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는 착해보이지만 자기만의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고, 그 선을 넘어서는 사람과는 절대로 섞이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한 원장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보여드린 글을 읽고 이 페이지까지 찾아보신 원장님이었다.
처음에는 속으로 '예? 제가요?' 했다. 몇 년전의 나는 분명 그랬다. 세상이 정의롭고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최소한의 존중을 받을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해 강자는 자신이 가진 것을 약자와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대전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혐오했다. 천민자본주의에 찌들어서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속물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세상에는 100% 맞는 것도 없고 100% 틀린 것도 없다. 자기 입장에서는 다 자기가 맞다. 내가 정의라 믿어온 것 역시 내 입장에서의 정의일 뿐이다. 입장이 바뀌면 정의도 바뀐다. 몇 년전 내가 평등하고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이유는 내 손으로 돈을 벌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모님 돈으로 용돈받고 등록금 내면서 다니니 세상이 쉬워보였다.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게, 그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게 쉬운 일인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내 손으로 돈을 벌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돈을 버는 건 지독히도 어려웠다. 그래서 인색해졌다. 북유럽식 복지국가를 동경하던 나는 세금을 왜 이렇게 많이 떼가냐며 투덜대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속물들을 혐오하지 않는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속담처럼 어차피 각자에게는 각자의 정의가 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정의들 중에 어떤 것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어떤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걸 결정하는 건 무엇인가? 결국 힘이다. 왕정 시대에는 왕의 생각이 정의고, 민주사회에서는 다수의 생각이 정의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돈 많고 유명한 이들의 생각이 정의다. 그러니 이기면 된다. 그러면 내 생각이 정의가 된다. 내가 옳고 남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려 애쓰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인가? 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어릴 적 내가 믿던 순수한 사상을 믿는 사람들을 나는 존중하는가? 아직 자기 손으로 돈 벌어본 적이 없어서 배부른 소리 하는 거다, 여자들 앞에서 있어보이는 척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는 거다, 하면서 비아냥 대지는 않는가? 나는 특정한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걸까? 도그마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도그마에 빠져버린 사람이 된 건 아닐까?
여자 친구는 몇 명 정도 만나봤어? 헤어진 이유는 어떤 거였고? 다 다른 이유라고 생각하겠지만 어쩌면 같은 이유일 수도 있어.
그리고 이어진 이 말에 잠시 네가 생각났다. 지금까지 여자를 만나면서 내가 찬 적도 있고, 차인 적도 있었다. 차는 쪽에서는 대체로 왜 차는지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너에게 헤어지자고 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내가 말했으니 명확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 그게 정말 그렇게 중대한 결격사유였을까? 어쩌면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내가 그 동안 차였던 이유는 그것과 무관했을까?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다른 세상을 받아들이기엔 모든 것이 너무나 꽉 짜여있는 나의 모습이 누군가를 숨막히게 했던 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