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인생에서 조연이 될 순 없어

길치인 마음에 네비게이션 하나 놔드려야 겠어요

by 요술램프 예미

누군가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러 거두어지지 않고 있음을 순간 느꼈다. 나를, 내 얼굴을 왜 저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 예쁜 꽃 자꾸 보고 싶은 것처럼 예뻐서 계속 쳐다보는 거겠지 스스로에게 농담을 건네 본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불편할 때가 많다. 마침 생각에 잠겨 있을 때면 혹여 내 눈동자에 새겨진 잡생각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그 때의 나의 멍청한 얼굴은 신기한 얼굴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주변이 소란한데 뜻 모를, 원인 모를 우울감과 상념에 빠져 무대 위에서 나에게만 조명이 쏟아지는 것과 같은 상황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누군가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음을 느끼곤 한다. 마치 공연하는 내 모습을 찬찬히 보고 있는 것마냥.


내 얼굴인데도 지금의 내 표정은 어떤지, 얼굴 상태는 어떤지 볼 수 없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길눈이 밝은 편이다. 한번 갔던 길을 본능적으로 잘 찾아가는 편이고 어떻게 가면 길이 나오겠다는 것도 잘

아는 편이다. 스치듯이 지나갔던 사람도 언제 봤던 사람인지 기억을 잘 하곤 한다.

그리고 꽤나 신념도 강하고 의지도 강한 편이다. 꺾일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대쪽같은 면도 있다. 공명정대한 걸 사랑하여 불의를 보면 못 참기도 한다.


그랬다... 그랬었다...

그런데 빳빳했던 미역을 물에 담가놓으면 흐물해지는 것처럼 어느새 내 정신과 의지가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바람에 자신의 몸을 내맡긴채 의지와 상관없이 이러저리 흔들리며 미친여자 널뛰듯이 춤을 춰대는 길거리 풍성인형처럼 되어 버렸다.


마치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열십자 복판에 서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상태로 그야말로 마음이 길을 잃어버렸다. 요며칠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렸다. 이 우울감과 무기력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몰랐다. 공부도, 일도 하고 싶지 않고, 책을 읽는 것도 가족들 밥을 차리는 것 역시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하듯이 꾸역꾸역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느 언덕의 영혼을 잃은 마른 뼈와도 같았다.


연극 <취미의 방> 무대 - 출처 네이버


문득 연극하던 때가 떠오른다. 갑자기, 뜬금없이 무대에 서서 연극을 하고 싶은 감정이 울컥 가슴에서 머리까지 순식간에 타고 들어올 때가 있다. 모든 관심과 집중이 나를 향해 있는 그 때의 그 쾌감을 느끼고 싶어서일 때가 많다. 무대에 섰을 땐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 시선을 즐기기까지 하면서, 실생활에서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면 왜 보냐고 따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사람은 정말 좋은 감정으로 쳐다봤는데도 괜한 자격지심에 좋은 시선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못난 마음의 발로에서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오는 차 안에서 문득,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우울감과 무기력함의 근원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연극에서 나는 주연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내 삶에서는 내가 주연이 아니었던 거다. 글을 쓰는 지금도 다른 이들의 뒤꿈치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괜한 우울감에 빠져 들었다. 내 인생인데 어느새 나는 조연으로 전락하였고, 잘 나가는(?) 작가들이 주연이 되어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도 나의 주연 자리를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는 일들은 비일비재하였다. 내 삶의 주도권을 다른 이에게 뺏기기도 하고, 내 감정을 다른 이가 쉬이 휩쓸고 가게 내버려두기도 했다. 다른 이의 태도, 말 하나하나에 내 감정을 내맡긴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서적 중에 그러한 책이 나와서 히트를 친 적이 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목적이 내 삶을 이끄는 순간 그것이 나를 휘두르기 시작한다. 하나의 목적을 이루면 또 다른 목적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것을 가져 처음엔 좋다가도 이내 헌 것이 되어 또다른 새 것에 눈 돌려야 인간의 지루함이라는 것이 채워지므로, 목적에 나를 맡기는 순간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느껴왔다.


그런데, 다른 이들에게 내 삶의 주연 자리를 넘겨주고 있었다. 목적이라는 것에도 내 자신을 내놓기를 거부하던 내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쉽게 그 자리를 양보해 버렸다. 끊임없이 다른 이들과 비교해 나보다 우월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을 스스로 내 인생의 주연의 자리에 앉히고, 나를 조연의 자리에 앉혀버렸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 나 스스로가. 그래서 우울한 거였다. 무기력한 것이었다.


외로움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능동적이기를 포기하고 수동적인 관계를 선택하는 순간 외로움이 찾아왔다. 드라마든, 연극이든, 영화든 주인공은 늘 중심에 있다. 중심에 있는 사람은 수동적일 수 없다. 예전에야 신데렐라형 주인공들이 판을 쳤지만 요즘의 주인공들은 그 모습들도 많이 변하였다. 적어도 내가 내 인생에서만큼은 중심이 되기를 선택해야 했었다.


이걸 깨닫고 나니, 그 모든 우울과 무기력을 거부할 수 있는 작은 힘이 생겼다. 앞으로 누구에게도 내 인생의 주연의 자리를 넘겨주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나는 당신들의 시선을 즐길 것이다.
당당히 주연의 자리를 누릴 것이다.


길치가 되어버린 내 마음에 네비게이션 하나 달아놓는다.
아니 어쩌면 네비게이션은 이미 있었는데, 그 작동법을 몰랐던 것일지로 모르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서울은 삭막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