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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삭막했었지

촌사람인 나에겐 어렵고 외로운 곳이었지

by 요술램프 예미

아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 서울로 대학을 가서 소위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고등학생이었던 그 시절 나름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그렇게만 되면 여러 가지 목적들을 한꺼 번에 다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오게 된 서울은 뭐랄까 메마른 사막같은 느낌이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사람들은 지하철역에서 늘 뛰어다녔고, 내가 택시비를 내고 안 받아도 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여자애들은 그럴 수는 없다며 백원에 십원까지 철저히 나누어서 주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고등학생들도 더치페이를 안 했는데, 서울은 대학생들이 더치페이를 하고 또 우리 동네에서는 택시 미터기 끝자리에 백원이 찍히면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알아서 안 받곤 했는데, 서울은 백원까지 철저히 받아내었다. 그건 다소 낯선 모습들이었다.


시골에는 버스를 타고 가다 내가 내리겠다고 하면 그 곳이 정류장이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벨을 미처 누르지 못한 사람들이 '나 내려요~'하면 아저씨는 그냥 내려주곤 했고, 버스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냥 태워주기도 했다. 그런데 서울은... 서울은...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비켜 있다고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아무리 열어달라고 승객이 앞에서 하소연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아저씨들의 모습은 그냥 권력자 그 자체였다. 위험해서 그렇다는 것도 알겠고, 나라에서 하지 말라니까 안 하는 것도 알겠는데 버스정류장을 벗어났는지 벗어나지 않았는지조차 가늠이 안 되는 곳에서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저씨들을 보며 서울 인심 참 흉흉하다 했었다.


그런 서울에서 늘 길을 헤매곤 했다. 지하철 역에서 길을 헤맬 때도 많았고, 여자들만 우글거리는 학교에서는 마음과 눈이 길을 잃곤 했다. 특이한 외계의 존재들만 있는 행성에서 불편한 마음에 어찌할 줄 모르는 나의 무기력을 그 때 처음 느끼게 되었다. 숨 쉴 공기가 없어 숨이 가빠지고 이내 얼굴에 분홍빛이라고는 잃어버린 채 점점 회색인간이 되어갔고, 언어를 몰랐던 시절로 돌아가버리곤 했다. 그리곤 아무렇게나 대했던 고등학교 때의 얼띤 남학생들에게 미안해지기도, 또 그들이 그립기도 하였다. 아무리 못돼먹은 아이였어도 대학생이던 내게 있어 기억 속 그 아이는 여느 서울 여자들보다 순박한 촌뜨기가 되어 있었다. 모든 아련한 것들이 순수함 그 자체로 그리움의 대상들이 되었다. 그렇게 싫었던 시골의 모든 것들이...



우리 시골 동네에는 김치라이스라는 메뉴가 있었다. 김치덮밥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김치라이스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나가자 마치 못 사는 나라에서 못 배운 애가 자기들 나라에 온 것처럼 세상에 그런 메뉴가 있냐며 비웃는 여자애가 있었다. 서울에는 김치라이스가 없다는 것이 제일 충격이었고, 그걸 비웃는 친구가 있다는 것도 역시 그러했다.



학교에는 뉘 집 딸래미들도 많았고 대학생인데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애들도 많았다. 그 역시도 내겐 문화적 충격이었다. 우리 집엔 가족이 타고다니는 차도 없었는데, 가족이 타고 다니는 차도 있고 학생이 타고 다니는 차가 또 따로 있을 수 있다니 말이다.


여자들만의 위계질서는 다소 치사하고 유치하기도 했다. 사막 한 복판에서 오아시스가 눈에 띌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냥 남녀공학을 갔더라면 푸근한 촌선배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꿈도 꿨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지방에서 올라온 아이들도 세련되고 화려했었다. 어쩌면 그들도 서울여자들에게 지지 않으려 속으로 엄청난 노력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은 그리고 여대는 나같은 촌여자가 그것도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여자가 살아내기엔 또 견뎌내기엔 너무 벅차기만 한 그런 곳이었다.


지금 내가 가진 대부분의 열등감들이 대학생활을 하면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전까지 아무리 가난했어도 느끼지 못했던 열패감이 내 이마에 낙인처럼 찍혔다. 사람들이 그 낙인의 글자들을 뻔히 눈으로 보고 있는 것만 같아 이마를 가리고 또 가렸다. 그 때부터 내 안에 있던 자신감들은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알과도 같았다. 꽤 똑똑한 줄 알았는데 바보가 살고 있는 줄 미처 몰랐던 거다. 그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지금 하고 있는 방황들도 어쩌면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 날들의 내 모습은 사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인생에서 가장 못난 모습, 가장 누추한 모습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얼굴이 온통 일그러져 있는 것만 같아 보이고, 억지 웃음 속에 외로움만 가득해 보이는 딱한 모습들만 가득하니.




어느 덧 서울여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나의 정체성은 여전히 촌여자이다. 아이들에게도 촌사람의 정체성을 물려주고 싶다. 가끔은 더치페이가 더 합리적이고 서로 부담없어 더 좋을 때도 많지만, 친구끼리 계산에 밝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싶고, 나중에 촌에서 올라온 친구와 만나게 되면 처음 듣는 음식이름이라고 놀리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싶다. 지하철 타는 걸 힘들어하면 차근차근 잘 가르쳐주고, 깎쟁이같은 서울 말씨 가운데 조금은 투박한 사투리를 쓰더라도 우리 엄마아빠도 집에서는 사투리를 쓴다며 반가워하라고 가르쳐주고 싶다.


간혹, 서울의 빠름과 메마름에 외로워하는 친구를 만난다면 따뜻한 밥 한 끼 사주라고 가르쳐주고 싶다.


나도 그간 서울에서 살면서 조금은 닳아지고 없어진
촌사람의 정체성 중 일부를 되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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