이 안방, 건넌방으로 이어져있었고 건넌방으로 이어진 대청을 지나면 오빠 둘의 방이 있었다. 그리고 가게 한쪽으로 여분의 방이 있었다.
한 번은 포도가 먹고 싶다고 심통 부리다 가게 옆방에서 잠들었던지, 불덩이가 되었던지,
다음날 엄마는 딱 한송이를 사줬다. 누가 뺏어먹을까 싶어 대접채 들고 혼자 다 먹었다.
검게 빛나는 윤기! 맛있었다.
현재 63세의 나는 여전히 포도를 좋아한다.
언니,
아무리 아들선호 시대라 해도, 아들 셋을 이어 딸이라니, 이쁨 받을만하다.
집에서는 새침한 공주님이었지만 밖에서는 야무지게 잘 놀았으리라 짐작한다.
다들 자매끼리 옷 때문에 싸우고, 싸우고, 싸운다는데 우리는 평화로웠다.
취향이 극과 극이었다.
아! 한번 있지만, 언니는 마음이 약해서 울었고
나는 독해서 안 울었다.
혼자 발악을 하다 우는 언니를 보고 미안하단 마음이 들었다. 말대신 쑥스러워서 괜히 더 씩씩거리는 채하다 말았다.
지금도 내가 더 독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나보다 순한 언니는 계속 사모님으로 살며 가족 뒷바라지를 성실히 하고 있다.
그 또한 사연이 많으며, 쉬운 인생은 없다.
독한 나는 사회의 격랑을 적당히 겪었으며 지금은?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눈뜨면 아침이고
사부작거리다 보면 잔다.
시속 150은 밟고 있는 느낌?!
언니는 지금도 말한다. 우리 집은 열린 집이었다고.
장사를 하니 낯설거나, 낯익거나 꾸준히 사람들이 오갔다.
장사를 제일 못하고 안 할 것 같은 내가 막막한 순간
고민 없이 장사를 한 것도, 그 장사가 할만했던
것도 이시절에 체득한 사람을 향한 진정성이라 생각한다.
장사집은 사람이 있어야,
가게 앞에서 노는 아이들 이쁘다 하고,
노인네(노점상)가 뭘 팔아도 그냥 두라고 했다.
엄마가 장사하는 법이며,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가게에 면한 안방은 사랑방과 같아서 아버지 친구분들은 거기에서 화투를 치거나, 아주머니들은 얘기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파도를 탔다.
지금은 사라진 일이지만 시골에서 ○고기를 보내오면 엄마는 마당 한쪽에 가마솥을 걸었다. 모르고 먹으니 평범한 음식이었다.
일 년에 한 번쯤 있는 이날은 아버지 친구분들이 엄마의 진수성찬을 먹는 날이었다.
아저씨들 얼굴이 흡족한 빛으로 반짝였다.
그런데 막상 음식을 만드는 엄마는 입에도 못 대었다.
시골 살 때야 가마솥으로 밥을 했다지만 도시로 온 뒤로는 쌀집 밥솥도 평범한 가정집 밥솥이 되었다.
부엌에 난로가 있었고 그 난로로 떡도 찌고 밥도 했다.
하얗지도, 잿빛도 아닌 그 시절 대개의 부엌에 있던 솥 아니었을까!
그렇잖아도 사람이 넘실거리는 집에 첫째 오빠는 친구들을 참 많이 데려왔다.
끊임없이 꾸준히 왔다.
그런 날은 밥솥채 방으로 들어왔다.
오빠 친구들 중 하나가 언니를 무척 좋아했다는데, 결국 용기 없어 끝났다나...
그리고 내 친구들.
나는 극단적으로 내성적이며 속모를 인간이다.
새 학년 올라갈 때마다 겨우 1-2명의 친구로 일 년을 났다.
심심하다, 외롭다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안에 있으면 밖을 바라보고, 밖에 있으면 안을 바라보는... 이쪽의 바깥을 무심히 선망하는지도 모른다.
멍하니 공상인지, 망상인지 그러다 저녁에 감고잔 머리가 삐쭉거려도 내 눈에는 안 보이는데 친구들 눈에는 보였다.
머리가 뻗쳤어!
그런 내게도 여고시절만큼은 3-4명 정도로 친구가 늘었다.
공교롭게도 그 아이들은 모두 유학생이었다. 서천, 광천, 홍성등에서 나름 우수한 아이들이 온 것이다. 꿈과 희망을 짊어지고!
친구들 자취방에서 밥 얻어먹고
우리 집에 데려와 밥 먹이고
여고시절 추억의 전부이다.
엄마는 항상 밥을 줬다.
맛있게 잘 차려주었다.
친구들이 날 보고 밥을 정말 잘 먹는다고 했다.
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흰쌀밥이다.
엄마는 한 번도 다른 얼굴을 한 적이 없다.
흔연히 웃으며 맞이하고 언제든 또 오라 했다.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밥 하는 사람은 안다.
내가 중학생 때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눈뜨고 보니 여고생 언니는 얼굴도 예쁜데 머리도 쏙 잘 말려있다. 나는 우리 엄마가 열심히 먹인 보약발로 토실토실 살이 올라있어 눈도 작아지고 얼굴도 펑퍼짐하고, 머리는 뭐냐고!
한술 더 떠 엄마와 언니는 아예 풍년두부라고 놀리는데 재밌다고 같이 웃었다.
대개는 살아가는 자신의 범위, 구역, 한계가 있어 보고 싶은 대로,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해 버린다.
그 덕에 부모 울타리에서 잘 먹고, 잘 놀았다.
우리 엄마 밥 자신 분들,
쌀집 밥이니 쌀은 최상급,
솜씨 좋으니 김치까지 꿀맛
사는 어느 순간 따뜻한 위로가 되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