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즉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개월간의 휴직을 결정하고 잠시 서울집을 떠나게 되었다. 3개월 동안 집을 비워두기 아까워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나 3개월 동안 한국에 없을 예정인데, 우리 집에서 잠깐 살아볼래?” 친구는 망설일 것도 없이 승낙한다. 평소 자취에 대한 욕망을 항상 드러내던 친구였는데, 경제적인 사정상 아직 독립하지 못한 친구였다. 내 짐은 빼지 않고 에어비앤비처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나도 짐을 빼기에는 부담이었고, 친구도 3개월을 살자고 새 짐을 사는 것은 부담이었다. 하지만 막상 친구가 들어와서 3개월을 지내려면 옷장, 서랍장, 욕실장, 주방장, 냉장고정도는 비워줘야 했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2년 6개월 동안 견고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들의 위치가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냉동실을 비우기 시작했다. 쟁여놓은 빵들, 소스들, 유통기한이 지난 주먹밥, 가공식품들.. 평소에 잘 먹지 않는 음식들로 냉동실은 채워져 있었다. 평소 파스타를 즐겨 먹지 않는 내가 왜 파스타소스는 두 개나 쟁여두었으며, 빵순이도 아닌 내가 왜 이렇게 빵을 냉동해 놓고 마음을 든든히 했는지. 그렇게 하나하나 먹어 ‘치우다가’ 끝내 처리하지 못한 것들은 음식물 쓰레기가 되어 나의 마음을 죄책감으로 가득 채웠다. 다음으로는 주방서랍장. 내가 라면을 많이 먹기는 하지만 이렇게 라면이 쌓여있을 일인가? 종류별로 쟁여놓아서 이미 몇 개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있었다. 괜히 편의점에 갔다가 한 봉씩 사들고 나와서 먹지는 않고 쌓여있는 과자들. 이사 오면서 엄마가 챙겨주었던 일회용 청소포는 한 번도 쓰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었으며, 좋아 보인다 싶으면 일단 사고 봤던 영양제들은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배송비를 아끼겠다며 쟁여두었던 커피캡슐은 커피를 자연스레 줄이게 되면서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하게 남아있었다. 이 집에서 사는 동안 딱 한 번 쓴 믹서기까지. ‘내가 믹서기를 안 쓰는 사람이구나…’라는 대단할 것도 없는 생각을 특별한 성찰을 한 것처럼 되새겨본다.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했던 말이 이제야 다시 떠오른다.
“언니네 집에 있으면 전쟁 나도 이것들만 먹으면서 한 달은 살 수 있을 것 같다.”
심란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욕실로 향한다. 올리브O에서 세일한다고 해서 괜히 두 개씩 집어 들었던 화장품. 당시에는 어차피 쓰던 제품이니까 언제가 쓰겠지 했지만 한 통을 다 쓰는 데는 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이O에서 마구 사들인 청소용품. 선물 받았지만 쓰지 않고 있는 핸드워시, 초파리를 잡는데 좋다고 해서 샀지만 뜯지도 않은 리스테린. 하나하나 박스들에 집어넣으며 이 정도면 양호하다고 생각하며 눈앞에 무엇이 펼쳐질지 모른 채 침실로 들어선다.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몇 년째 쓰지 않는 명품가방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가방은 더 이상 가방의 역할을 하지 못한 지 오래고 이제는 상자화되어 수많은 잡동사니들이 쑤셔 넣어있다. 여행 갔다가 줄 사람을 정하지도 않은 채 ‘누군가’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사들인 기념품. 쓰지도 않지만 처리하기 귀찮아서 눈앞에서 치워버리자 싶어 들어간 수많은 작은 물건들. 옷장을 열어보니 한쪽에는 매일 습관적으로 돌려 입는 옷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최근 1-2년간 한 번도 입지 않았지만 버리기엔 아까워 그냥 모셔둔 옷들이 옷장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에서 브랜드 원피스가 세일을 해 사 왔다가 막상 한국에 돌아오니 비슷한 옷이 있어 택도 제거하지 않은 채 걸려있다. 이 원피스를 보니 여행 갔다가 브랜드 구두를 한국보다 싸게 살 수 있다는 말에 괜히 평소 신지도 않는 스타일의 구두를 사서 모셔놓은 신발장이 생각나 머리가 지끈해진다.
얼마 전 가끔 듣는 팟캐스트에서 책 <물욕의 세계> 역자가 게스트로 나와 평소 끊임없이 소비하고 물욕 가득한 이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한 호스트는 꽃 선물을 받고 꽃집에 가서 꽃병을 소비하였지만, 이후로 단 한 번도 꽃병을 쓰지 않은 이야기, 다른 한 분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자꾸만 사게 되는 캐릭터 볼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들으면서도 정말 많은 생각을 하였지만 이번에 집 정리를 하며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나에 대해 많이 알아가고 있다고 싶을 때쯤 다시 한번 나는 아직도 나를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물건에 대해서 왜 이렇게 까지 집착을 하고 있는지. 2주 전에는 안 읽는 책들을 모두 중고서점에 처분하였고, 지난주에는 안 입는 옷들을 나눔 하였다. 해야지, 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던 물건들은 드디어 당O마켓에 업로드가 되었다. 하 나 하 나, 정리를 해가며 조금씩 나를 내려놓는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며 미니멀리스트 관련 책을 사던 과거의 나와는 조금 멀어지기로 결심하며, 아직 갈길은 멀었지만 출발선을 나가본다. 마침 오늘 이른 오전, 자고 있는데 오피스텔 경보음이 울린다.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즉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즉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작동인 것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눈을 감으며 생각한다. ‘정말 이 물건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들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