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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부장 Jan 03. 2022

참을 수 없는 생일의 무거움

얼마 전 나의 생일이었다. 

남은 케이크로 두어 번 끼니를 간단하게 해결해서 좋았다. 오글거린다며 그런 건 안 한 다더니만 끝까지 불러준 남자 친구의 축하노래와 5개의 촛불이 달콤한 크림이 혀에 닿을 때마다 떠올랐다. 


어릴 적 나의 할아버지 가훈은 남존여비였고 그 가치를 집도하는데 전혀 부족함 없는 시스템이었다. 그 수혜자는 당연 나의 두 오빠들이었다. 오빠들의 생일상과는 확연히 다르게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에게 내가 태어난 날은 그저 깃털처럼 많고 많은 날과 다를 게 없었다. 호적의 내 생일도 실제보다 한 해가 늦고 날짜도 안 맞다.

생일이 없다는 건 진원지를 모르는 강물일지도.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juliamoney/30115794281

출산 당사자인 오로지 엄마만이 내 생일을 알아주었다. 나는 마치 소리 없는 악기, 진원지를 모르는 강물 같았다. 급기야 나는 엄마의 기억력마저도 의심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아무도 관심 없는 내 진짜 생일, 정확한 내 생일을 찾는 것은 나에게는 실존의 문제였다. 내 자아에 문신을 새겨버리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엄마에게 묻고 또 물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 배 아파오기 시작할 때가 눈이 온 거로 봐서 대충 그날이지 아마...... 이런 거 말고 실제로 나를 나은 날이 그때 달력으로 정확이 언제야? 그날 맞아? 맞는 거지? 진짜지?”


할아버지 왕국을 벗어나 내 생일을 주장할 수 있게 된 곳은 첫 사회생활인 국민학교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4~5월 정도가 되면 친한 멤버가 삼삼오오 만들어지면서 꼭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생일파티였다. 문제는 내 생일이 항상 겨울방학이라는 데 있었다. 


생일파티 이벤트란 게 봄여름에 초절정이고 가을을 지나면 꼭 한두 멤버가 갈등하더니 곧 봉합되지만 겨울방학과 동시에 그 모임은 거품처럼 사라졌다. 학년마다 반복되는 데자뷔였다. 박수치는 친구들 속에서 나도 촛불을 불어보고 싶었다. 그 상상을 얼마나 했었는지 모른다. 커서 돈을 벌면 내 돈으로 케이크를 실컷 사 먹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나는 생일이란 것이 싫어졌다. 차라리 생일 따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직장에서는 연초에 직원 복지 향상이라는 정책으로 생일인 직원에게 케이크가 지급된 적이 있었다. 예산 문제이거나 경영 사정이거나 암튼 추석 연휴를 기점으로 변질되던가 사라지곤 했다. ‘회사가 일하는 곳이지, 왜 쓸데없이 개인 생일은 신경을 쓴답시고......?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 연말 겨울 생일의 이상한 비애는 그렇게도 반복되었다. 


계절 리스크만이 아니었다. 옛 남편과는 서로 생일이 하루 차이라 같이 미역국을 먹는 운명이었고 얹혀가는 나는 주인공은 아니었다. 그 후 옛 남자 친구도 처음 두세 번 내 생일을 기억할 뿐 그다음 해부터는 계속 넘어갔다. 나는 이상한 소심함이 있어 내가 먼저 말도 못 했고 또 까먹어버리는 남자에게 늘 같은 말을 했다. 


“괜찮아. 괜찮아”


진짜 괜찮아할 줄은 그건 생각 못했다. 내가 먼저 말하면 되는데, 상대도 그것이 더 편할 텐데 나는 왜 그걸 못했을까. 그래서 한때는 내가 먼저 의식적으로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더랬다. 새 달력을 바꿔 걸으면서 가장 먼저 마지막 장을 찾아 내 생일 날짜에 동그라미 치던 짓을 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게 뭐 대수라고. 4년 마다오는 월드컵도 아니고 해마다 오는 생일을 뭘.” 그러다 보니 진짜 나도 내 생일이 지나서야 알기도 했었다. 진짜 아무렇지도 안은 건지 속으로는 쓸쓸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무거움이 싫다. 


나는 어느새 안 아픈 날과 아픈 날이 비등비등해지는 임계점을 직감하는, 나이 50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인가, 어느 날, ‘나 아니면 누가?’ 라는 생각으로 한 해 한 해 내 생일을 소중하게 치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볍게 가자. 상처받거나 외로워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제는 먼저 말하기로 했다. 우선은 독거인의 필수 동반자, 가까운 친구들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질척거림과 강매 권유의 두 어조를 넘나들며 보험 약관처럼 읊어댔다. 먹고사는 일로 바쁘더라도 서로 생일만큼은 우리 꼭 만나 축하받고 축하해주자는 제안과 특약으로 케이크는 꼭 넣을 것도 말이다. 

문제는 내 생일이 항상 겨울방학이라는 데 있었다.

이번에는 멀리 사는 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야, 너 생일이 3월 며칠이더라?” “생일은 왜 갑자기? 나는 그냥 매일매일이 내 생일이다. 매일 다시 태어나거든. 하하하” 아니, 이럴 수가! 멋있었다. 저렇게 쿨할 수 있는 거구나. 내가 잠깐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생일 동맹 협정은 진행되어야 했다. 


“그거 멋있는 걸. 그런데 우리 지금도 좋지만 독거인끼리 생일만은 서로 챙기는 거 어때? 우리가 자식이 있냐? 남편이 있냐? 혼자 나이 먹고 아프고 외롭고 할 건데 너, 나 몰라라 안 할 거잖아? 나는 너 몰라라 안 할 거거든. 하하하“


“그래, 좋은 생각. 돌아오는 생일부터 꼭 만나자. 나 생일인 봄엔 네가 올라오고 겨울엔 내가 내려감세. 그리고 할머니 돼서도 서로 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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