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졸업식: 내가 아이들에게 배운 것
1월의 교실. 시작종이 울려 교실에 들어가면 낯선 조용함을 마주한다. 종이 치더라도, 교사가 들어오더라도 아랑곳하지 않던 시끌벅적한 교실 풍경은 사라졌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주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인사 없이 시작된 수업은 별다른 지시 없이 진행되고 마무리된다. 온라인 수업처럼 코스를 거쳐 진행되는 것이 아닌 개별적 흥미에 따라 취미 활동으로 채워진다. Youtube를 보고 SNS를 하며 게임을 즐긴다. 기말고사가 끝난 시점부터 학생은 수업을 거부한다. 누구에게도 침해받기를 원치 않으며, 자유와 사생활이 보장된 닫힌 공간과 인터넷이 연결된 열린 세계를 원한다.
교사가 어떤 형태의 수업을 하고자 한다면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거 재미있는데 같이 해볼까?” 그러나 대부분은 무관심이나 치기 어린 비난 속에 교사의 의무를 감춘다. 말을 이어서 할라치면 날카로운 신경전 끝에 마음에 상흔을 남긴 채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냥 서로의 경계 밖에서 끝 종이 치기를 기다리는 게 낫다.
내가 직장에서, 교실에서 느낀 단절감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새로운 세대와의 격차 때문일까? 그들의 관심사나 사는 배경은 나와는 완전히 다르다. 같은 도구(스마트폰)로 이렇게 다른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같은 반 아이들조차 활동 영역이 정말 다르다는 것이다. 어른이 이런 모든 것을 익혀야 한다면 차라리 외딴섬에 갇히는 것이 낫다고 하소연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두려움 때문인지 교실은 종종 통제된다. 학생이 전자기기를 소지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제한되며, 부득이한 사유가 있다면 조회 시 제출하고 종례 후에 돌려받을 수 있게 되어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내년부터 중학교 신입생에게 스마트기기를 무상으로 제공한다고 한다. 스마트 기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팽팽한 긴장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졸업한 한 아이는 지각은 하지 않지만 오자마자 지쳤다는 듯이 두 팔을 책상 위로 올리고 정수리를 들어낸다.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가 무색하다. 신경은 쓰이지만 건드리지 않는다. 짜증 나는 듯한 반응을 보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10시가 넘으면 화장실을 다녀오는 등 잠깐 정신을 차릴 때가 있다. 우연히 마주치면 아침에 못 나눈 인사를 건넨다. “어젯밤 잘 놀다 왔니?”
여러 메타버스 플랫폼을 누비고, 자신만의 캐릭터를 제작하기도 하며 프로그래밍 기술을 익혀 코딩 알바를 하기도 한다. 큰돈은 아니지만 수입도 꽤 있어 주식에 투자하고 여윳돈으로 새로운 IT 기기를 사들인다. 중3이지만 생활은 어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신체적으로도 어른과 다를 바 없다. 단지, 신분이 학생이라는 제약만 있을 뿐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배워야만 하는 교과는 무슨 의미일까? 제약된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해석이 될까? 기존 체계를 거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보인다. 이런 학생을 껴안고 성장과 발달이라는 교육제도 틀에 넣어 기른다는 것은 교사에게 미션 임파서블이다.
나는 되도록 문제를 만들지 않는 편이다. 있는 문제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런데 변화니 혁신이니 하는 사회적 흐름은 문제를 그대로 둔 채 새로운 것을 만들고 형틀에 가두는데 주목한다. 혁신을 혁신하라는 요구까지 나오고 있으니 말 다 한 것이다. 요구를 들어보면 본질은 건드리지 않고 성과가 나오는 것만 건드린다는 것이다. 인력과 돈을 투입했으니 뭐라도 그럴듯한 결과가 나와야 면이 서기 때문일까… 지나치게 결과 편향적이다. 결과에만 집중하면 과정은 왜곡된다. 지름길을 놔두고 굳이 정도를 걸을 필요는 없다. 인생이 극장이라면 주인공과 엔딩만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포스터를 만들어 수많은 관객을 속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스토리가 없는 영화는 제아무리 톱스타가 나오고 화려한 장면을 넣어도 망작이 된다. 사람들은 스토리를 중시한다. 이야기의 흐름이 개연성을 갖고 순조롭게 흘러갈 때 빠져든다. 개선하고 혁신하고 싶다면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변인을 설득하고 마음을 움직여 협력하게 만들 수 있다.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실 혁신은 스토리를 같이 하는 교사와 학생 간의 협력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혁신학교를 잔뜩 좋은 말로 이름을 붙이고 거창한 캐치프레이즈만 내걸며 따라와 주길 바라고 있으니 제자리걸음인 것이다. 내가 1월의 교실에서 실패한 것은 아이들과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데 있다. 중3의 1월은 굉장히 미래 지향적인 기차역의 플랫폼이었다. 역사에 들어서면 마주하는 키오스크를 다루지 못해 긴장하는 어른과 달리 자유롭게 다양한 세계를 여행하고픈 열혈 청소년이 낮에는 쉬고 밤마다 아무도 모르는 곳을 헤매다 돌아왔다. 이 아이들은 왜 가장 안전하다고 하는 교실을 벗어나고자 했을까?
더 이상 아이들의 눈을 마주칠 용기와 공감된 스토리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어 잠시 학교를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 올해가 마지막 졸업식이 된 것이다. 1년동안 여러 일을 함께 겪은 친구가 편지를 놓고 갔다. 아직은 차디찬 디지털 메시지보다 따끈한 손편지가 좋다. 오랜만에 받아본 편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감사 인사가 적혀 있었다. 의례적인 문장이 나에게는 특별했다. 아마 그 친구에도 담임이 특별했기 때문에 편지를 썼을 것이다. 고맙고 고마웠다. 마지막에 이렇게 큰 선물을 받을 줄 몰랐다. 모든 것이 메마르고 단절되었다고 생각했던 오늘, 망치로 크게 얻어맞았다. 꼭 찾아 뵙겠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공하겠다는 말은 진심이라 믿는다. 그 아이의 성공과 나의 성공이 의미는 다르더라도 묵묵히 갈 길을 걸어가도록 마음 속으로 축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