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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찬 Jul 17. 2021

우리 같이 밥 먹자

허기는 늘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내 감정의 주소를 묻지 않고도 끼니를 챙겨야 하는 시간은 왔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날 허기가 문을 두드릴 때면 그게 바로 신의 장난이라 생각했다. 성가신 일이었다. 졸리면 잠을 자고 추우면 옷을 껴입는 등,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품지 않고 행하는 일의 목록 가운데 ‘배가 고플 때 밥을 챙겨 먹는다’는 항목은 없었다. 허기는 달랠 게 아니라 가만히 내버려 두면 족한 짐이었다.

무엇이든 참는 것에 능하고 허기를 외면하기는 무엇보다 쉽던 시절이 있었다.

정말로 어려운 건 끼니때가 되면 식당으로 가는 일, 편의점에 들러 뭐라도 사서 나오는 일이었다. 편의점보다는 차라리 식당이 나았다. 식당을 선택했을 때는 이미 끼니를 거르지 않기로 작정한 뒤였으므로 그저 걸어서 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편의점은 밥을 먹기는 귀찮지만 기운을 내야 할 때 택하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곳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대개 경로를 이탈했다. 끌려가듯 걸음을 옮기다 보면, 내가 두 주먹 불끈 쥐고 힘을 내면 된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문을 열고 들어가 소시지나 달걀, 삼각김밥 중 하나를 집어 계산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며 미끄러지듯 편의점 앞을 지나갔다.

학업을 지속할수록 ‘밥을 먹느냐 마느냐’는 의지가 아닌 체력의 문제로 바뀌어 갔다. 언제부턴가 빈속에 수업을 들으면 어지럼증이 일거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빈속으로 앉아 있어도 보통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이러다 언젠가 큰일이 나겠다 싶은 상황에 몇 차례 맞닥뜨린 뒤 나름의 타협을 했다. 아무리 귀찮더라도 최소한 삼각김밥 하나는 사 먹자. 공부와 수업 준비에 치여 신경이 곤두서는 날에는 효력을 잃는 다짐이었다. 학기말에는 할 일에만 온종일 매달려 있어도 불안한 날들이 많았다.

“혼자 두면 얘 또 밥 안 먹는다. 우리가 같이 먹고 가자.”

선배이자 친한 친구인 사람들은 내가 식사를 거르겠다고 하면 나를 데리고 함께 밥을 먹은 뒤 귀가하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꼭 "삼각김밥이라도 사다 줄까?" 하고 물었고 학교 밖에 있다가도 일부러 발걸음해 요깃거리를 쥐여주고 갔다. 삼각김밥을 한 입 베어 물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으면 이런 말도 들렸다. “그런 걸로 대충 때우고 그러면 나중에 골병든다.” (순화해서 이렇게 적었다.) 실제로는 이게 대체 저주인지 걱정인지 혼란스러운 표현이었는데, 제대로 된 식사를 챙기라는 속뜻 정도는 금세 알 수 있었다. 한 끼 굶는 것쯤은 늘 사소한 일이었던 내게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사소했던 적 없는 마음으로 다가왔다.

나를 홀대하는 건 언제나 나뿐이었다.

타인의 표정을 예민하게 살필 줄은 알아도 내가 만든 틀에 자신을 맞추느라 무리하는 나를 보살필 줄은 몰랐다. 허기를 내버려 두듯 나를 방치했다. 때때로 밥을 먹지 않는다는 건 자책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죄책감을 덜고 싶다는 뜻이었다.

더운 김이 나는 쌀밥 같은 말에 그렇게 마음이 데워지고 나면, 편의점 앞에서 망설이는 시간은 짧아졌고 배꼽시계가 울릴 때 하던 일을 멈추기도 수월했다. 식당에 들어가 기꺼이 수저를 뜨며 내가 받은 귀한 마음들을 한 입, 한 입 천천히 곱씹었다. 그리고 나도 말하고 싶어졌다. 내 끼니도 챙기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끼니부터 걱정한다면 그건 틀림없는 빈말이 되고 말 테니까, 그 전에 나부터 씩씩하게 잘 먹고 싶어졌다. 그런 다음에는 꼭 말하고 싶었다.

우리 밥은 꼭 먹자.

밥이 아니라 다른 게 필요할 수도 있겠지. 사실은 그런 날이 훨씬 더 많겠지. 성실히 보낸 하루가 꼭 대충 때운 한 끼처럼 속을 더욱 공허하게 하는 때가 있을 거야.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안에서는 눈치 없는 바람만 새어 나오는 날이. 값비싼 음식으로 배를 채워도 이상한 허기가 지는 날이. 그래도 밥은 꼭 먹자. 군것질은 끼니에 포함 안 되는 거 알지. 그러면 그 식탁 앞에는 내가 앉아 있을게. 곁에 내가 있을게.

내가 차려줄 것도 아니면서 채근하듯 말하는 게 마음에 걸려 나는 요리 실력을 연마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올해 들어 태어나 처음으로 음식을 만들어보기 시작했는데, 모두 10분 이내로 완성할 수 있는 간단한 것들이라 누군가를 대접하기에는 부족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를 좀 더 잘 먹이고 싶어졌으니까. 내가 만들 수 있는 근사한 요리의 종류를 늘려 소중한 사람들을 초대하겠다고 마음먹는다.

무언가 고플 땐 내게 와, 우리 같이 밥 먹자.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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