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단양 [카페 산] -> 영주 [부석사]
우리 부부는 여행 갈 때, 그 지역에서 유명한 사찰에 가는 걸 좋아한다. 고즈넉하고 북적이지 않고 결정적으로 풍경이 참 좋다. 그 지역에서 가장 뷰 좋은 곳만 골라지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사찰 여행 매력에 한창 빠졌을 때, 남편이 꼭 가보고 싶다던 절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부석사'였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무량수전'이 있는 곳으로, 대체 어떻게 된 건축물이길래!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영주까지 거리가 꽤 되기 때문에 쉽게 떠나지 못하고 미루고 미루다가, 서로 일이 한가해진 어느 주말 아침. 드디어 마음을 잡고 영주로 떠나기로 했다. 이왕 영주까지 내려가는 거 부석사만 가긴 아깝다는 남편은 본인이 봐 둔 단양의 한 카페가 있으니 그곳에서 빵과 커피를 먹고 영주로 이동하자고 했다.
그런데 어째 카페로 가는 길이 죄다 산길이었다. 아니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산을 오르고 있었다.
"무슨 카페가 산 꼭대기에 있어? 여기로 가는 거 맞아? 다 흙길이고 낭떠러지고 아무것도 없는데?"라는 나의 말에 남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카페 이름이 [산]이야! [카페 산]"
그렇게 한참을 산을 올라오니 정말 산 꼭대기에 카페가 있었다. 그것도 입이 떡 벌어지게 세련된 카페가. 알고 보니 그냥 카페가 아니라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같이 하는 곳이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남편을 따라 카페 마당으로 나가보니 SNS에서만 보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이런 뷰가 있는 곳인 줄 몰랐다. 사실 여행 오기 전, 몸이 조금 안 좋았던 터라 사전에 정보를 찾아보지 못했다. 남편 역시 '뭐 그냥 카페야. 부석사 가기 전에 뭐 먹어야 하니까. 들려서 빵이나 먹고 가자'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기에 이런 뷰가 있는 곳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냥 빵 맛집 정도인 줄 알았지...
이른 아침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기에 해가 구름에 가려 조금 흐렸지만 풍경은 정말 예술이었다. 서울에서 높은 곳에 올라가 경치를 보면 맨날 빌딩 숲에 시티뷰 밖에 없었는데... 시야를 가리는 큰 건물 없이 오로지 푸르른 자연만 있다니!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느낌이었다. 좀 현실감이 없었달까?
정말 입에서 "와- 이야- 와-" 하는 말밖에 안 나왔다. 조금 과장을 보태 '자연의 웅장함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내가 만약 미리 사진으로 이곳에 대한 정보를 봤다면 이런 감동을 받을 수 있었을까?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떠나는 여행이 더 좋을 수도 있음을 느꼈다.
카페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보통 이런 곳은 경치가 다인 경우도 많은데 예상외로 빵맛도 좋고, 카페에 앉아 패러 글라이딩하는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다들 어찌나 용감한지! 그리고 강사님들이(?) 사진도 여러 장 다양한 자세로 찍어주시는 거 같았다. 웨딩 촬영 못지않았다. 이곳에서 2시간쯤 머물다가 남편이 그토록 고대하면 부석사로 향했다.
주차장을 지나 부석사 올라가는 길 입구에 있는 인공 폭포가 우리를 먼저 반겨줬다. 입구부터 뭔가 관리가 잘 되어 있음을 느꼈다. 솔직한 느낌을 말하자면 '부내'가 좀 풍겼달까. 부석사는 그 명성에 걸맞게 누군가 소중하게 잘 관리하고 있구나, 아껴주고 있구나 라는 걸 입구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아침까지 흐려서 걱정했는데 부석사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햇볕이 비췄다. 파란 하늘이 우리를 반겨주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무량수전까지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는데, 평소라면 무지하게 헉헉 거렸을 테지만 이날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그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보려면 이 정도는 가야지! 이렇게 꽁꽁 숨겨져 있어서 살아남은 거구나!
발걸음을 재촉해 쉬지 않고 걷다 보니 부석사의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천왕문' 나왔다. 문 안에는 절을 지키는 사천왕상이 있는데, 사진 찍으려고 핸드폰 들었다가 왠지 예의가 아닌 거 같아 촬영을 접었다. 감히, 사천왕 면전에 카메라를 들이대? 하고 혼날 것만 같은 느낌.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난 작은 틈으로 보이는 풍경에 마음을 잠시 빼앗겼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경이 천 년 전에도 같은 모습이었을까?
천왕문을 지나면 '범종루'라고 하는 누각이 보인다. 범종루를 향해 올라가는 길목 양쪽에 잘 가꾸어진 조경을 보며 '보존에 신경 쓰고 있구나...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전 정보 없이 떠난 여행이라, 부끄럽게도 멀리서 범종루를 보고 '저게 무량수전인가, 역시 오래된 목조 건물은 때깔부터 다르네'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과 여행을 다니면서, 이렇게 눈에 띄는 보수나 색칠 없이 나뭇결을 그대로 보존한- '거대한 건축물'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큰 절에 가면, 이렇게 다리 아래를 건너야만 비로소 본당의 입구가 보이는데, 이곳을 지날 때마다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는 느낌이 든다. 미천한 인간이 감히 부처님을 뵈러 갑니다. 이곳을 건너는 동안 사사로운 감정과 탐욕은 잠시 버려두고, 맑고 깨끗한 정신만 가지고 들어가겠습니다. 같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범종루를 통과해 뒤를 돌아보면 북과 목어가 있다. 원래는 '범종루'라는 이름답게 종도 있었다고 하는데, 19세기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단다. 지금은 새 종을 제작했으나 '한번 나간 종은 다시 들이지 않는다'는 사연과 '오래 된 누각이 범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다'는 이유로 서쪽에 '범종각'이라는 종각을 새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출처: 영주시민신문)
범종루를 지나면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있는 누각인 '안양루'를 만날 수 있다. '안양'이라는 말은 '극락'을 뜻한다고 한다. 즉 '안양루'는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하고, 안양루를 지났다는 건,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해 '극락'인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양루 앞에는 남편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무량수전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내부에서 기도나 절을 올리고 있어 사진 촬영은 따로 하지 않았다. 비록 건물 외경 촬영일뿐이지만 누군가의 염원에 방해될 수 있을 거 같아서이다. 두 눈에 충분히 무량수전의 모습을 많이 담아왔으니 만족한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줄 알았더라면 아주 멀리 서라도 한컷 정도는 찍어올 걸 그랬다.)
무량수전 오른쪽에 작은 쪽 길이 있어 올라가 봤다. 부석사, 안양루, 범종루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굽이굽이 연결된 산줄기도.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며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데, 옆에 있던 중년의 어르신들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그중 한 분이 문화재에 대해 잘 아는 듯 '무량수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분의 이야기를 귀동냥 삼아 '무량수전'의 건축 양식이 특별하고, 우리 선조님들의 지혜가 깃든 것이란 걸 알게 됐다.
'무량수전'의 건축학적인 신기함도 잠시. 이내 약간의 후회감이 밀려왔다. 이곳에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올 걸. 그랬더라면 이곳에 올라오는 동안 만났던 많은 건축물들을 그냥 스쳐가지 않고 더 잘 볼 수 있었을 텐데. 부석사의 참된 아름다움을 더 잘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운 좋게 귀인을 만나 모르고 지나쳤을 뻔했던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가는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음 일정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