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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 May 07. 2020

거봐! 고작 10년밖에 걸리지 않았어!

feat. 이해돋는 영어의 탄생

EBS <나도 작가다> 1차 공모전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위해 작성된 글니다.


이 글 설렘으로 첫발을 내디뎠던 나의 시작에 관한 야기다.


귓전을 때리는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짙게 울려 퍼지던 일본의 어느 여름날 나는 이제 막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야무지게 캐리어를 잡은 두 손에는 약간의 땀이 배어있었다. 입국 수속을 무사히 마치고 나오니 그제야 일본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부산하지만 활기 넘치는 한국과는 다르게 조용하면서도 정갈한 일본이 주는 느낌은 나의 긴장감을 살며시 풀어주었다. 그렇게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리무진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던 비행기 티켓 (왼쪽)과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던 비행기 티켓 (오른쪽)

늦은 저녁 버스에서 내려 도착한 곳은 한국에서 미리 구해 놓은 원룸이었다. 짐을 채 풀지도 않은 채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동네 편의점으로 향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든 도시락을 들고 계산대로 갔는데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일본어로 뭐라고 뭐라고 물어보았다. 아직 일본어가 익숙하지 않은 탓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다가 비닐봉지에 담긴 도시락을 집어 들고 황급히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차가운 방바닥에 앉아서 비닐봉지를 열어 봤는데 그 속에는 차가운 방바닥보다도 더 차가운 편의점 도시락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젓가락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까 그 아르바이트생이 '젓가락 드릴까요? 데워 드릴까요?'라고 물어봤었다는 것은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후로 편의점이나 마트에 가서 계산을 할 때마다 뭐라고 물어보는 거 같으면 무조건 '예스'를 외치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마트에서 만든 회원 포인트카드가 넘쳐나기 시작한 건 웃픈 현실이었다.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갈 생각도 해보지 못한 채 나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의 불빛을 등지고 차가운 도시락을 맨손으로 퍼먹었다. 풀어진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일본어 한마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을까 서러운 감정이 일순간 몰려들며 먹던 도시락을 다시 차가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대충 허기진 배를 달랜 후 이불 한 장 없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과연 이곳에 온 게 잘한 결정일까?'라고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결론이 나지 않는 물음이 끊임없이 밀려와 좀처럼 잠을 청할 수 없었던 일본에서의 첫날밤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원래 미국으로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기도 했고 고등학교 시절 일본 공대 국비유학생 선발 시험에 떨어진 후로 은연중에 일본 유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일본으로 유학을 생각하지 않았던 하나의 이유였다.


고등학생이었던 19살의 철없던 나는 일본 공대 국비 유학생 선발 시험만 통과하면 마치 앞으로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나는 유학 시험에 떨어졌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 미련이 남았는지 한 번 더 도전한 시험에서도 불합격이라는 쓴잔을 마시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겪어 봤던 감당하지 못할 실패와 좌절로 인해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런 무력감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경험들이 다시 새로운 시작과 도전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밑거름이 되었으니 모든 일에는 늘 명과 암은 함께 존재하는 거 같다고 생각한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 때문에 미국으로 유학을 보류하던 중 학부시절 담당 교수님께서 비교적 등록금이 저렴한 일본의 국립대로 유학을 권유하셨다. 그 담당 교수님의 도움으로 일본의 교수님께 연락이 닿을 수 있었고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있어서 큰 문제가 없었기에 영어로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입학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고 일본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 일본어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원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되었고 수업내용의 90% 이상을 이해하 못했던 나는 다른 학생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쏟아부어야만 겨우 수업을 따라갈 수가 있었다.


일본어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내게 한국인이었던 집주인 분께서 자신의 지인들에게 영어를 알려주고 일본어를 배워보라고 제안해 주셨다. 일본어는 한국어와 어순이나 단어 등에서 비슷한 게 많아서 다른 외국어에 비해 비교적 빨리 배울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나는 이미 유창하게 일본어를 하고 있던 현지 한국 분들에게 영어도 한국어와 비슷한 게 많기 때문에 일본어처럼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며 모두들 미덥지 않은 눈초리를 보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일본어를 능숙하게 말할 수 있게 된 만큼 모두들 영어를 능숙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모임의 내용이 점점 입소문을 탔는지 다른 지역에서도 영어를 배우러 오는 경우도 있었고 일본인에게 영어를 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불어나는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해 조잡하게나마 내가 가진 영어에 대한 생각들을 워드로 정리해서 나눠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리했던 내용들이 지금 브런치에서 연재 중인 「이해돋는 영어」라는 콘텐츠로 발전하게 된 거다.

주변의 많은 분들이 일본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지만 그와는 반대로 유학 초기의 내 경제적 상황은 별로 좋지가 않았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직후 엔화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가치에서 거래됐고 집에서 받는 지원금으로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나면 사실상 내게 주어지는 돈은 10만 원이 채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그나마 집주인의 배려로 여름 때마다 별장 정원의 잡초들을 뽑아내고 집안 수리를 도와드리는 일로 집값을 대신하기도 했다.


배가 고픈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아서 생활비라도 좀 벌어보고자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봤다. 그러나 연구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일요일에만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단기간에 비교적 고액을 받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 중 하나가 이삿짐 아르바이트였는데 아르바이트비가 모두 파스와 약 값으로 나가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반복될 뿐이었다. 또한, 더 이상 연구에 집중하기도 힘들어져서 그마저도 계속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렇게 곤궁했던 2년의 시간을 잘 버티다 보니 어느새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일본 문부성의 국비장학생에 지원할 기회를 만나게 됐다. 이 장학금은 일단 등록금이 전액 면제되고 한 달에 약 14만 엔(원화로는 약 150만 원 정도)의 생활비가 별도로 통장에 꽂히기 때문에 일본에서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부성의 국비장학생이 되는 방법에는 총 세 가지가 존재한다.


- 일본 정부 초청 외국인 국비유학생의 선발 유형


1. 일본대사관 추천 제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시험제도로 일본 대사관을 통해 모집

2. 대학 추천 제도

일본의 대학과 현지 대학 간의 협정에 의해 현지 대학에서 일본 대학으로 추천하여 선발하는 제도로, 현지 출신 대학을 통해 모집

3. 일본 국내 채용

현재 일본 대학에 재학 중인 자로서 재적 대학을 통해 모집


나처럼 유학 중에 '일본 국내 채용'으로 국비장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대학교 및 대학원에 재학 중인 모든 유학생들과 경쟁해야 한다. 먼저 서류를 통과한 후 교내 면접을 통과해야만 학교 대표로 선발되는 세 명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문부성에서 이들을 모두 선발할지 아니면 일부만 선발할지 최종 검토를 한다. 일반적으로 학교당 평균 한 명 정도가 선발된다고 하니 최종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정말 피가 마르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몇 년과도 같은 시간의 농도를 가진 몇 주가 지난 후에야 나는 마침내  소식을 듣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 일본 공대 국비 유학생 선발 시험에서 두 번의 실패와 좌절을 겪은 후로 꼭 10년 만의 일이었다.

문부성 국비장학생 합격 메일

곤궁했던 2년간의 석사과정을 마친 후 국비 장학금까지 받고 시작하게 된 박사과정이었지만 채 6개월도 안 돼서 후회가 밀려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박사 과정을 시작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친절했던 교수님은 철저한 방관자가 되셨고 연구의 방향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 매일같이 논문은 언제 쓸 거냐는 교수님의 독촉이 이어졌고 그나마 써간 논문들은 처음부터 싹 다 갈아엎어지기 일쑤였다. 박사 과정이라는 게 석사 때와는 다르게 졸업 기간이 확정되어 있지 않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과연 졸업이라는 걸 할 수나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초조함과 불안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4년 정도면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4년이란 기간이면 어느 정도 연구의 성과가 나올 거라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4년만 버티면 무조건 박사학위를 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종종 대학교 특강을 나가게 되면 다시 박사과정으로 돌아가겠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차라리 군대를 다시 다녀오겠다고 답하곤 한다. 그나마 군대는 2년만 잘 버티면 무조건 제대라는 것을 시켜주니 말이다.

대학원 시절의 나

그렇게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는 싸움에 지쳐갈 때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박사 2년 차에 접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논문을 써가는 족족 교수님 선에서 거절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여전히 연구 성과는 하나도 없었다. 교수님으로부터 논문을 거절당하면서도 계속해서 다시 수정해서 제출했던 시간이 일본 유학 생활을 통틀어 가장 버티기 힘들었을 시간이었다. 박사 3년 차에 이르러서야 겨우 교수님의 컨펌을 받은 논문이 생각보다 괜찮은 저널에 실릴 수 있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부터는 후속 논문들을 큰 어려움 없이 써 내려갈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나둘 쌓여가는 논문들 덕분에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3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5년이란 시간 동안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쉼 없이 달렸지만 그렇다고 너무 연구에만 파묻혀서 산 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으로 음악을 배우기 위해 기타 하나 등에 메고 도쿄로 넘어온 고등학교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와 함께 일본에 있을 때 일본 전역을 여행해 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가난한 유학생이 일본 전역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내일로'와 유사한 '청춘 18'이라는 티켓과 일본 본토의 대부분을 전철만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일본의 철도 시스템 덕분이었다.

청춘 18 티켓

'청춘 18'이라는 티켓의 장점은 그 이름과는 다르게 나이 제한이 없다는 것과 약 만 엔 정도에 5일간 전철을 무제한으로 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특정 기간에만 발권되 저렴한 가격의 이벤트성 티켓이다 보니 거의 모든 역에 정차를 해야 한다는 게 단점일 수 있다. 그러한 단점들은 천천히 흘려보내는 일본의 차창 밖 풍경을 쳐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딱 제격이었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짙게 깔린 역에서 새벽 첫 전철을 기다리며 삿포로로 떠난 일본에서의 첫 여행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한 기대와 설렘에 소소한 추억을 더 얹어 주려고 했었던 것일까 야간 기차를 타고 아오모리에서 하코다테로 넘어가는 도중에 산사태를 만나서 6시간 동안 꼼짝없이 기차에 갇혀있기도 했었다.

하루가 넘는 시간을 달려 삿포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

그렇게 험난한 여정을 겪으며 도착해서였는지 생에 첫 발을 디뎌본 홋카이도에서는 도쿄의 여름에서 느껴보지 못했을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다양한 먹거리와 기념품은 눈으로만 구경해도 충분했고 산 골짜기에 흐르는 온천수에 발을 담그며 공짜로 온천을 즐기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는 돈도 거의 없고 숙박시설들도 모두 예약이 끝난 상태라 비에이(美瑛)라는 시골역에서 노숙을 했다. 모든 것이 내 인생 첫 경험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밤을 지새우며 누워있던 딱딱한 나무 벤치마저 푹신하게 와 닿았다.

비에이 역 (출처 : 니무위키)

팍팍한 연구생활 속에서 이런 소소한 일상의 경험들이 쌓여간다는 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느덧 일본에 첫발을 내디딘 지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이곳에서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됐다. 나는 모든 짐을 다 정리하고 5년 전 일본에서의 첫날처럼 텅 빈 방에 다시금 앉아있었다. 이제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의 불빛 대신 따사로운 햇살이 방안을 가득 채웠고 더 이상 차가운 편의점 도시락을 손으로 퍼먹을 필요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유학 생활은 다른 유학생들과 별다를 거 없이 외롭고 힘들었다. 누구든지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었을 시간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춥고 쓸쓸했을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을 잘 견뎌내다 보니 어느새 따사로운 햇살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두려움과 설렘으로 첫발을 내디뎠던 나의 시작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 일본 유학을 꿈꿨던 철없는 소년은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돌고 돌아 그 시절 자신이 그려봤던 모습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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