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지능이다'
미세먼지가 이틀 동안 하늘을 덮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먼지가 뿌옇게 하늘을 가렸다면, 더 이상 먼지가 아닙니다. 대기오염이 내 집 안팎으로 찾아와 평온한 마음이 흔들리고 움츠려 들었습니다.
오늘은 일어나니 마침 눈손님이 찾아왔고, 불청객이 자리를 비웠습니다. 한결 개운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습니다. 밀린 빨래도 하고 묵혀놓았던 두 아이 신발도 꺼내 세탁을 했습니다. 창문을 열고 구석구석 청소기로 빨아들이니 먼지통이 금세 가득 찹니다. 마음이 풍족해집니다.
이런 것으로 마음이 다스려질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면서도 신기합니다. 갖고 싶어 하던 자동차를 산 것도 아니고, 치열한 경쟁 후에 얻은 성과도 아닙니다. 멀리 있는 친구를 만난 것도 아니고, 로또가 당첨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죠?
둘째와 점심을 먹은 후 방으로 들여보내고 거실 스피커로 클래식을 틀고 독서대에 책을 올렸습니다. 한낮의 햇살이 창문 가득 들어옵니다. 커피를 마실까 하다가 아침에 먹은 게 생각나 맑은 물로 대신합니다. 책, 음악, 음료. 집중하기 딱 좋습니다. 꺼내놓은 책을 몇 줄 읽습니다.
공감은 지능이다 / 저자: 자밀 자키 / 출판:심심 / 발매: 2021.04.19.
인간에게서 공감은 진화상의 급진적인 도약을 이뤄냈다. 15쪽
독서 모임을 하기 어렵다 보니 한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프로그램에 맞춰 읽고 있습니다. 혐오와 차별의 문화가 퍼지다 보니 공감을 다룬 책이 요즘 많습니다. 공감, 본성, 진화, 공동체. 생물학적 기제와 역사적 변화, 사회적 현상까지 과학적 사고로 인간의 행동을 분석하며 윤리적 당위를 들어 협력적 과제 해결을 요구합니다. 과학적 사고는 늘 표준화하려는 위험이 있습니다. 통계와 확률로 몇 %라는 결과치를 제시할 때 우리는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자신을 체스의 말처럼 이리저리 움직여 봅니다. 나는 과연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여기는 표준선 어디쯤에 있는가? 합격점이면 우쭐하다가도 미달이 되면 기분부터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공자왈 맹자왈이 저에게는 더 위안을 줍니다. 논어에는 각주와 후주가 없어도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그냥 부지불식간에 고개가 끄덕여지고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으니까요. 이런 점 때문에 실험 결과나 통계보다는 메시지에 주목해서 읽습니다.
과학자는 진보적이며 낙관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는 경향이 강하기에 '희망적 메시지도 좀 더 두드려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1장, 2장의 로든베리 가설에 대한 반론은 크게 이견이 없습니다. 능력(여기서는 특정 지어 지능으로 표현됨)은 환경적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라는 주장과 감정이 프로그램된 본능이 아니고 인지적 절차에 의해 선택되는 결과물이라는 것을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끄덕여지는 부분입니다. 진정 그러하든, 그렇지 아니하든 사실보다 진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자신의 삶이 아름답기를 바란다면,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노력한다고 하는데 기대만큼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실패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요. 곰곰이 따져보면 알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은 화가 나서 뒤돌아보기 싫습니다. 핑계를 대며 자신의 능력이나 환경, 또는 운을 탓합니다.
여기에는 이런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의사, 사회복지사, 치료사, 교사 등 인격적 상호작용이 필요한 직업군에서는 공감을 강요받고, 선택이 제한적이며 시스템에 의해 통제를 당합니다. 왜 그들은 공감피로를 호소하며 번아웃을 당할까요? 선하게 타인을 대해야 하며 경쟁보다 협력이 낫다는 것을 몰라서 그럴까요? 공감회피의 원인이 개인에게만 있지 않고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얘기에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저자의 잘 계획된(구조화된, 구성된) 프로그램을 통해 공감 기술을 익히면 친절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에 힘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의 강력한 문화적 흐름 상당수가 공감과 충돌한다. 우리는 성공하려면 경쟁이 필요하고 때로는 잔인함도 필요하다고 배운다. ... 중략 ... 우리가 쭉 살펴보았듯이 이것은 착각이다. 사실은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여러면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대중적 기준은 아직도 이 통찰을 따라 잡지 못했다. 257쪽
왜 대중은 이런 통찰을 무시할까요? 대중들이 무지몽매해서 일까요? 대중의 판단이 틀렸다고 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자가 예를 든 구글과 아이데오, 또 여러 책에서 예시로 나온 사례를 보면 특수 집단이 나옵니다. 대부분이 선발된 인위적 집단입니다. 넷플릭스의 성공 신화를 뒷받침하는 정책으로 적당한 성과를 내는 직원은 두둑한 퇴직금을 주고 내보낸다고 합니다. CEO인 헤이스팅스의 책을 보면 인재 밀도를 높이려는 노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높은 성과는 인재들 사이의 긴밀한 협력으로 달성되며, 협력하지 않는 직원은 아무리 뛰어나도 해고하여 조직문화를 유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수 사례들은 이런 식으로 관리가 된 조직입니다. 이미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 특별한 사례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조직에서는 누군가 애써 친절한 시스템을 마련해 놓으면 이것을 역이용하는 부류가 생겨납니다. 단순히 규칙을 어겨 이득을 얻거나 좀 더 이기적이어서 유한 자원을 선점하는 정도가 아닌 적극적으로 공동체의 이익을 해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요즘 학교에서는 모둠별로 과제를 제시하고 과정을 평가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평가가 숫자 기록으로 남는 중2부터는 얌체들이 생겨납니다. 아무리 모둠 구성에 자율성을 준다고 해도 항상 무임승차자는 존재합니다. 더는 무임승차를 넘어서 방해까지 합니다. 이런 아이들 때문에 모둠별 과제가 권장되나 기피하게 되죠. 교실에서는 학급 자치가 활성화되다 보니 목소리가 큰 학생이 결정권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교사가 없는 틈을 타 더욱 목소리를 키웁니다. 대부분 자신의 이익과 직결될 때 다수보다는 본인이 포함된 소수가 혜택을 받도록 조정합니다. 또 요즘 10대는 영악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소년법을 활용합니다. 범법을 하면서 법의 테두리를 이용하는 것이죠. 죄를 지어도 보호 처분된다는 것을 알기에 행동이 무척 자유롭습니다. 이는 자유 한계를 벗어나 타인의 자유뿐만 아니라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합니다.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습니다.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사건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래도 개정이 되지 않는 이유는 "전사 치안처럼 무관용 역시 서로 협력할 수 있었을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291쪽"라는 문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 대상으로 하는 법질서 상 어린 학생들을 처벌하기보다는 기회를 주는데 합의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합의조차 위태해 보이기도 하지만 쉽게 결단할 문제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대중이 종교적 교훈과도 같은 '선한 자가 되기'를 버린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건 대중이 무지해서도 아니고, 악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정해진 규칙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소수의 누군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첫 인용 문장으로 돌아가 공감 지능이 호모 사피엔스를 지상의 지배자로 만들었다면, 왜 아직도 악인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남습니다. 적응하는 동물이 살아남다는 자연선택이 맞다면 더 나은 삶을 사는 기술을 익힌(공감 지능이 뛰어난) 개체가 살아남기 유리할 것이고, 대를 거듭할수록 악인(공감 지능이 부족한)은 사라졌을 텐데... 오늘날 이 땅에서 집단이 공유할 이익을 사적 재산으로 축적하는 부류를 목도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까지 공감은 지능이고, 선함은 모두에게 이익이며 협력은 경쟁을 이긴다는 메시지를 심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곱씹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