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가 허용되는가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버락 오바마 캠프의 이메일 팀은 기묘한 실험을 진행했다. 같은 내용의 기부 요청 이메일을 여러 가지 제목으로 보내본 것이다. “변화를 위해 함께해주세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Hey”라고만 쓴 이메일. 결과는 놀라웠다. 가장 많은 기부금을 이끌어낸 것은 “Hey”였다. 마치 친구가 보낸 것처럼 느껴지는 이 한 단어가 수백만 달러의 차이를 만들었다.
이것은 설득인가, 조작인가?
선거 캠프는 유권자를 속이지 않았다. 거짓 정보를 퍼뜨리지도, 협박하지도 않았다. 단지 사람들이 이메일을 열어볼 확률이 높은 제목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히 심리적 트릭이 작동했다. 친밀감을 가장하여 경계심을 낮추고, 그 틈을 타 기부를 유도한 것이다. 받는 사람은 자신이 왜 그 이메일을 열었는지, 왜 기부 버튼을 눌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우리는 매일 이런 경계선 위에 서 있다. 광고는 제품의 장점만 부각하고 단점은 숨긴다. 정치인은 통계를 선별적으로 인용한다. 세일즈맨은 “오늘만 이 가격”이라며 시간 압박을 가한다. 연인은 상대의 감정을 움직이기 위해 눈물을 흘린다. 부모는 아이에게 “착한 아이는 그렇게 안 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설득인가, 조작인가? 그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2,400년 전 아테네로 돌아가야 한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는 말의 도시였다.
민회에서 시민들은 직접 연설하고 투표했다.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는 배심원들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다. 변호사 제도가 없었다. 누구든 자신의 말로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수사학’이라는 학문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 학문을 집대성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세 가지 요소를 제시했다.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 번역하면 이성, 감정, 인품이다. 훌륭한 설득은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로고스는 논리와 증거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팩트, 통계, 논증. 파토스는 청중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다. 분노, 연민, 두려움, 희망. 에토스는 연설자의 신뢰성이다. 이 사람이 믿을 만한가, 전문성이 있는가, 선의를 가지고 있는가.
흥미로운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파토스를 설득의 정당한 도구로 인정했다. 감정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며, 올바른 감정을 올바른 상황에서 느끼는 것은 덕이라고 보았다. 부정의에 대해 분노하는 것,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적절한 반응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조작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는 이것을 ’소피스트’의 기술과 구별했다. 소피스트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승리만을 추구했다. 어떤 주장이든 그럴듯하게 들리도록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다. 약한 논증을 강하게 보이게 하고, 나쁜 원인을 좋게 포장했다. 플라톤은 이들을 “지식의 장사치”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현실적이었다. 수사학 자체는 중립적인 도구라고 보았다. 칼이 살인에도, 요리에도 쓰일 수 있듯이.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와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수사학을 가르치되, 윤리학과 함께 가르쳤다. 설득의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이 옳은지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18세기 독일.
이마누엘 칸트는 윤리학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의 핵심 개념은 ’정언명령(定言命令)’이다. 무조건적인 도덕 법칙.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결과가 예상되든 따라야 하는 절대적 원칙이다.
칸트의 정언명령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것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쉽게 말하면, 네가 하려는 행동을 모든 사람이 해도 괜찮은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거짓말을 예로 들어보자. 내가 거짓말을 해도 될까? 만약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아무 말도 믿지 않게 될 것이다. 거짓말이라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거짓말은 보편화될 수 없으므로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설득과 조작의 문제에 더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정언명령의 또 다른 형식이다.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만 대우하지 말라.”
이것이 핵심이다. 인간을 단순한 수단으로 삼지 말라.
칸트에게 인간은 존엄한 존재다. 왜?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 도덕의 기초다. 누군가를 속여서 내 목적에 이용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를 인간이 아니라 도구로 취급하는 것이다.
칸트의 기준을 적용하면 설득과 조작의 경계가 명확해진다.
설득은 상대방의 이성에 호소한다. 정보를 제공하고, 논증을 펼치고, 판단을 요청한다. 최종 결정은 상대방의 몫이다. 상대방은 수긍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그의 자율성은 보존된다.
조작은 다르다. 상대방의 이성을 우회한다. 감정을 조종하거나, 정보를 왜곡하거나, 취약점을 이용한다. 상대방이 스스로 판단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조작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된 것이다. 그의 자율성은 침해당했다.
앞서 언급한 “Hey” 이메일로 돌아가보자. 칸트의 관점에서 이것은 문제가 있다. 유권자는 친구가 보낸 이메일이라고 착각하여 열어보았다. 그의 판단은 거짓 신호에 기반한 것이다. 비록 이메일 내용 자체는 거짓이 아닐지라도, 제목은 의도적으로 잘못된 인상을 주었다. 유권자의 자율적 판단을 왜곡한 것이다.
칸트의 윤리학에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다.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로 대표되는 공리주의. 그들에게 행위의 옳고 그름은 의도나 동기가 아니라 결과에 달려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이것이 도덕의 기준이다.
공리주의 관점에서 보면 설득과 조작의 구별은 덜 중요해진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전체 행복을 증가시키느냐 여부다. 만약 어떤 조작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의사가 환자에게 플라시보(위약)를 처방한다. 환자는 진짜 약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명백한 속임수다. 그러나 그 결과 환자의 상태가 호전된다면? 고통이 줄어들고, 회복이 빨라진다면? 공리주의자는 이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국민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실제 전황이 얼마나 암울한지는 숨겼다. 이것은 조작인가? 그러나 그의 연설이 국민의 사기를 유지시켰고, 결국 전쟁 승리에 기여했다면?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의 단순한 쾌락 계산을 넘어섰다. 그는 쾌락에도 질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돼지처럼 만족하는 것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단순한 감각적 쾌락보다 지적, 도덕적 쾌락이 더 가치 있다.
밀의 관점을 적용하면 조작에 대한 판단이 복잡해진다. 조작을 통해 얻은 동의는 진정한 동의가 아니다. 그것은 ’낮은 질’의 결과다. 설령 당장의 행복이 증가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신뢰가 무너지고 자율성이 훼손된다. 이런 ’높은 질’의 가치를 고려하면, 조작은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20세기 후반, 위르겐 하버마스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그 자체에 윤리적 규범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이미 몇 가지 전제를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내가 하는 말은 이해 가능하다. 내가 말하는 내용은 진실이다. 나는 정당한 자격으로 이 말을 한다. 나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타당성 요구’다. 모든 의사소통 행위에는 이 네 가지 요구가 전제되어 있다. 상대방은 이 요구 중 어느 것에든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하버마스의 핵심 개념은 ’이상적 담화 상황’이다. 모든 참여자가 평등하게 발언할 수 있고, 어떤 강제도 없이 오직 더 나은 논증의 힘만으로 합의에 도달하는 상황. 현실에서 이런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규범적 이상이다.
이 관점에서 조작은 ’이상적 담화 상황’을 훼손하는 모든 행위다. 거짓 정보를 제공하는 것, 상대방의 발언 기회를 차단하는 것, 권력이나 지위를 이용해 압박하는 것, 감정을 조종하여 합리적 판단을 방해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조작이다.
하버마스의 기준은 매우 엄격하다. 광고의 대부분은 조작이 된다. 광고는 소비자와 대등한 대화를 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선별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감정에 호소한다. 정치 선전도 마찬가지다. 선거 캠페인은 유권자와의 합리적 토론이 아니라 이미지와 감정의 전쟁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윤리적 설득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2008년, 리처드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은 『넛지』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선택 설계(choice architecture)’와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
핵심 아이디어는 이렇다.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를 원한다. 그러나 동시에 좋은 선택을 하기 어려워한다. 정보가 너무 많고, 시간이 부족하고,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퇴직연금에 가입하지 않고, 건강검진을 미루고, 장기기증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다.
탈러와 선스타인의 해법은 ’기본값(default)’을 바꾸는 것이다. 퇴직연금을 자동 가입으로 설정하되, 원하면 탈퇴할 수 있게 한다. 장기기증을 기본 동의로 설정하되, 거부할 수 있게 한다. 구내식당에서 건강한 음식을 눈높이에 배치하되, 불건강한 음식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넛지’다. 팔꿈치로 살짝 쿡 찌르는 것처럼, 특정 방향으로 부드럽게 유도하되 강제하지는 않는 것.
넛지는 설득인가, 조작인가?
비판자들은 이것이 조작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기본값을 바꾸기 귀찮아하므로 그대로 따르는 경향이 있다. 선택 설계자는 이 심리적 편향을 이용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유도된 것이다. 칸트의 관점에서 이것은 자율성 침해다.
옹호자들은 반박한다. 어차피 기본값은 존재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설정해야 한다. 기본값이 가입인지 미가입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왜 사람들에게 이로운 쪽으로 설정하지 않는가? 게다가 선택의 자유는 보장된다. 원하면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다.
탈러와 선스타인은 넛지의 윤리적 조건을 제시한다. 투명성. 넛지는 숨겨져서는 안 된다. 설계자가 무엇을 유도하려 하는지 공개되어야 한다. 탈퇴 용이성. 사람들이 쉽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혜자 이익. 넛지는 설계자가 아니라 선택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넛지는 조작이 아니라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치 친구가 “이거 한번 해볼래?”라고 권유하는 것처럼.
이론은 명확해 보이지만, 현실은 복잡하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보자.
부모가 아이에게 채소를 먹이기 위해 “비행기가 들어갑니다~”라며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간다. 이것은 조작인가? 아이의 주의를 돌려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된다. 아이의 자율성? 아직 발달 중인 판단력을 대신하여 좋은 선택을 유도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 아닌가?
의사가 말기 암 환자에게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통계적으로 생존 확률이 극히 낮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은 거짓말인가? 환자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인가? 아니면 남은 시간을 절망 대신 희망으로 보내게 해주는 자비인가?
친구가 새로 산 옷에 대해 물어본다. 솔직히 별로다. 그러나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사회적 윤활유인가, 기만인가?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는 것이 관계의 일부라면, 어디까지가 허용되는 배려이고 어디서부터가 유해한 거짓인가?
이런 상황들은 설득과 조작의 경계가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절대적 기준보다 상황적 판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판단의 방향을 제시하는 원칙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상대방의 이익을 진심으로 고려하고 있는가? 만약 상대방이 모든 정보를 알았다면 동의했을까? 이 행동이 상대방의 장기적 자율성을 강화하는가, 약화하는가?
그러나 넛지의 원리가 악용될 때 ’다크 패턴’이 탄생한다.
다크 패턴은 사용자를 의도적으로 속이거나 혼란스럽게 만들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인터페이스 설계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장바구니에 몰래 추가되는 상품. 구독 해지 버튼을 찾기 어렵게 숨겨놓은 웹사이트. “무료 체험” 뒤에 자동으로 유료 결제가 시작되는 서비스. 이 모든 것이 다크 패턴이다.
넛지와 다크 패턴의 차이는 무엇인가? 표면적으로는 같은 심리학 원리를 사용한다. 기본값 효과, 현상 유지 편향, 손실 회피.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넛지는 사용자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다. 다크 패턴은 설계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자를 착취한다.
유럽연합은 2022년 디지털서비스법(DSA)을 통해 다크 패턴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사용자의 자율성, 의사결정, 선택을 왜곡하거나 손상시키는” 인터페이스 설계를 금지한 것이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도 다크 패턴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조작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했다. 알고리즘은 개인의 취약점을 학습한다. A/B 테스트는 어떤 메시지가 가장 효과적인지 실시간으로 최적화한다. 개인화된 광고는 각 사용자의 심리적 버튼을 정확히 찾아 누른다. 이런 환경에서 ’정보에 입각한 동의’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지금까지 살펴본 철학적 관점들을 종합하면, 설득과 조작을 구별하는 몇 가지 기준이 떠오른다.
첫째, 진실성. 제공하는 정보가 사실인가? 중요한 정보를 숨기거나 왜곡하지 않았는가? 거짓말은 명백한 조작이다. 그러나 진실의 일부만 말하는 것, 오해를 유발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도 조작에 가깝다.
둘째, 자율성 존중. 상대방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가? 감정을 과도하게 자극하거나, 시간 압박을 가하거나,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자율적 판단을 방해한다. 이성적 숙고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셋째, 호혜성. 이 설득이 상대방에게도 이익이 되는가? 오직 설득자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착취에 가깝다. 물론 모든 설득에서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상대방에게 명백히 해로운 것을 권유해서는 안 된다.
넷째, 투명성. 설득의 의도가 드러나 있는가? 광고임을 숨기는 네이티브 광고, 후원을 밝히지 않는 인플루언서 마케팅, 조직적으로 운영되면서 풀뿌리 운동인 척하는 ’아스트로터핑’은 모두 의도를 숨긴다는 점에서 조작적이다.
다섯째, 탈퇴 가능성. 거부할 수 있는가? 물리적 강제는 물론이고, 심리적 압박이나 사회적 불이익을 통한 강제도 설득이 아니다.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취약점 이용 여부. 상대방의 인지적, 감정적, 상황적 취약점을 의도적으로 이용하는가? 노인의 외로움을 이용한 사기, 아이의 판단력 부족을 겨냥한 광고, 중독자의 갈망을 자극하는 마케팅은 모두 취약점 착취다.
이 기준들은 칼로 자르듯 명확하지 않다. 현실의 많은 상황은 회색 지대에 놓여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알려준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에서 도덕을 분리했다. 한비자는 인간의 이기심을 통치의 도구로 삼았다. 그들은 현실주의자였다.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냉정하게 관찰했다.
그러나 ’무엇이 가능한가’와 ’무엇이 옳은가’는 다른 문제다. 조작이 효과적이라고 해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물어야 한다. 이것이 옳은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윤리학을 함께 가르쳤다. 칸트는 인간의 존엄성을 도덕의 기초로 삼았다. 하버마스는 진정한 대화의 조건을 탐구했다.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타인을 대할 때 그를 인간으로 대하라. 도구로 취급하지 말라. 그의 이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라.
설득의 기술을 아는 것과 그것을 윤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별개다. 우리 모두는 설득자이면서 동시에 설득의 대상이다. 이 글을 읽는 동안 당신은 설득당하고 있다. 나는 당신이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이것은 조작인가?
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나는 숨기지 않았다. 내 의도를 밝혔다. 근거를 제시했다. 당신은 동의할 수도, 반박할 수도, 글을 더 이상 안 읽을 수도 있다. 최종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그것이 설득과 조작의 차이다.
그러나 경계는 언제나 흐릿하다. 완벽하게 윤리적인 설득도, 완벽하게 비윤리적인 조작도 드물다. 대부분의 영향력 행사는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를 인간으로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도구로 대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조작자가 아니라 설득자로 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