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많은 날을 배정 한 곳이었다. 그렇게 바르셀로나는 볼거리 많은 곳이다. 서울의 1/6로 작은 크기지만 구역마다 개성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크게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람블라스, 보른, 라발, 바리고딕 일대의 구 시가지는 걸어서 충분히 돌아볼 수 있고, 그라시아, 몬주익 등의 외곽지역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수월하다. 보께리야 시장을 비롯해 다양한 행위예술가들로 활기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람블라스 거리는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 람블라 거리 주변으로 구시가지가 둘러싸고 있고 아래쪽으로 쭉 내려가면 바르셀로네타 해변이 펼쳐진다.
구시가지의 각 동네들 역시 비슷한 듯해도 다 다르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다음날 두 발로 구시가지를 누비기로 했다. 람블라스 거리는 우리나라의 명동처럼 관광객으로 붐빈다. 거리에는 꽃가게 기념품 상점 노천 레스토랑이 늘어서있다. 거리의 중간쯤 보께리야 시장이 있다. 어딜 가나 그 지역의 시장을 방문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점차 전통시장이 없어지고 대형마트가 들어서고 있는 것이 아쉽다. 보께리야시장은 지중해에서 난 풍부한 해산물부터 스페인의 태양을 먹고 자란 질 좋은 농산물까지 가득해 유럽 최대 시장이라고도 불린다. 보께리야 라는 말이 고기를 파는 곳이라는 뜻답게 각양각색의 하몽도 보이고 우리나라 젓갈, 반찬처럼 절인 올리브를 파는 곳도 있었다. 색색깔의 과일은 먹기 좋게 썰어서 담겨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가격도 저렴하다. 5유로 이내로 시원한 과일주스 한잔과 하몽 꼬치를 맛볼 수 있다.
람블라 거리의 왼쪽에 위치한 라발은 이민자들의 동네이다. 70여 국의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살고 있다. 이민자들의 동네답게 거리에는 인도, 중국 식당의 향기가 풍겨져 나오고 남미, 티베트 등에서 온 이국적인 소품을 파는 가게들도 여럿 보인다. 다소 허름하고 소박해 보이는 라발지구에 낯선 외관의 건물이 한 채 보였다. 막바(MACBA, Museu d'Art Contemporani de Barcelona)라는 현대미술관이다. 현대 미술관답게 메탈과 시멘트의 차가운 느낌이 나는 모던한 건축물이다. 미술관 내부는 보지 못했지만 미국의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건물의 외관과 그 밖에서 우당탕 소란스럽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라발지구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막바가 보이는 한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미술관의 벽이 높지 않고 젊은이들의 광장이자 보더들의 놀이터가 된 모습이 좋았다.
라발지구를 정처 없이 헤매다가 이번엔 진짜 놀이터를 발견했다. 괜히 반가웠다. 어린아이들이 시소도 타고, 미끄럼틀도 타며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신나 보이지만 그 아이들의 뒤에는 고국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야 했던 부모님들의 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무 그늘이 있는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뛰놀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그랬던 내가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어버렸는지 세월이 무상하다. 그렇게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을 지나 여기까지 왔고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는 엄마, 할머니의 나이가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평소엔 정신없이 살아 인지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뒤돌아서 거쳐온 길을 바라보면 돌아갈 수 없을 만큼 한참 멀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기분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영차 힘을 내 발걸음을 옮겼다.
반대편 바리고딕은 중세 건물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좁은 골목골목을 지날 때면 시간여행을 떠나온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걷는 것이었다. 그냥 계속 걷고 싶었다. 답답했기 때문이다. 하염없이 걸어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원 없이 걸었다. 좁은 골목을 통과해 한참을 걷다 보면 중간중간 광장이 나온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광장이 곳곳에 있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이 광장들 중 일부는 무려 로마시대 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 당시 정치적인 광장 역할을 했던 곳으로 지금도 시위와 집회가 종종 열린다고 한다. 넓은 광장에서 노래도 부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나 역시 광장에서 아픈 다리를 쉬게 하고, 시원한 맥주 한잔을 마시며 함께하는 사람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어떤 노래는 소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실력은 형편없었다. 광장에서 맥주를 마시다 쳐다보니 구걸하는 걸인인 것 같았다. 돈이 없어서 한 푼 구걸을 하더라도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좋았다. 동정을 바라는 불쌍하고 무기력한 모습이 아니라 못하는 노래라도 제멋대로 광장에 담아내는 그 뻔뻔함이 좋았다. 어쩌면 그가 가난한 것은 그의 잘못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난하다고 울고 주저앉아 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뻔뻔한 노래는 유럽인들의 사람과 돈에 대한 멋진 철학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시가지를 벗어나 구엘 공원 쪽으로 올라가면 현지인들이 살고 있는 작은 로컬 동네인 그라시아에 닿을 수 있다. 머물고 있었던 숙소가 이 부근이었던 덕분에 그라시아를 산책할 수 있었다. 관광지보다는 현지인들의 풍경을 담고 있는 곳이었다. 한산한 거리를 걸으며 잠시나마 바르셀로나에 사는 상상을 해본다.
밤이 되어도 바르셀로나는 잠들지 않는다. 오히려 가야 할 곳도, 하고 싶은 것도 줄기보다는 늘어나버린다. 해가 뉘엿뉘엿질때쯤엔 몬주익을 추천한다. 엄청난 규모의 분수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계절에 따라 열리는 시간이 다르니 일정을 잘 확인해야 한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막상 보니 규모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시원한 밤바람과 함께 은은하게 피부에 닿는 물보라를 즐기며 분수를 바라보면 바르셀로나가 온몸으로 나를 환영해주는 것만 같다. 분수쇼를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지만 그 마저도 답답하기보다는 축제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맥주를 흥정해 한 캔 사 마시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맞춰 넘실거리는 분수를 바라보았다. 몬주익 언덕에 오르면 멋진 바르셀로나의 야경도 볼 수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황영조 선수가 달렸을 그 길을 따라 오르는 셈이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 클럽을 가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에 가면 꼭 클럽을 가리라 다짐했다. 여행에서 하루쯤 불타는 밤을 보내고 싶었다. 바르셀로나는 그만큼 욕망과 본능에 충실할 것을 장려하는 도시처럼 보였다. 클럽 화장실에는 콘돔 자판기가 떡하니 놓여있고, 지하철 막차 운행시간도 남다르다. 월-목은 밤 12시지만 금요일과 공휴일은 새벽 2시고 토요일은 무려 24시간 내내 지하철이 운행한다. 부푼 마음을 안고 야심 차게 바르셀로나의 클럽을 찾았다. 아쉽게도 바르셀로나 해변의 클럽들은 그렇게 핫하진 않았다. 일정상 월요일에 방문한 탓도 있을 것이다. 강남의 번쩍번쩍한 클럽들에 비하면 오히려 약간은 초라할 만큼 뭔가 엉성한 분위기의 클럽이었다. 어쩌면 바르셀로나 클럽의 진짜 매력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면 바로 해변이 펼쳐지고, 클럽에서 놀다가도 새벽 동이 트도록 발리볼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큼은 강남 어느 클럽도 따라오지 못할 분위기였다. 나도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한잔 마시고 음악에 몸도 흔들거리다가 해변가로 나왔다. 신발을 벗어던지고 함께 간 동생과 해변을 뛰어다녔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미친 사람들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바르셀로나.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존재하는 도시 같았다. 5일이라는 시간도 이 도시를 만끽하기엔 정말 부족한 시간인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