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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진 Sep 24. 2016

알함브라보다 멋졌던 집시 동굴,
그라나다

  여행을 하다 보면 사람의 취향과 기호가 얼마나 다양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나라, 도시라고 해도 사람에 따라 유난히 마음에 드는 곳은 다 다르기 마련이다. 나에게는 스페인의 그라나다가 그런 곳이었다. 중세 유럽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톨레도,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잘 정비된 아름다운 도시 세비야를 거쳐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두 도시에 비해 그라나다의 첫인상은 약간 실망스러울지도 모른다. 정비되지 않은 시골마을에 가까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틀 뒤 그라나다는 모든 일정 가운데 가장 잊을 수 없는 장소로 기억되었다.

  스페인 남부에 위치한 그라나다는 작은 도시다. 구슬픈 기타 선율로 유명한 알함브라의 궁전이 위치해있다. 많은 여행자들이 알함브라의 궁전을 보기 위해 이곳 그라나다를 찾는다. 첫날은 나도 다른 관광객들과 다름없이 알함브라의 궁전으로 향했다. 안달루시아 지방은 800여 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알함브라 역시 그 당시 지어진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내부는 잔잔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문양들로 가득하다. 특히 별이 가득 찬 밤하늘의 모습 같은 천장은 이슬람 문화만의 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알함브라 궁전의 천장

  이슬람 사원이나 궁전에 이처럼 정교한 무늬가 빼곡한 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신의 형상을 그리는 것을 우상숭배라 생각했기 때문에 오로지 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방식이 기하학적 무늬뿐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성당을 보다가 이슬람 궁전에 도착하니 확실히 다른 감각이 느껴진다. 가톨릭과 이슬람은 어찌 보면 한 뿌리에서 나온 신을 섬기면서도 그 믿음에 따라 얼마나 문화와 표현방식도 달라질 수 있는지 와 닿았다. 이 궁전 역시 기독교 세력이 이 지역을 장악하며 문을 닫게 된다. 18세기에는 완전히 황폐화되면서 집시들의 소굴로 이용된 적도 있다고 한다. 19세기를 지나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는 한때 이곳을 점령했던 이슬람 문화의 아름다움와 예술성을 보여주는 곳으로 재탄생했다. 

이슬람식의 기하학적 무늬-신에 대한 경외의 표현방식이었다

  현재 스페인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문화권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이곳은 다양한 문화가 뒤섞이며 오묘한 매력을 갖춘 곳이 되었다. 환상적인 알함브라 궁전의 야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위치한 알바이신 지구로 오르는 길은 이런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이 인도인지, 아프리카인지, 유럽인지 헷갈릴 만큼 이국적인 소품과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과 음식점이 늘어서 있다. 모로코에서 온 가죽 가방, 인도에서 온 전등과 찻잔세트 등 온갖 것이 자리 잡고 있다.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 물들어 있는 이 지역의 신비로움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이런 그라나다의 특수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들이 바로 '집시'이다.    

여러가지 문화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그라나다의 거리

  정확한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도 북부에서 시작해 비옥하고 살기 좋은 지역을 찾아 떠돌게 된 유랑민, 집시. 안달루시아 지역은 집시들이 많이 찾은 곳으로 유명하다. 집시는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 이기도 하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춤 플라멩코 역시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한 집시들이 모여 한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어우러져 춘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여행지를 스페인으로 정했을 때부터 집시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많았다. 여행자들에게는 집시는 불청객이다. 하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나로서는 평생을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떠돌면서 살아가는 그녀들의 삶과 애환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들은 내가 스페인에 간다고 하니 집시가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였으니까. 

  알함브라 궁전을 보면서도 이곳에 살았을 이슬람 왕족보다도 완전히 폐허가 된 이곳을 잠시나마 점령했을 집시들에 더 관심이 갔다. 그러던 중 알바이신 지구의 가장 윗동네에 집시들이 사는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로 인도에서 온 집시들은 피부색과 외모에서부터 유럽인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소매치기와 매춘 등을 일삼던 집시들은 항상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었다. 사회의 어떤 부분을 담당하며 함께 살아가면서도 이들은 영원한 타인이었던 것이다. 어떤 집시들은 많은 부를 가지기도 했는데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쉽게 집을 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끊임없는 박해와 내몰림 끝에 집시들은 폐허가 된 궁전이나 사람이 쉽게 닿을 수 없는 산꼭대기에 동굴 집을 짓고 살게 된 것이다. 그곳에 가보고 싶어 졌다. 

  지금도 알바이신 지구의 꼭대기에는 동굴 집에 집시들이 살고 있고, 동굴 플라멩코 공연도 열린다. 이튿날에는 집시들의 동굴 집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인적이 드문 알바이신 지구는 스페인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 시간인 한낮에 오히려 위험하고 석양이 지기 시작할 때부터 새벽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유동인구가 많다. 한낮을 피해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발길을 옮겼다. 옛날처럼 집시들이 많진 않지만 여행자에겐 위험할 수 있기에 돈과 여권을 빼두고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알바이신 꼭대기로 향했다. 걸어 올라간다면 오늘 중에 가지 못했겠지만 다행히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버스로도 종점. 한참을 달려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정상에 오르며 작아지는 마을을 바라보며 이들이 끝도 없이 내몰렸을 서러움의 시간이 느껴지는 듯했다. 

박물관에서 내려다본 풍경-멀리 알함브라 궁전이 보일만큼 높은 산 위에 위치해있다

  대부분 관광객들은 알함브라로 향했기에 알바이신 지구 끝까지 올라온 관광객은 나뿐이었다. 버스에도 나뿐이었고, 버스에 내리고 나서도 혼자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집으로 보이는 알바이신지구의 하얀 벽들의 내부는 산을 파고 만든 동굴집이라고 한다. 그 내부가 정말 궁금했지만 주거침입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 같은 관광객을 위해 이들의 집 내부를 그대로 재현한 박물관이 있다고 해서 아쉬운 대로 사크라몬테 동굴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입구까지도 꼬불꼬불 긴 길을 한참 걸어가야 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적막한 고요 속에 알함브라 궁전과 마을이 저 멀리 내다보이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힘들기보다는 오히려 벅찬 무언가가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박물관에서도 관광객은 나 혼자였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알함브라를 보기 위해 당일치기로 머물기 때문일 것이다. 

초라한 외관의 사크라몬데 동굴박물관
동굴 내부-의외로 아늑하다

  작고 허름한 박물관이었다. 별다른 안내도 시설도 없었고 조용해 보이는 아주머니 한분만이 매표소를 지키고 있었다. 화려한 볼거리는 아니었지만 실제로 그들의 생활공간을 재현한 동굴 방 한 칸 한 칸이 나에겐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원시인의 동굴처럼 흙벽에 물이 세는 스산한 분위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하얗게 칠한 벽에 침대, 책상, 부엌 모든 게 갖춰져 나름대로 아늑한 공간이었다. 이렇게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꽤 부단한 노력을 들여 흙을 파내야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중간중간 붙어있는 사진을 통해 집시들이 실제로 동굴에서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며 함께 낯선 땅에서 부대꼈을 시간을 상상할 수 있었다. 영원한 이방인으로 떠돌며 산다는 것이 서럽고 외로웠을지 몰라도 나는 그들의 자유가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도 용기도 없고, 살 자신도 없어 발이 묶인 듯 살아가는 요즘의 사람들. 잃을 것도 없다 싶다가도 한 줌 쥐고 있는 욕심을 놓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우리의 일상을 생각했다. 어떤 체면도 명분도 차리지 않고 본능에 이끌려 춤추고 노래하며 바람같이 구름같이 사는 이들의 대책 없음이 부러웠다. 

  박물관을 다 돌아보고 나서 맥주를 한잔 마셨다. 태양이 지고도 무더운 날씨에 꿀 같은 맥주였다. 그날은 유난히 사람이 없었지만 평소에는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고 플라멩코 공연도 한다고 한다. 알함브라 궁전도 좋지만 사크라몬테 박물관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본다면 그라나다에서만 할 수 있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고독한 사크라몬테 역시 참 좋았다. 

동굴에서 플라멩코를 추는 집시들

  어떤 땅에도 영원한 주인은 없다. 누구나 살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라나다는 삶을 쟁취해가는 온갖 사람들이 왔다 가는 곳이었고, 그 투쟁의 흔적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라나다, 뭐라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없는 여러 색깔의 오묘한 번짐이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주인이 여러번 바뀐 알함브라 궁전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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