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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lly Cheon Dec 08. 2023

15 완벽함을 좇는 삶

"당신도, 나도 지금 그대로 충분합니다."

카테고리 : 예술

주제 : 바비 / Barbie


Part 01 : 완벽함을 좇는 삶

“당신도, 나도 지금 그대로 충분합니다”


어릴 적 우린 모두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선 하늘을 날기도 하고, 멋진 자동차를 타고 해변을 달리기도 하고, 세계를 여행하며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다양한 꿈을 꾸고, 그 꿈들 중 자신의 길을 찾아가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일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길인 것처럼 스스로의 생각을 포장합니다.


누구나 그렇듯 저도 어릴 적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저는 국민학교 시절에 풍경 수채화를 그려 상을 받기도 했고, 중학교 땐 만화를 그리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만화를 그리고, 만화 동아리를 직접 만들어 스스로 동아리장이 되기도 하며 ‘만화가’라는 직업을 꿈꿨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한다면 그 꿈을 제대로 실현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던 저에게 선생님은 당시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지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 주셨습니다. 그 제안을 듣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한국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보내 달라 말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제 아버지에게 ‘만화가’라는 직업은 불확실한 직업이었기에 보내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그대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꿈을 꿨지만, 꿈이 없는 상태로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저에게 그런 학교 생활은 무료했습니다.


무료한 나날들, 억압된 가정 환경 속 탈출구가 필요했던 저는 내 가족과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무런 계획도, 대책도 없이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출을 통해 겨우 제가 살던 곳, 제가 속했던 곳을 떠나 ‘경기도 평촌시’라는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전학’이라는 방법을 통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경기도 평촌시로 이사를 와 들어간 학교의 분위기는 제가 다니던 시골 학교 분위기와 사뭇 달랐습니다. 

전학을 와 만난 이곳의 친구들은 모두가 ‘좋은 대학’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선 수업 중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이는 반 내 1-2명 정도에 그쳤습니다. 물론 저 역시 그 1-2명은 아니었습니다. 꿈없이 의무적으로 가야하는 곳이기에 갔던 곳이라 수업의 대부분은 잠을 자는 시간이었을 뿐 무언가가 되기 위한 ‘배움의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니 저 역시 변해갔습니다. 꿈은 없었지만, 목표가 있는 환경에 들어가니 그들의 목표가 내 목표가 되었고 저 역시 그것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한 때 유행했던 드라마 ‘호텔리어’를 시청할 기회가 있었고, 저는 드라마 속 그들의 삶을 선망해 호텔리어라는 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시 호텔경영학과로 유명했던 몇몇 대학을 진학하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늦게 공부를 시작한 저에게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모의고사 평균 8등급이었던 제가 1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2등급이 될 순 없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 이뤄낼 수 있었던 성취는 4등급 정도. 턱걸이 수준으로 경기도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정도의 성적이었습니다. 


Part 02 : 20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할까?


만화가는 될 수 없으니, 호텔리어는 될 수 없으니 그럼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고, 고민 끝에 내린 답은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두 관심사 이외 제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경기도의 한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무언가 되고자 노력했으나, 충분치 못했던 저는 현실에 맞추어, 하지만 그중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였습니다. 


문예창작학과 입학 후, 첫 1년 매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쓰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러던 중 처음 패션 잡지를 접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모델, 멋있는 사진, 재미있는 글들을 읽으며 마음속 또 다른 꿈이 피어났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사진가’였습니다. 


감성적인 패션 화보, 멋있는 제품 화보를 보며 ‘사진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필 저는 사진 찍는 것을 즐겨하고, 고가의 카메라를 수집하는 아버지와 함께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받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여기저기 다닌 영향인지 그 직업이 매우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좋아하는 아버지라면 사진가는 반대하진 않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 입학 1년 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아빠, 나 학교 그만두고, 사진 배울래”


물론 반대하셨습니다. 만화가를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처럼.


본인이 사진을 취미삼아 하지만 그 직업이 ‘돈’을 벌어다 주는 직업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이기에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자식의 ‘안정’을 바라는 분이기에 당연한 반대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번 꿈을 포기했던 저였기에 이번엔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학교로 달려가 자퇴서를 제출했습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내린 선택이었기에 사진 공부를 시작할 때 부모님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고자 하는 것을 하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해 갔습니다. 사진학원에 등록하고, 학원비를 벌기 위해 낮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저녁 수업이 끝난 이후에는 카메라를 들고 서울 곳곳을 다니며 새벽까지 서울의 밤을 촬영했습니다. 


사진 작업을 위해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밤이었기 때문에 제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건 사람 하나 없는 서울의 밤 모습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낮밤으로 노력한 덕분이었을까요? 

사진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지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2004년 10월 바랬던 서울예술대학 수시 전형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국내 예술 대학 중 많은 작가, 배우들을 배출한 곳이어서 그랬을까요? 

서울예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반대하시던 아버지도 그제야 제 성과를 인정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서울예대에 합격했을 때 제가 원하던 것을 이루어 냈기에 제가 꾸는 꿈은 거기가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진 않더군요. 하나의 목표를 이루니 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배우고 싶었던 사진을, 원하는 곳에서 배우면서 제가 느낀 것은 ‘허탈함’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진 그 길이 제 길인지 아닌지 깨닫지 못합니다. 

경험한 후에 그것이 나에게 잘 맞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패션, 광고 사진을 하고 싶어 사진과를 지망했으나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에 다니고 상업 사진 스튜디오에서 보조사진작가로 일을 하며 깨달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패션, 광고 사진에 보이는 모델, 의상, 제품과 같은 비주얼 요소들을 기획하고 표현해내는 것이었다는 것을요.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는데, 또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대학 졸업, 사회로의 첫 을 앞둔 시점. 저는 또 한 번 패션 매거진 에디터라는 목표를 향해 과감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당시 매거진 에디터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 매거진을 출판하는 출판사의 공채에 지원하여, 정식 인턴 에디터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어시스턴트’ 즉, 보조 에디터로 일을 하며 콘텐츠 에디팅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갔으나 졸업은 하지 않았고, 글을 쓰는 것과 전혀 연관이 없는 사진을 전공한 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당시 매거진 어시스턴트의 월급은 60만 원.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은 아님이 분명하고, 일평균 10시간, 마감 시즌 평균 새벽 3시 퇴근하고 쪽잠을 잔 후, 다시 출근하는 등 업무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지만 꿈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일하며 만난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 덕에 재밌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계가 있고, 한계가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매거진 어시스턴트 생활을 한 지 1년쯤 접어들었을 때 체력적으로 한계가 찾아왔습니다. 촬영 준비, 밤샘 근무 그리고 연달아 이어지는 촬영으로 인해 36시간쯤 잠을 자지 못하고 일을 하니, 이것이 진정 내가 바라는 것이 맞는지 회의감이 들고, 참을 수 없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삶엔 미래가 없다 느껴졌고, 그렇게 또 그만두었습니다.


도움 없이 이루고자 했으나,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더 노력 해야 했다 말할 수도 있지만, 저는 스스로 할 만큼 했다고 다독였습니다.


이후 승무원을 지망하기도 했지만, 여러 번의 면접 탈락에 포기하고, 대신 항공사에서 일하고자 작은 저가 항공사에서 근무했지만, 경영 악화로 인해 전 직원이 권고사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권고사직을 당하고 나니 제가 마주한 현실이 너무나 힘이 들고, 어느 한 가지 깊게 이어가지 못한 저 스스로가 너무 미워졌습니다.


Part 03 : 30대 그리고 새로운 시작


“한 가지만 할 걸.. 한 가지만 했으면 지금쯤 뭐라도 되지 않았을까? 나는 왜 어느 한 가지 진득이 해내지 못하는 걸까?”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수많은 도전을 했으나 이제까지 해온 그 모든 일들이 어느 하나 연관성이 없어, 전문성과 성과를 바라는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기에 그 기준을 달성하지 못한 저 스스로를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곳에서는 내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에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 시드니로 도망갔습니다.


당시 살던 서울의 자취방을 나오면서 받은 보증금 500만 원을 종잣돈 삼아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감사하게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만난 친구의 도움으로, 그 친구가 운영하는 작은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직 일을 시작으로 카페 바리스타, 식당 주방 보조, 사무실 청소, 호텔 하우스 키핑(고등학생 시절 호텔리어를 꿈꿨으니 어떻게 보면 꿈을 이루긴 했습니다.)까지 다양한 일을 하며 ‘안정된 삶’을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 주방 일을 하던 도중 칼에 왼 손바닥이 찔리는 사고를 당했고, 대학 병원 응급실로 곧장 달려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회복되리라 믿었던 왼손은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걱정이 앞서 큰 병원으로 달려가 진료를 받아보니 왼손의 근육 신경이 죽어가고 있었고, 수술하지 않으면 손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수술 비용은 1,500만 원.


당시의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기에 호주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았고, 다행히도 손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고민은 더 깊어졌습니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저는 만화가, 호텔리어, 작가, 사진가, 매거진 에디터, 바리스타, 주방보조, 청소원, 기념품 판매 점원, 항공 승무원, 항공사 직원까지, 다양한 꿈을 꾸고,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파편화된 경험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더 이상 저 스스로 무엇이 되어야 할지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길을 잃었다 해서 찾아가는 것을 멈출 수 없으니,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나를 찾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습니다. 고향에서 누나의 사업을 도와주며 당시 주목받던 직업인 앱 개발자가 되기 위해 코딩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미숙한 실력으로 간단한 여행 앱을 개발해 여러 스타트업에 개발자로 면접을 보러 다녔습니다.


하지만 30살이란 나이에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한다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면접 탈락을 경험하며 점점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제야 개발 직군뿐만이 아닌 제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직업이라면 무엇이 되든 일단 시작해 보자 생각했습니다.


면접을 봤던 여러 회사 중 서울의 한 마케팅 대행사에서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마케터’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 몇 달간은 마케터라는 직업이 나와 잘 맞을까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일을 하며 이 직업을 통해 내가 가진 능력들을 잘 풀어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사진을 찍는 능력, 좋은 비주얼을 보는 감각, 생각을 풀어낼 수 있는 글쓰기 능력


마케터로써 필요한 기본적이지만 중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느꼈고, 그런 느낌이 들자 이제 다른 길은 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나의 길을 찾았으니까요.


그 이후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늦은 나이, 남들보다 늦게 출발 했으니 이제 제가 해야 할 일은 남들보다 더 숙련된 마케팅 실력을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강의를 듣고,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읽고, 실무에 적용하며 더 깊게 제 직무에 파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더 좋은 직장, 더 높은 연봉을 향해 계속 나아갔습니다. 


마케팅을 시작하고 6년쯤 지났을 무렵,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번아웃’이 찾아왔습니다. 


마케팅 대행사에서 전문가로 경력을 쌓아 왔지만 ‘직장인’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경험의 폭은 제한적이었고,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는 점점 더 하나의 직무에 전문성을 원했고, 원하지 않는 인간 관계조차 끊어낼 수 없는 환경, 하지만 이 삶을 지속하지 않으면 잘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회사 생활은 점점 망가져 갔습니다. 


회사라는 곳에 나를 묶어두지 않으면 나로써 살아갈 수 없다는 현실이 점점 힘이 들었습니다. 


번아웃이 왔을 때, 나를 돌아봤어야 했는데 책임져야 할 것들이 점차 많아져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번아웃은 ‘저성과’라는 인사평가로 이어졌고, 원하지 않게 회사를 나와야 했습니다. 살아 오면서 두번째, 36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겪은 권고 사직은 깊은 우울과 불안을 몰고 왔습니다. 


36살 4월, 우울과 불안이 찾아왔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좋아하던 운동도 할 수 없고, 티비보는 것,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아니 할 수 없었다기보단 잃었다는 표현이 정확한 거 같습니다. 즐거웠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즐겁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던 것은 좋아하는 계절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 하나였습니다. 

여름이 오면 마냥 좋아질 거랑 희망 한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날이 점점 따뜻해질수록 조금씩 몸을 움직일 수 있었고, 그제서야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청소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지나온 제 회사 생활을 정리하는 등 저를 돌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 우울과 불안이 찾아왔을 때처럼, 이번에도 그 자리에 멈춰 있을 순 없었습니다. 

나를 돌보고, 세상에 나아가고 그렇게 또 살아가야 하니까요. 


이후 3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러 새로운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번엔 꼭 잘해내고 싶었습니다. 더 오래, 더 열심히 살아보자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제 위치에서 열심히 하다 보면 제가 담당한 브랜드를 제가 바라던 모습으로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지만, 근무 시작 2개월쯤 지났을 무렵, 보수적인 사내 문화 속 이미 갖추어진 시스템을 바꾸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낸다는 것은  개인의 역량으론 어렵다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또한 몇 개월에 걸쳐 심리적 안정감을 얻었는데,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점점 무력해지는 제 모습을 보며, 이제는 맞지 않는 곳에 억지로 나를 맞추며 살기보단 나 스스로 일어나야 할 때가 왔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회사, 일하고 싶어하는 회사, 인정받는 회사였지만 제 기준에선 그렇지 않았습니다.


입사 후 2개월, 수 많은 내적 고민과 갈등 끝에 회사를 떠나 홀로서기를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잃은 것보단 얻은 것이 더 많았던 거 같습니다. 회사를 위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기획을 하며 나에게 이런 많은 능력들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고, 제 능력들을 잘 활용한다면 이젠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제 스스로를 위해 일할 수 있을 거 같다라는 자기 믿음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 자기믿음을 기반으로 얼마전부터 프리랜스 마케터, 그리고 매거진 언비트 에디터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 하지 않았던 일들이라 완벽하지 않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좋은 거 같습니다. 완벽하기 보단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니까요. 


그렇게 바라던 이상향을 버리고 나오니 저를 찾아주는 사람들도 오히려 많아졌습니다. 불안했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저는 꿈을 꾸길 멈추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마음 어딘가 항상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불안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사회가 만든 기준에 맞추어 더 완벽히, 더 열심히, 더 안정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준에 맞추려 노력하면 할 수록 오히려 더 깊은 불안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최근 다양한 심리학 서적을 읽으며 불안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닌,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란 걸 알았고, 어렵게나마 그 사실을 받아드릴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그 순간 어떤 감정으로, 어떤 사정으로 그런 선택들을 했었나 돌아보는 과정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많은 날들이 대부분 절망적이고, 슬프고, 우울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제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행위를 통해 행복했던 날, 즐거웠던 날, 성장하던 날들에 대한 기억들도 다시금 살려내고 있어 한편으론 내가 만들어 갈 또 다른 미래가 기대되기도 합니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일


그것은 평생에 걸쳐 해온 일이고 앞으로도 해야할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들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분도 제가 그랬던 것처럼 남들의 기준에 맞추어 스스로 완벽의 기준을 세우고, 그 완벽함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진 않나요?


언젠가 강호동의 한끼줍쇼 프로그램에서 강호동이 한 어린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 될 건지 물어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효리는 아이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아무나 되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누가 되기보단 그저 내가 되는 것 말입니다. 


당신도, 나도 지금 그대로 충분합니다.


Part 04 : 불안을 딛고 일어난 바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불안과 함께 살아갑니다.


영화 ‘바비’는 1959년 미국 마텔사에서 만든 인형 ‘바비(Barbie)’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이전, 남성들은 주로 전쟁터로 나가 적과 싸웠고, 여자들은 미국 사회 곳곳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본국으로 돌아온 남성들은, 사회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이어 가기 위해 여성들을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밀어 넣으며 오직 아이를 돌보고, 가정을 살피길 강요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관점은 그렇게 아이들의 장난감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당시 남자 아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여러 장난감을 만들었지만, 여자 아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꿈을 꾸게 하는 것이 아닌 ‘보호’와 ‘양육’이란 고정 관념을 가르칠 목적의 3-4등신의 아기 인형만을 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시대 상황 속, 마텔의 창업자인 핸들러 부부는 자신의 자녀인 아들 켄과 딸 바바라가 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 남자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은 많지만, 여자 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자 아이들도 남자 아이들과 ‘똑같이’ 다양한 꿈을 꾸길 바라며 ‘바비’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때때로 금발, 백인 미녀 모습의 ‘전형적인 바비’가 만들어 낸 외모 중심적이고, 비현실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인해 논란의 중심이 되기도 했지만, 사회적 관념에 의해 다양성이 제한되던 어린 아이들에게 바비는 고정된 관념에 도전하고, 다양한 꿈을 꾸며, 자신이 원하는 누구든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기 전 영화에 대한 리뷰를 먼저 보았을 때, 대부분의 리뷰들이 페미니즘/성차별 이슈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을 보고, 요즘 자주 보이는 페미니즘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일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시청을 하는 동안 저는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가 아닌 것 같다라는 느낌을 크게 받았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마고 로비는 이 영화에 대해 “페미니즘 DNA에 기반하고 있는 휴머니스트 영화”라고 평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단순히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 영화의 내용을 단정지을 수 없다 생각했습니다. 


제가 본 바비 랜드의 ‘바비’는 여성의 성평등을 위해 싸우는 페미니즘의 대표가 아니었습니다. 


‘바비’는 대통령, 의사, 변호사, 작가, 예술가 등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아닌 사회가 바라는 완벽한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내면의 자아’ 였고,  현실 세계에서 ‘바비’를 가지고 놀던 ‘글로리아’는 진정한 자아 실현은 하지 못한 채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평범한 자신’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캔은 우리가 현실을 살며 경험하는 다양한 ‘불안’을 가진 또 다른 자신일 뿐이고, 

이상한 바비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키워주는 책처럼 느껴졌습니다.


또한, 마텔사의 대표는 변화하고 싶지만, 변화할 용기가 없는 대기업, 마지막으로 바비 랜드는 우리의 마음속 깊은 내면세계,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그 자체였습니다.


영화 속 ‘바비’는 완벽하다고 믿었던 삶 속에 생긴 이상한 변화를 느꼈지만, 그 변화가 두려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원래의 완벽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캔과 함께 현실 세계로 나갑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녀가 마주한 것은 수많은 꿈을 꾸고, 노력했음에도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한 그녀 자신이었고, 다양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학벌, 경력과 같은 것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점차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던 ‘바비’를 마텔사의 직원들이 찾아내게 되고, ‘바비’

는 다시금 완벽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갖고 그들과 동행합니다.

 

자신을 만든 ‘마텔’이기에, 그 곳으로 가면 자신이 꿈꾸던 이상향이 존재하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바비’가 마주한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닌, 마텔사가 원하는 방향에 맞게 자기를 가두려는 ‘오래된 가치관’이었습니다. 


그 오래된 가치관에 위화감을 느낀 바비는 그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고, 도망치는 도중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온 현실의 자신. 


즉, 글로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에 지쳐 자신의 본 모습을 잃어가던 ‘외면의 자신’과 오랜 시간 자신의 자아를 지켜온 ‘내면의 자신’이 만나 서로가 서로를 잃지 않고 있었구나 느끼는 새로운 ‘출발점’이었습니다. 


현실에서 만난 두 자신은 다시 완벽했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비 랜드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바비 랜드로 돌아간 두 자신이 마주하게 된 것은 ‘불안’이 변화시킨 달라진 바비 랜드, 내면의 모습이었습니다. 켄과 함께 온 ‘불안’은 꿈을 잠식하고,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바꾸려 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발견, 새로운 출발. 


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마주하며 생긴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내면 깊숙히 파고들어 나 자신을 파괴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불안’은 두 자아, 바비와 글로리아를 다시 분열 시킵니다. 


글로리아가 불안에 잠식당한 바비를 내버려 둔 채, 다시 현실로 돌아가 ‘평범한 삶’을 살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우울한 결심 끝에 현실로 돌아가던 글로리아에게 그녀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는 친구가 나타납니다. 

바로 그녀의 딸 ‘사샤’였습니다. 


‘사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주저 앉고 싶어 하는 엄마 ‘글로리아’를 향해 말합니다. 


“엄마는 항상 스스로를 믿었잖아. 완벽하진 않아도 나아지게 할 수 있어. 엄마가 꿈꾸는 것은 이상하고, 우울하고, 미쳤어. 엄마가 감추려고 하는 모습이지. 하지만 그대로 멋있어. 그러니까 포기하지마.”


친구의 말에 용기를 얻은 나는 불안에 잠식되어, 삶을 끝에 서있는 나를 구하기 위해 돌아갑니다. 

사샤의 말에 용기를 얻은 글로리아는 절망에 빠진 바비를 구하기 위해  바비랜드로 돌아갑니다. 


글로리아는 다시 돌아간 바비랜드에서 사회의 기준에 맞추어 꿈꾼 자신의 모습이 아닌, 더 다양한 꿈을 꿨던 여러 명의 자신, ‘바비들’과  절망에 빠져 있는 ‘바비’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우울의 늪’에 빠져 있는 ‘바비’의 모습을 보고, 슬픔과 분노와 연민의 감정을 담아 말합니다. 


“내 자신으로 사는 거 진짜 힘들다. 이렇게 아름답고 똑똑한데, 아무것도 될 수 없고,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찢어져. 우린 항상 성공을 강요받으면서 실수와 실패는 인정되지 않지. 사람들은 건강한 모습을 원하지만 동시에 마르고, 근육질이어야 해. 돈은 항상 필요하지만 돈 얘기를 하면 속물 취급 받아. 

결단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라면서 성격도 좋아야 하고,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의 생각도 들어야 한다고 말해. 내 스스로, 혼자 행복해야 한다면서 내 얘기는 하면 안 돼. 일을 완벽하게 해내길 바라는 동시에, 팀원들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

 

사회 때문에 불안해서,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들에 대해서도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한대. 미친 거지. 조언하면 불평한다고 욕이나 먹어. 외모 관리는 필수지만 너무 예뻐서 남자를 부추기거나 친구의 적이 되면 안 돼. 친구와 함께하면서도 튀어야 하거든. 항상 감사하면서도 불평등한 사회란 걸 잊어선 안 돼. 그러니까 그걸 인지하는 동시에 감사해야지. 늙어서도 안 되고, 무례도 잘난 척도 금지. 이기심도 좌절도 안 되고, 실패도 두려움도 돌발행동도 절대 금지야. 너무 어렵고, 모순투성이지만 포상도 감사 인사도 없어. 그리고 결국엔 내 방법은 다 틀렸고, 전부 내 잘못이래. 나 포함해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 마음에 들려고 자길 옥죄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그저 나란 이유로, 내가 사회가 만든 기준에 맞춰 살다 불안 속에 잠식당해 스스로를 잃는다면 나는 대체 뭘 어떡해야 해?”


진심을 담아 내뱉은 글로리아의 말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바비들’을 깨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능성을 다시금 깨달은 ‘바비들’은 ‘글로리아’와 ‘바비’와 함께 힘을 합쳐, 

켄을 따라온 ‘불안’으로 잠식당한 바비랜드를 구하기 위해,

‘불안’으로 자신을 잃은 또 다른 바비들을 만나 네가 느끼는 ‘불안’은 허상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덕분에 ‘바비들’은 하나 둘 자신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불안’을 몰아낸 바비들은 ‘불안’이 변화시킨 바비 랜드를 그것이 존재하지 않던 그 이전 순수한 모습으로 돌려놓을 길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이 만든 길은, 그녀들만의 것으로 생각하는 ‘불안’을 가진 켄에게는 더 깊은 절망만을 가져다줄 뿐이었습니다.


‘순수의 길’ 위, ‘불안’이 가져온 슬픔에 빠진 켄을 발견한 ‘바비’가 다가가 말합니다.

“괜찮아? 울어도 돼. 나도 울어봤는데 기분 괜찮더라.”


내면의 나, 바비는 불안에 빠져 힘들어하는 또 다른 자신인 켄을 ‘자기연민’ 합니다.

고생했다고, 최선을 다했다고, 울어도 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건네는 바비를 향해 켄은 말합니다.

“내가 느끼는 이 불안조차 너 없인 아무것도 아니야.”


두려움과 슬픔에 떨고 있는 켄에게 바비가 말합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나 없어도 괜찮을 거야. 너는 그냥 자신답게 살면 돼”


그 말을 들은 켄은 ‘불안’을 이겨내고, 깨어납니다.

그리고 ‘바비’ 본인 역시 그녀만의 ‘불안’을 이겨내고 깨어납니다.


그렇게, 드디어 ‘진정한 자신’이 됩니다.


이 영화를 통해 제가 발견한 것은 가부장제가 만들어 낸 세상을 향한 여성들의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인 개념을 소재로 하고 있어 찾아내기 어려웠지만, 영화 ‘바비’는 페미니즘 영화가 아닌 오래된 가치관을 가진 사회를 살아가며 잃어가는  자아를 발견하고, 불안을 극복해 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였습니다.


저는 최근 수많은 꿈을 꾸고, 수많은 도전을 하고, 수많은 이직을 한 끝에 입사한 대기업을 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박차고 나왔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한동안 제가 내린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내린 이 결정을 이어 나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바라던 회사를 제 발로 나와보니 불안한 동시에 편안했습니다.

아무도 남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던 제 발자취 위에, 저를 찾아주고, 응원해 주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돌아보니 이게 제가 원하던 삶이었던 거 같다 느낍니다.


완벽한 삶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한 삶을 바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불안은 아마 사라지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 불안과 함께 내 마음을 살피며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느낍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든 또 다른 불안이 찾아오겠지만,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완벽 속에 갇혀 계신가요?

이제 그만 옷장을 열고 나와 불안에 떨고 있는 자신을 돌봐 주시길 바랍니다. 


언비트 에디터 

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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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bt_essay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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