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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씨아저씨 Jun 03. 2023

흙을 밟지 않는 시대

2023. 6. 3

일주일 만에 찾은 뒷산은 더욱더 초록초록해졌습니다.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이 주는 시원함과 풀냄새를 맡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습니다. 


흰눈썹황금새(수컷)이 뒷산에 온 지 벌써 2주가 지났습니다. 아직도 짝을 만나지 못한 모양입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암컷은 보이지 않습니다. 녀석의 노랫소리에 파이팅이 하나도 없습니다. 늘어진 카세트테이프마냥 소리도 좀 늘어지는 것 같고요. 2주 동안 쉴 새 없이 노래를 하니 지칠 만두 하지요. 좀 안쓰럽기까지 하네요. 암컷 빨리 만나서 우리 뒷산에서 꼭 번식할 수 있길 바랍니다. 


흰눈썹황금새(수컷)



 

하이베드로 딸기를 키우는 게 당연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토경재배 딸기를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 갈수록 더 할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일부러 노력하지 않는 이상 흙을 밟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길은 포장되어 있고 심지어 뒷산에도 데크와 야자매트가 깔려있는 코스로만 걸으면 흙을 밟지 않고 걸을 수 있죠.


야자매트


내 옷과 신발에 흙이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주로 흙을 밟을 수 있는 코스로 다닙니다. 그러나 일부러 흙을 밟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산책길을 다니다 보면 중간중간 숲 속으로 난 샛길이 있습니다. 마치 숲 속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이라 사람에게는 기분 좋은 일일지 모르겠는데 가뜩이나 작은 뒷산에 저 길로 인해 새들의 번식지가 줄어듭니다. 


저 길만 막아놓으면 사람들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일정정도의 구역이 형성이 돼서 아마도 지금보다 더 많은 새들이 저희 뒷산을 찾아올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지금 있는 길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건드리지 말아야 할 영역을 지켜주었으면 합니다. 막혔던 길을 뚫어놓은 것인데 다시 막자고 구청에 민원을 넣어볼 생각입니다. 


산책길 사이로 난 또 다른 샛길


저희 집 뒷산 산책코스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엔 먼지털이기가 한대 설치되어 있습니다. 에어건 2개가 달려있습니다. 뒷산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바로 에어건 소리입니다. 저는 저 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서 저곳을 피해 가고 싶지만 저 주변이 뒷산에 있는 유일한 새들의 목욕탕이기도 합니다. 


먼지털이기 반경 10미터 주변이 동네에서 새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만남의 광장이기도 하고 번식기 때 새들의 둥지도 많이 발견되는 곳인데 녀석들은 매일 저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울까요?


먼지 털이기는 등산 중에 벌레나 진드기 같은 것들이 신발이나 옷에 붙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어 털어내고 하산하라는 목적에서 설치되었다고 나와있더군요. 그러니 보건의 개념으로 보면 사용을 권장해야 하지만 일단 그 이유가 진짜인지 의문이 들고 설치 장소에 있어서의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작은 목욕탕 / 먼지털이기 / 큰 목욕탕


조금 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목욕탕이 있으면 새들이 좀 더 편하게 목욕할 텐데 뒷산에 물이 고이는 유일한 곳이 저 위치라 좀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 없을 때 녀석들이 알아서 잘 이용할 거라 믿습니다.


아마도 서울의 근린공원들이 관리되는 방식들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숲은 우리가 잠시 빌려 쓰는 공유공간일 뿐인데 자꾸만 호모사피엔스의 편의만을 위해 무슨 짓을 끊임없이 합니다.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흙을 밟는 시대가 다시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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