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어리석은 채로, 여전히 모르는 채로
그녀의 드라마를 보다보면 그 안에 녹아 있는 그녀의 깊은 철학에 매료되어 도대체 그 머리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살펴보고 싶을 정도다. 대사 하나하나 내레이션 하나하나 놓칠새라 귀담아 듣고, 보고 또 듣고를 반복하기도 한다.
희자 이모는 자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실, 너무 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이 자신의 곁에 언제나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살아서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사람들을 볼 수 있음이 감사했다고 한다.
이 대사를 듣고선 그만 울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녀가 어떤 세계관과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주를 그녀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난 왜 여전히 외로운거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고, 방금 전에 들었던 내레이션을 나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우리가 지향하는 신앙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냐는 말에 괜스레 또 울어버렸다.
어떤 것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왜 아직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슬픔과 외로움에 어린 아이처럼 울어야 하는 것일까...
신부님, 저는 이미 답을 들었네요. 주님은 정말 관대하시네요. 늘 제 곁에 살아계시네요...그 어떤 순간에도... 제가 왜 그것을 몰랐을까요. 주님은 제 편이시네요...
희자 이모는 사람을 죽였다는 자신의 말을 들으며 당황해하는 어린 신부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희자 이모의 입을 통해 나에게 하는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해야하는 것인지 늘 묻고 싶었고, 또 묻곤 하였다. 어렸을 때도 외로웠는데, 왜 여전히 외로운 거냐고 묻고 싶었고, 또 물었다.
어쩌면 나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어떤 복을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세상의 많은 복들이, 그리고 사람들이 가득하기를, 그것을 내 고통에 대한 대가로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세상의 것에 미련을 떨치지 못해 뒤돌아 보았다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그 여인네처럼 내 눈은 여전히 세상 욕심으로 한 가득 차 있었던 것일까...
주님이 늘 자신의 곁에 있었다는 희자 이모의 말에 끊없이 눈물이 흐르는 건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희열이었을까... 아니면 고작 그거밖에 되지 않느냐는 실망이었을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 수 십 명, 수 백 명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게 될까...
난 여전히 어리석고, 여전히 모른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느끼지 못한 채, 깊이 깨닫지 못한 채 가까운 곳을 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먼 곳에 있는 정체 모를, 현존하지 않는 그 무엇만을 찾고 있을 뿐이다. 파랑새를 찾아 헤매었던 그들처럼...
사람들의 무시와 멸시를 받던 순간에도, 가장 사랑받아야 할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했던 수많은 시간들에도, 외로움에 눈물도 흘리지 못한 채 멍든 가슴만 부여잡고 있던 그 날들에도, 무엇이 서러워 아직도 서러워 대성통곡 해야만 하던 때에도 내 곁에서 늘 나를 지켜보며 사랑한다고 말하던 이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난 대체 누구로부터 어떤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