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면 이오당- 음지마- 양지마- 법계서실-척곡교회-사미정-조래마을
* 이 길은 2018년 10월 걷고 마을길걷기에 올린 구간으로 이오당과 조래마을을 첨가하여 다시 답사한 후
"컬처라인" 2023.1 vol.29 (www.cultureline.kr)에 기고 한 글임.
인문학이란 인간의 삶과 사고, 인간다움 등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표현하려는 노력을 포함합니다. (Bing, AI의 인문학 소개 일부)
마을길 걷는데 “인문학”이라는 너무 거창한 단어를 사용한다고 생각 할 수 있고 당연한 지적이다.그러나 법전면 면사무소와 이웃한 이오당에서 진주 강씨 법전문중의 세거지인 음지마, 양지마를 거쳐 척곡리의 척곡교회, 그리고 사미정에서 조래마을에 이르는 9.5km의 지방도를 걷는 마을길은 “인문학 산책길”이라 부를 만 하다.
이오당(二吾堂)
“인문학 산책길” 답게 “두개의 나”로 시작하는 마을길 이다. 이오당(二吾堂)이란 이름은 ‘낙오천(樂吾天), 종오년(終吾年)’에서 두 개의 오(吾)를 따서 지었다. 그 뜻은 ‘사람에게는 하늘로부터 받은 나와 내가 선택하는 나가 있다. 하늘이 내린 천명을 감사히 받고 올바르고 성실하게 나의 생을 살면 하늘이 사람을 내린 뜻에 부합한 삶이 된다’는 정신을 담는다고 한다. 입향조인 잠은(潛隱) 강흡을 기리기 위해 사후8년 뒤인 1679년 건립되었다.
법전마을
법전천 (유계 柳谿) 을 사이에 둔 법전리 음지마(을)과 척곡리 양지마(을)은 진주 강씨 법전문중의 세거지다. 보기에는 한 동네이지만 법전천을 기준으로 법전리와 척곡리로 나뉘어지는데 예전에는 안동부와 순흥부의 경계선이기도 했다고 한다.
“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잠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1636년 입향한 잠은(潛隱) 강흡 (1602-1671)과 도은(陶隱) 강각 (1620-1657)형제 또한 도잠 도연명의 ‘도(陶)와 잠(潛)’를 따서 자호하고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지마을 13명, 양지마을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한국의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세거지는 법계천을 따라 내려오며 우측지역이 형인 강흡의 종택이 이오당 근처에 있었고 그 옆으로 경체정, 기헌고택등이 음지마을을 이루고 다리를 건너 양지마을에 동생인 도은 강각의 도은구택과 해은 강필효 (1764-1848)의 해은구택이 있는 양지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특이하게 음지마을에는 송월재 이시선이 380년전에 법전면 풍정리에 지었던 송월재종택이 고종27년 이전하여 터를 잡고 있기도 하다. 또한 양지마의 도은구택이 “법전 강씨종택”이다. 이는 음지마의 잠은 종택이 민속촌으로 이전되며 종택은 원래 세거지였던 파주로 돌아 갔기 때문에 도은구택이 법전 종택이 되었다고 한다.
진주 강씨 법전문중에 대한 나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1.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은 대.소과 합격자를 배출한 문중이다.
2. 조선의 붕당정치하에서 음지마는 노론을 양지마는 소론으로 나뉘었고 양지마의 해은 강필효는 소론의 정맥이라 불리운다. 이는 동생인 도은 강각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므로 그 자손이 외가인 윤증에게 사사하게 되었는데 같은 서인이었던 송시열과 그 제자였던 윤증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며 생긴 일이다. 스승인 윤증은 소론의 영수였으나 논산이 세거지인데 형제지간으로 같은 마을에 있는 형네 집안인 노론과 대척점을 유지한 것이 놀랍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대립관계에서 경쟁이 유발되어 결국 비등한 대과급제자를 배출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법전천을 따라 걸으며 공부 마치고 불을 끄려다 건너 마을의 환한 불빛을 보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 광경이 그려져 긴장감이 느껴진다. 물론 나였다면 자발적이 아니고 타의에 의한 것 이었겠지만...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법전면은 봉화 어느 면 보다 단합이 잘 되는 면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적으로 치열한 경쟁, 그러나 외부적으로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진주 강씨 법전문중 (버제이 강씨) 문중지와 웹사이트는 아주 잔잔하고 고요하다. 이러한 경쟁과 단합의 균형감각이 거의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는 것이 경이로운 일 이다. 이에 대해 강씨 문중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없지만 이는 체통을 유지하기 위한 가정교육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쥬”다. 재벌가의 재산 싸움이 드물지 않은 이 시대에 아주 힘든 일이고 존경스런 일이다.
4. 고건축물의 유지 관리는 기본적으로 소유주와 문중의 책임이긴 하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손 볼 곳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데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도 않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경비가 많이 든다고 한다. 법전마을은 지난 몇년간 지자체 및 정부와 문중의 노력으로 보수가 이루어 지긴 하였으나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인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실물이 아니라 사진으로 대할 수도 있다.
5. 인력이 국력이고 문중력이다. 자체내에서 대를 이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자손이 귀해지면 양자를 들일 수밖에 없다. 양자의 양자 또 그의 양자로 이어진다면 정체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구택 중의 한 곳은 외부인에게 팔린 것을 다시 문중에서 환매 한 곳도 있다고 한다. 유지를 위한 경비도 경비지만 애정을 갖고 관리를 할 수 있는 이에게 이어 질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
경체정
1858년 건립 자그만 동산과 노거수와 함께하는 경체정의 아름다운 모습은 지나는 이의 시선을 끄는데 에 끌려 시작한 첫 행보에서 마주친 추사 김정희의 현판은 경체정의 단아한 모습과 아주 잘 어울려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같이 있는 현판은 철종때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의 글씨라고 한다.
기헌고택 – 1845년 완공 – 기헌 강두환(1781- 1854) 헌종 스승이다.
“한양의 정승 판서들이 사는 저택의 대문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 거리지 않을 정도라 하였다. 그러나 기헌 고택의 대문은 한양의 정승 판서들부터 충신열사 석학대덕 등은 물론 초동 목부에서 원근의 걸인들까지 즐겨 드나들며 저자 거리를 방불케 하였다고 한다. 지난날 이웃에 음덕을 베풀던 적선지가(積善之家)의 옛 모습에서 법전 마을의 선비 정신이 무엇인가를 현대인들에게 생각하게 하고 있다. (진주 강씨 법전 문중)”
그 전통이 아직 이어져 지나가는 구경꾼인 내게도 종부께서 안채로 초청하여 차를 내주셨고 바깥주인은 근처 급제공원 안내까지 해주셨다. 그에 의하면 노론 소론 남인등은 정치적인 입장뿐만 아니라 집의 모양이나 형태까지 다르다 하였다. 비슷한 가치관을 가져야 같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수긍이 가는 말이다. 기헌고택앞의 상소문 비석은 강직한 기헌 강두헌의 기상이 잘 나타나있는 상소문이다. 그런 상소를 받고 스승이라 용서해준 헌종의 배포도 칭송받을 만하다.
송월재종택
고종 27년 법전면 풍정리에서 이전 송월재 이시선 (1625-1715)380년전 건립 100년전 이전했다고 하는데 대문이 유실되어 허전 한 감이 있다.
도은종택
동생인 도은 강각 사후에 건립되어 그 가족이 거주하던 곳으로 안채가 고건축 기법상 특이하여 가치가 높다고 알려져 있다는데 실제로 다른 집들과 달리 유독 높아 보인다.
외부에 법전 강씨종택 이라는 입간판이 있다.
해은구택
1750년경 건립된 곳으로 해은 강필효(1764-1848)의 호를 따서 해은구택이라 한다. 해은의 해은문집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고 해은집과 농노집의 목판이 법계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소론의 학맥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지은 대명산구곡은 대명의리 (大明義理) 앞세워 주자의 <무이구곡가>처럼 명호면에서 안동 농암종택까지 낙동강 상류의 아홉굽이에 대해 논 한 것이다 처음 대명산구곡을 대했을 때는 사대사상을 생각했는데 입향조의 입장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생각하면 다른 입장이 된다. 서글픈 것은 지금도 명이냐 청이냐로 나뉘어져 고민하는 선조들 처럼 미국이냐 중국이냐를 고민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해은구택의 안내판에서 ‘유일천’이라는 말을 보고 찾아 보았다. 문중 사이트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유일천 :
유일천거(遺逸薦擧)를 줄인 말이다. 유일(遺逸)이란 재야에 묻혀 있는 인재를 뜻한다.
유일천거(遺逸薦擧)란 관리인사제도의 일부로서 천거(薦擧)가 있다. 유일언수(遺逸焉授)
천거(薦擧) : 인재를 어떤 자리에 추천하는 일.”
그 지방에 있는 학식과 덕망이 있는 사람이 관리가 된다면 효율적인 행정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중앙집권제에서 부분적으로 오늘날의 지방자치제의 이점을 이용한 제도라 하겠다. 동시에 법학전문대학원이나 의학전문대학원이 생각나는 것은 어인 일 인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운용상의 문제다.
법계서실
1840년 (헌종6) 해은 말년에 제자들이 주동하여 건립한 것으로 산 중턱에 고즈넉한 분위기인데 내부를 볼 수 없어 궁금한 점은 외부에 튀어 나온 금속제 받침 혹은 연결구의 모습이 특이했다. 이곳에 해은의 해은집등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었다 하니 그를 위한 강력한 선반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척곡교회
법계서실을 뒤로하고 사미정로를 따라 내려가다 건문골길로 우회전하여 약 700미터 거리에 있다. 아무것도 없는 궁벽한 시골에 1907년 개인 신도가 세운 교회다.
척곡교회는 1907년. 대한제국 탁지부 관리를 지낸 김종숙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김종숙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야소교(예수교의 음역어)를 믿어야 조국을 개명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됐다. 그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가족들을 데리고 처가가 있던 봉화군으로 낙향해 전도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낙향 초기는 30리 떨어진 상운면 문촌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이내 척곡교회 성도들과 함께 기도실을 세웠고 이것을 교회로 발전시켰다. 이어 ‘명동서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민족 교육에도 힘썼다.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던 김종숙 목사(설립후 목사 안수 받음)는 1926년 교단 목사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보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적발돼 모진 고초를 당했다. 광복 직전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민족의 구원과 독립을 위해 애썼던 척곡교회는 2010년대 초반부터 목사없이 창립자 김 목사의 손자인 김영성 장로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가 2020년 새로운 목사가 부임하였고 2012년에는 창립115주년 기념책자까지 발간되었다 척곡교회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2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척곡교회는 당시 기역(ㄱ) 자 내지 일(一) 자로 지어진 초대교회들과는 달리 9칸 규모의 정사각형 기와집 예배당으로 지어져 역사적 가치가 높고 문서고에 보존되어 있는 초기 교적부를 통해 당시 경북 지역 기독교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관리가 필요하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교회의 문서들은 청량산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2018년에 마을길걷기 회원들과 방문하였을 때 만난 김장로님은 당시 연세가 94세이셨는데 아주 정정하셨다. 인근 춘야 초교의 교가를 작사 작곡하신 외에도 여러 곡을 작곡하신 작곡가이시면서 교장으로 퇴임하신 분이다. 우리를 교회로 안내하여 간단한 설명을 해주셨고 또 김장로 님의 제안으로 그분의 피아노 반주로 돌아오지 않는 독립군 오빠를 생각하는 최순애선생 작사 "오빠생각"노래와 김정구 선생이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노래를 부른 기억이 있다. 교회에서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를 부른 것은 처음이나 "독립군"이라는 주제라 가능했을 것이다.
그 옛날에 이 산속에 교회를 세우고 나라를 위한 일을 도모한 김목사님과 연로하셨지만 열성적으로 교회를 관리하는 김장로님께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예전에는 맡은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요즘은 맡은 일을 이용해서 자신을 살찌우려는 것이 다반사라고 느끼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유튜브에서 본 2022년 척곡교회 115주년 기념식에서는 정정한 김영성 장로님의 모습을 보았는데 지금도 건강하시기를 바란다.
척곡교회을 나와 사미정과 옥천정을 가는 길에서는 경암 이한응의 “춘양구곡”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미정과 옥계정은 경암(敬巖) 이한응(1778~1864)이 운곡천 9㎞에 걸쳐 설정하고 경영한 춘양구곡의 2곡과 3곡에 등장하는데 이한응은 어은(漁隱)에서 도연(道淵)까지 구곡을 정하고 “삼가 무이도가 운에 차운해 각각 한 장을 짓고, 장난삼아 여러 명사에게 주어서 서로 화운하게 하여 춘양의 산수고사(山水故事)를 삼는다”며 구곡을 설정하고 시를 짓는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미정
교회를 나와 다시 소천2리 어은동을 지나면 1727년 (영조3년)조덕린 (1658-1737)이 말년을 위해 지은 사미정이 운곡천을 굽어보고 있다. 조덕린이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사미정’이라한 이유가 재미있다. 이런 내용은 그가 지은 「사미당기」에 자세하다. 1725년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거세져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소를 올리자 영조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보냈다. 조덕린은 이때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면 사미정을 지을 것을계획했다.
“내가 종성에 유배된 지 3년, 그해가 정미가 되고 그해 6월이 정미가 되고 그달 22일이 정미가 되고 그날 미시가 또 정미가 되었다. 이런 날을 만나면 무릇 경영하는 자는 꺼리지 않았고, 음양가는 이런 날을 존중해 만나기 어렵다고 여겼다. 내가 이때 중용을 읽다가 공자의 말씀에 ‘군자의 도가 4가지인데 (仁 義 智 勇)도 능하지 못하다’고 하는 데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하여 ‘성인은 인륜이 지극한데도 오히려 능하지 못하다 하는데 우리들은 마땅히 어떠한가’라고 토로했다. 마침 이런 일시를 만나 한 움집을 지어서 살려고 생각하며 ‘사미’라고 이름 지었다.”
조덕린의 ‘사미정기’ 내용이다. 조덕린의 이런 정신은 후세에 이어지고, 사미정은 영남 사림의 공부 장소가 되었다. 정자 처마에 걸린 현판 ‘사미정(四未亭)’과 정자 안 현판 ‘마암(磨巖)’의 글씨는 번암 채제공(1720~1799)의 친필이라고 한다.
춘양구곡 중 2곡
‘이곡이라 옥천 시냇가 산봉우리(二曲玉川川上峰)/
그윽한 초당에서 마주하니 사람 얼굴 같네(幽軒相對若爲容)/
갈아도 닳지 않는 너럭바위 위로는(磨而不盤陀面)/
천고에 빛나는 밝은 달빛이 비치네(千古光明月色重).’
이한응은 사미정 굽이에서 정자 주인공인 조덕린을 그린다. 옥천은 조덕린의 호이면서 운곡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유헌(幽軒)은 사미정을 말한다. 산봉우리는 조덕린 모습 같고, 너럭바위처럼 변하지 않는 조덕린의 덕은 밝은 달빛처럼 영원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몇 년전 들렸을 때는 계곡가의 음식점이 영업을 하여 바로 밑에까지 접근 가능하였으나 지금은 밭이 되어 있고 영업하는 것 같지 않아 접근이 쉽지 않았다. 문득 “옛날에는 돈이 있다고 아무나 정자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법전, 마을과 사람들, 은둔과 현자의 땅”저자인 강필구씨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다, 정자를 짓기 위해서는 돈만 있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주위의 세력자들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었다고 한다. 지을때도 여러가지 능력이 있어야 했지만 오늘 날에는 지어진 정자를 유지하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미정이 담으로 둘려 싸여 운곡천을 바라보고 있어 방문객은 뒷모습과 운곡천의 일부만 볼 수 있으나 접근이 쉽지 않다고 투덜거릴 일이 아니란 얘기다.
사미정과 사미정 가는 길에 보이는 운곡천
옥계정 (졸천정사)/옥계종
사미정에서 약 7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옥계정은 옥계(玉溪) 김명흠(金命欽 ; 1696〜1773)의 효행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로 졸천정사(拙川精舍)라고도 하는데, 옥계(운곡천)을 달리 졸천(조내, 조래)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이다. 김명흠은 사미정을 지은 조덕린 문하에 13세 때 들어가 학문을 배운 제자다. 그는 조덕린이 유배됐을 때 스승 가족의 생계를 도왔고, 스승이 유배 중 세상을 뜬 뒤에도 자식들을 극진히 돌봤다고 한다. 춘양구곡의 둘째 굽이와 셋째 굽이로 이어진 스승과 제자의 정이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하다.
제3곡. 풍대(風臺)
三曲風臺架若船(삼곡풍대가약선)
冷然神御枉何年(냉연신어왕하년)
波流不盡巖阿古(파류불진암아고)
啼鳥落花摠可憐(제조락화총가련)
삼곡이라 풍대에는 정자가 배와 같구나
썰렁한 사당은 몇 년 동안이나 폐해졌나
시내는 마르지 않고 바위 언덕 오래인데
우는 새와 떨어지는 꽃잎이 모두 가련하네
어풍대라 불리는 냇가의 바위가 있고, 그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는 마치 배처럼 보였다. 이한응은 마르지 않는 운곡천 물결이 거세게 부딪쳐도 풍대 바위는 끄덕도 않는데, 생명을 가진 새와 꽃은 영원하지 않으니 가련하다고 안타까워한다. 이는 인생의 유한함에서 오는 허무함을 비유한다.
(출처:춘양구곡의 2곡과 3곡의 글 https://m.blog.naver.com/dwyun60/222568702031 에서 퍼왔음)
조래마을을 지나 운곡천의 다리를 건너면 안동으로 가는 35번 국도를 만나는데 10km 안되는 짧은 여정이다. 그러나 이 짧은 길은 지난 400년간 경쟁과 협력의 균형추를 놓치지 않는 문중이야기, 400년전 청이냐 명이냐를 고민하듯 미국과 중국의 강대국 사이에서 살 길을 찾으려는 오늘날의 우리 얘기, 강력한 의지로 현재 자신의 자리에서 나라의 미래를 위해 투쟁하는 척곡교회, 그리고 살벌한 붕당정치의 여파로 몇번의 유배를 당하고 끝내는 유배길에 사망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부덕을 탓하는 학자와 그런 스승의 가족 생계를 살피는 의리 있는 학자들의 얘기 등 어느 하나 가볍지 않은 주제로 가득 차 있는 멋진 “인문학 산책길”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