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기억, 경험의 파편으로 빚어진 오늘"
당신의 지난 날들은 어떤 날들이었나요? 어쩌면 별일 없는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었을 수도 있고, 되짚어볼수록 마음이 뜨거워지는 슬픔과 괴로움의 연속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제 지난 날은 마치 수 만그루의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한 낮의 숲을 홀로 헤매 온 시간에 가깝습니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과 무성한 풀들로 길은 보이지 않고, 높게 떠있는 해는 숲을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주지만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숲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 숲에 걸어 들어간 건 결국 ‘나’였습니다.
사람의 발자국 흔적 없는 숲에 들어가, 헤매고 다시 돌아와 다른 곳을 향해 걷다 또 헤매일지라도 그 모든 선택의 주체는 언제나 나였다는 사실을 아주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저는 경기도에 위치한 4년제 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진학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참여했던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으며 ‘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당시 좁고, 답답한 시골 생활이 싫어 가출했던 경험으로 가지게 된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 이 두가지가 제 발걸음을 문예창작과로 이끌었습니다.
사실 글쓰기를 특별히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부모님에게 받은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고, 그 마음이 저를 책상 앞에 앉혀 더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와 보답으로 경기권 4년제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저는 그 때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내가 해야만 한다고 믿은 일’에 가까운 선택을 내렸습니다.
대학 입학 후 사진을 취미로 삼아 활동하고 계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진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동기, 선배들과 함께 다양한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어두운 암실에서 직접찍은 사진들을 현상하며 사진에 대한 애착을 키워갔습니다.
지루했던 강의 시간보단 활동적이고, 재밌던 동아리 경험이 저에겐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느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선배, 동기 할 것 없이 모여 각자가 써온 글을 발표하는 시간을 갖았고, 한 선배가 써온 글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글을 깊고, 미려하면서도 때로 화려했습니다.
나의 글이 어디쯤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기에, 다른 이들의 문장은 얼마나 깊이를 가지고 있을지 괜스레 겁이 났습니다. 그리고 글에 대한 ‘막연함’과 사진에 대한 ‘애정’은 저를 또 다른 갈레길로 안내했습니다.
그렇게 2학년 1학기를 맞이하던 때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예고도 없이 부모님께 전화해 통보하듯 자퇴하겠단 말만 남기고, 다음 날 곧바로 학교로 달려가 자퇴원서를 접수했고, 되돌려 받은 학비로 사진학원을 등록했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학원비, 생활비를 도움받을 수 없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히 나의 몫입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카페 알바를 하고, 6시부터 9시까지 학원 수업을 듣고, 밤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돌며 대학 입시를 위한 사진을 찍는 생활을 6개월간 지속했습니다. 그 결과 다행스럽게도 서울예대 사진과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예술계열 대학 중엔 명문으로 꼽히는 대학 중 한 곳이기에 갑작스런 자퇴에 충격받은 부모님의 우려도 조금은 누그러졌습니다.
이때의 저는 패션 디자이너인 누나, 사진 작가로 활동 중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패션, 상업 사진 작가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들어간 학교에서 제가 배우는 것들은 어딘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껴졌습니다. 제가 꿈꾼 세계는 빛, 모델의 움직임, 연출 등이 살아 있는 것만 같은 현장이었지만 학교가 가르치는 사진은 개념과 이론, 예술적 사유의 세계에 가까웠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사진’과 학교의 ‘사진’은 서로 다른 언어였던 것입니다. 물론, 사진의 개념과 이론, 예술적 사유와 같은 것들을 밑바탕으로 두어야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의 저는 압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는 그 단단한 기반을 보지 못한 채 내가 원하는 세계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만들어 낸, 내가 보고자 했던 편협한 시선 안의 세계만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봐야 할 것은 무엇인지 보지 못하고, 동기 친구들과의 추억 외 가치있게 느껴질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군입대를 앞둔 2학년 저는 휴학계를 내고, 입대 전 생애 처음으로 한국이 아닌 해외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대만을 경유해 방콕까지 약 일주일간의 짧은 여행이었습니다. 이 여행은 제가 가지고 있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충남 연기군 연기면 연기리에서 조치원읍, 서울, 한국을 넘어 세계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태국의 공기는 묘하게 느긋했고, 거리는 자유로웠으며, 사람들의 움직임엔 활기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선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이었습니다. 군입대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지쳤던 마음이 처음으로 풀려난 것만 같았습니다.
처음 느껴본 그 감정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버겁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뒤에도 마음은 계속 흔들렸습니다. 현실은 그대로였지만, 제가 느낀 그 감정은 이미 이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은 이미 한국을 떠나 있었고, 몸만 억지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입대를 미룬 후 2-3개월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시 여행을 가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윌리엄’을 만났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온 편안한 눈빛과 조용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함께 있는 시간은 묘하게 안정적이었고, 그 감정이 낯설지 않아 자꾸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그를 만난 뒤로 군입대는 더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군대에 다녀오면 지금의 흐름이 끊어질 것 같았고, 다시는 이 시간을 이어갈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며 그는 조용히 싱가포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곳에서는 일 년만 일해도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되면 군대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될 거라고. 그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닌 당시의 나에게 하나의 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향했습니다.
영어 몇 마디밖에 하지 못하던 저에게 그는 자연스레 말을 가르쳐주었고, 지낼 곳을 찾아주었으며, 낯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 시절 그의 그런 배려에 많이 기대고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 있는 동안 저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뒤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고, 그 인연들 덕분에 프랑스 출신 사진가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낮선 도시의 맑은 하늘과 초록이 무성한 풍경 속에서 사진을 배우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1년을 보냈습니다. 짧았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세계가 얼마나 넓을 수 있는지 보여준 첫 번째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주권은 생각만큼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정책은 달라졌고, 상황도 변했고, 군대 문제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싱가포르에서의 삶은 조용히 끝을 맺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뒤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은 또 한 번 방향을 틀었습니다. 사진을 배우다 보니 기술적인 완성보다, 사각 프레임 안에 연출된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일에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글과 이미지를 함께 다룰 수 있는 패션 에디터라는 직업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저는 맨즈헬스 잡지사의 에디터 어시스턴트로 입사했습니다. 월 60만 원, 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바쁜 날도 있었지만, 그 시간들이 마냥 힘들게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매달 잡지가 발간될 때마다 ‘천성민’이라는 이름 석 자가 활자 속에 새겨지는 순간, 정말로 꿈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맨즈헬스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한 지 1년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날은 유난히 일이 몰린 날이었습니다. 오전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업무를 마치자마자, 다음 날 촬영을 위해 잠시 눈을 붙였고 새벽 2시에 다시 지방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하루는 결국 30시간 가까운 노동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꿈을 좇느라, 나를 소모시키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30시간의 하루 이후, 마음속에서는 조용한 균열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바라보던 꿈이었지만, 그 꿈이 나를 지탱해주기보다 소모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선명해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번아웃에 가까운 회의감에 휩싸였습니다. 잠시 다른 일도 시도해봤지만 오래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몸이 아닌 마음이 먼저 지쳐 있었고, 그 길을 더 이상 걷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시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그때 떠올린 것이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직업이었습니다. 하늘을 오가며 세계를 경험하고, 정해진 틀을 잠시 벗어날 수 있다는 그 점이 나를 끌어당겼습니다. 그 이후로 약 1년 반 동안 승무원을 준비했습니다. 여러 항공사의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결과는 모두 아쉬움으로 끝났습니다.
그래도 항공사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대한 동경, 세계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들은 쉽게 식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캄보디아 국적의 작은 항공사에서 운항지원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승무원은 아니었지만, 항공업계의 한가운데에서 일하게 된 셈이었습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일했습니다. 되지 못한 승무원이라는 꿈의 주변에서라도 머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름의 의미를 찾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런 사업 악화로 권고사직을 당했고, 다시 길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오래 이어가고 싶었지만, 상황은 내 뜻과 다르게 흘렀습니다. 글쓰기, 사진, 승무원 준비, 항공업계에서의 경험들은 서로 맞물리지 않은 채 흩어져 있었고, 그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서른이 된 나는 사회가 기대하는 ‘자리 잡은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무엇이 되어야 하는데, 그 무엇이 되지 못했고, 무엇이 되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워킹홀리데이를 택해 호주로 도망쳤습니다. 한국에서 계속 부딪히던 현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또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삶은 싱가포르에서 경험했던 설레는 낯섦과는 전혀 결를 가지고 있었고, 마음속에 쌓여 있던 부담감도 호주에선 오히려 더 또렷해졌습니다.
기대보다 현실이 먼저 나를 압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식당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왼손을 크게 다쳐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6개월 남짓한 시드니에서의 삶은 또 한 번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정말 막막했습니다. 싱가포르도, 호주도, 내가 선택했던 길도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고, 마음은 텅 빈 상태로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렇게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며칠을 보내다가 결국 본가로 돌아가 부모님이 하시던 일을 도우며 지냈습니다. 하루가 길게 이어지는 반복 속에서, 약 10개월이 흘렀습니다.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바라보며,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 스스로에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되돌아온 시간이 나를 위로하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면, 다시 움직일 힘조차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저는 서울로 올라가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다시 한 번 나를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회사를 살펴보던 중 마케팅 대행사의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곳에 지원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케팅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일과 지금까지의 제 경험이 어떤 연결을 갖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면접에서 그들이 관심을 가진 것도 제가 가진 ‘콘텐츠 능력’이라기보다는, 회사에서 필요로 하던 사진 작업을 맡길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렴한 비용으로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저는 그 자리에 우연히 들어맞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멈춰 있는 것보단 나아가는 쪽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마케팅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행인지 마케팅 업무는 예상보다 저와 잘 맞았습니다. 오랫동안 흩어져 있다고만 느꼈던 글쓰기와 사진의 경험이 처음으로 하나의 자리에서 쓰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써온 문장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의 콘텐츠로 이어졌고, 카메라를 들고 보낸 시간들은 뷰티 브랜드와 공공기관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 시기부터는 거의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습니다. 적은 연봉으로 시작한 탓에, 실력을 쌓아 이직하고 더 나은 조건, 더 나은 환경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생각만 품고 있었습니다. 마치 멈추면 바로 뒤처질 것처럼, 쉬어가면 안 된다는 강박처럼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 더 나은 곳만을 바라보며 달렸습니다.
“지금 이 나이면 남들은 이 정도 집에, 차에, 능력을 가지고 있겠지.”
삶은 안정을 찾기 시작했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 저는 ‘비교하는 마음’에 스스로를 내밀었습니다.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잘 가고 있는 건지 끊임없이 재고, 확인하며 조금이라도 느려지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 흩어져 있던 제 조각들은 아주 느린 속도로, 그러나 분명히 한 방향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러 회사를 거치며 살아냈고, 버텼고, 때로는 배웠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던 걸음이 조금씩 제 속도로 바뀌어 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 회사를 앞두고 태국에서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자살 소식을 들었습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웃고, 서로를 응원하며 보낸 친구였습니다. 힘들 때마다 되려 제가 더 많은 위로와 공감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던 친구였고, 자주 보진 못해도 항상 그렇게 거기 있을 것 같은 친구였기에, 그의 죽음은 제 삶에 깊은 균열을 남겼습니다. 애도의 감정 뒤편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슬픔보다도, 공허함보다도 더 선명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마침 새해 전날이었습니다. 새해를 앞두고 오랜만에 방콕에 가니 다 함께 모여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며 새해를 맞이하자는 약속은 화려하고 멋진 식당이나 술집이 아닌, 그의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날 처음으로 공황을 겪었습니다. 장례식장을 나와 이어진 술자리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순간 그가 여기 없다는 사실에, 그리고 내일은 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그 생각들은 제 몸을 잠식했고, 가슴팍에 뜨거운 열기와 거침없이 뛰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울렸습니다. 처음 겪는 ‘죽음’이라는 느낌으로 놀라 소리지르고, 넘어지다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인근 응급실에서 겨우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응급실에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안정을 되찾는 시간동안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에 멤돌았습니다. 나는 죽고싶지 않다. 나는 하고싶은 것이 많다. 아직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것 같은데, 죽을 순 없다. 퇴사를 이미 예정했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 제 생각은 더 명확해졌습니다.
모아둔 돈은 없고, 딱히 일을 구할 수 있는 대책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준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머물러 있다면 내가 내가 아닌 채로 죽을 것 같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촉망받는 과학자에서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나로호 발사에 기여하면서 명성이 쌓이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연극 한 편을 보았다. 「단지 15분」이라는 연극이었는데 극 중 주인공은 몸이 이상해 병원에 갔다가 ‘15분 후에 죽습니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는다. 병원 문을 나서는 주인공에게 전화 한 통이 온다. 재산상속을 해줄 테니 얼른 서명을 하러 오라는 할머니의 전화였다. 15분 뒤에 죽는데 유산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잠시 후 구애하던 여자로부터 전화가 온다.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일 테니 얼른 오라고 했다. 15분 후에 죽는데 결혼이 무슨 소용인가. 이어 세계적 과학 학술지에서 전화가 온다. 당신의 논문 게재가 확정되었으니 어서 게재료를 내란다. 그게 다 이제 무슨 소용이람. 남자는 15분 앞에서 세상의 모든 욕망이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오열한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남은 15분을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연극은 그렇게 끝이 났다.”
- 오십, 나는 재밌게 살기로 했다. 이서원
죽음을 앞둔 순간 당신은 어떤 선택을 내릴까요?
퇴사 후, 낯설 만큼 조용해진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피하고만 있던 내 삶의 조각들을, 처음으로 마주 앉아 바라보았습니다.
글쓰기, 사진, 싱가포르, 에디터, 항공사, 워킹홀리데이, 마케팅… 짧은 20대의 시간 속에 쌓인 선택들은 하나의 장르가 아닌, 서로 다른 장르들이 마구 뒤섞인 서사처럼 보였습니다.
그저 흩어진 조각들. 어디에 맞춰야 할지, 무엇이 전체를 이루는지조차 알 수 없는 파편들.
그 순간의 나는, 내 삶이 어떤 이야기였는지조차 설명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때 나의 고민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는 고정적인 목표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경험에서 그것들을 배웠는지, 그리고 이 조각들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더 많았습니다.
직업이라는 ‘이름’보다 그 일을 하는 ‘나라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싶은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무엇’에서 ‘어떤’으로 내 삶의 방향성이 전환되는 그 지점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닌 오랜 시간 서서히 나를 밀어오던 흐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없는 일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폄하하는 사회에서 자랐다. 그러다 보니 자꾸 그런 자리가 없나 기웃거리게 된다. 그런 자리는 잘 없을 뿐만 아니라 있다 해도 경쟁자가 무척 많아서 선택받기도 어렵다. 하지만 세상이 가치를 부여하는 일만 일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우박 쏟아지듯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오십, 나는 재밌게 살기로 했다. 이서원
그렇게 한참을 앉아 나를 마주하니, 흐릿하던 길이 아주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였던 선택들과 경험들은 사진, 글, 마케팅, 영어, 디자인, 브랜드 기획이라는 이름의 조각들로 남아 지금의 일—프리랜서 마케터, 매거진 에디터, 예술 사진 작가라는 자리—를 이루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죽음, 불안과 우울, 공황의 시간들은 제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어떤 의미를 저에게, 사람들에게 건네야 하는지를 말없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내가 나다워지고 나날이 나다움을 추구할 때 공허함은 사라진다."
- 오십, 나는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 이서원
저는 그동안 더 나아지기만을 기대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잃어가던 자리에서 물러나 스스로를 바라보자, 과거의 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지금의 나를 조용히 채워주었습니다.
“무엇이 혼자 있는 것을 즐겁게 할까. 그건 자기를 좋아하고 자기에 대해 궁금해하면 된다. 자기 자신은 평생 그 속을 들여다보아도 질리지 않는 유일한 존재다. 나에 대해서는 수많은 질문과 답이 가능하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만 놓고 보더라도 정말 많은 답이 떠오른다. 거기에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더하면 갑자기 진지해진다. 그리고 ‘정말 좋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인가?’를 묻게 되면 나에게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 질문 하나가 과학자를 수도자로 만든 것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 오십, 나는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
저는 사실 과거의 나 자신을 그다지 사랑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더 나은 삶,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삶을 살기 위해 내렸던 선택들이지만 무엇 하나 완벽한, 완성된 선택은 아니었고, 보이는 것 또한 어느 하나 연관성이 없어 나의 선택은 그저 미숙한 어린아이의 철없는 모습으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압니다. 지난날의 미숙한 선택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그리고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의 지난 선택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흩어져 있어 보이는 그 모든 조각들이 언젠가 당신을 완성해 갈 것입니다.
이제야 나무가 무성한 숲을 벗어날 길이 보이는 듯 합니다. 다음 선택이 그 숲을 빠져나갈 수 있게 해줄지 아니면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갈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가 선택한 이 길을 끝까지 한번 걸어보려 합니다. 앞으로 살 날은 길기에, 그 선택들이 어떤 나를 만들지, 어떤 길로 나를 인도할지 아직은 궁금합니다.
길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불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 너머에 어떤 내가 되어 있을지, 어떤 나를 발견하게 될지.
나는 내가 궁금합니다.
의미없는 선택이라, 잘못된 선택이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선택에는 나를 이룰 배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지금, 여기에서 현재의 당신을 만들어 온, 앞으로 만들어 갈 자신이 궁금해지길 소망합니다.
얼마 전,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OST “What It Sounds Like"라는 곡을 들었습니다.
"I broke into a million pieces, and I can't go back. But now I'm seeing all the beauty in the broken glass. The scars are part of me, darkness and harmony. My voice without the lies, this is what it sounds like."
백만 조각으로 부서졌고,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부서진 유리 속 아름다움이 보인다. 상처도 나의 일부, 어둠과 조화. 거짓 없는 내 목소리, 이게 내 소리야.
이 가사를 듣는 순간, 지난 시간들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문예창작과 자퇴, 사진, 싱가포르, 에디터, 승무원 준비, 항공사, 호주, 그리고 마케터.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선택들. 부끄럽고, 미숙하고,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패턴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처음 겪은 공황. 그리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내려놓은 회사.
저는 정말 백만 조각으로 부서진 것 같았습니다. 돌아갈 수도, 되돌릴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서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흩어져 있다고만 느꼈던 경험들이 사실은 지금의 나를 이루는 조각들이었다는 것. 상처와 실패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왔다는 것. 그 깨달음의 과정에서 이서원 작가의 책 《오십, 나는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를 만났습니다.
이 책은 물리학 박사이자 대학교수였던 저자가 안정된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고,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입니다. 촉망받는 교수였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인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신이 남의 꿈을 좇고 있었다는 것을.
저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기에, 그의 이야기가 깊이 와닿았습니다. 퇴사 후 2년이 흘렀습니다. 때론 글을 쓰고, 때론 마케팅 업무를 하고, 가끔 사진을 찍는 생활. 회사가 주던 안정감이 사라지니 하루하루가 불안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그 불안과 동행하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특히 와닿았던 문장들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없는 일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폄하하는 사회에서 자랐다. 하지만 세상이 가치를 부여하는 일만 일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우박 쏟아지듯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한다."
"봄꽃도 피는 순서가 있다. 사람도 봄꽃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꽃이 있다. 그리고 그 꽃을 피우는 시기가 따로 있다."
"따뜻한 온실에서 자라는 인삼보다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산비탈에서 자라는 산삼이 되고 싶었다. 교수는 감미로웠다. 하지만 딱 그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고수의 길은 험난했다. 그러나 그만큼 자유로웠다."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련이 남지 않고 후회가 남지 않는 하루를 사는 것이다."
서른이 넘도록 무엇 하나 완성하지 못했다고 느꼈던 저에게, 이 문장들은 조용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직 피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 불안정하더라도 나의 이유로 사는 삶이 더 가치 있다는 것. 그리고 후회 없는 하루를 사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
저자는 말합니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욕구를 무시하고 나만 쾌락을 느끼며 사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을 전제로, 그 위에서 무엇에도 통제받지 않고 내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행동에 내가 흔쾌해지는 일상을 사는 것이다."
남들이 정한 기준이 아닌, 내가 흔쾌해지는 삶. 그것이 제가 찾고 싶었던 답이었습니다.
부서진 조각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것. 상처마저 나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 거짓 없는 나의 목소리를 찾는다는 것.
여러분의 내면엔 어떤 조각들이 있을까요? 어떤 목소리를 발견하게 될까요?
흩어진 경험과 기억으로 나 자신이 미워진 순간이 있다면 그 안에서 어떤 경험과 배움으로 조금 더 단단한 현재의 내가 될 수 있었는지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앞으로 어떤 내가 될지, 어떤 삶을 살지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실 수 있길 바랍니다.
editor 천성민 / @billycheo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